79화. 파란 2
* * *
“늦은 밤 벌어진 일인 데다 다들 반기고 기뻐하시는 혼례에 차마 재를 뿌릴 수 없어……. 게다가 황궁 안에 안야국 사신들까지 머물고 있어 아뢰기 쉽지 않았습니다.”
천군이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요사이 천신께 정성을 드릴 때마다 눈앞에 붉은 꽃이 아른거리며 거기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하여 대칸께 이 일을 아뢰려던 것이 그만…….”
“피를 쏟는 꽃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천신께서 이르시기를 그것은 기탄을 멸망시키려는 마군이라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욕망과 번뇌를 부추겨 현혹하고 종래에는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악한 악신.”
“악신……?”
“그것에서 흘러나온 피가 황궁 곳곳으로 스미더니 급기야 대칸의 보좌를 적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뭐라?”
천군의 입에서 자신까지 거론되자 그러잖아도 어둡던 대칸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건 대칸의 아우인 차뉴 칸을 비롯하여 다른 칸들도 마찬가지였다.
“기탄의 앞날을 걱정하신 천신께서 조만간 모두의 눈앞에 그 악신의 정체를 직접 밝히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게 대체 언제란 말이……?”
대칸이 천군에게 물으려는 순간.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니, 저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천군이 탁자 위에 놓인 유주 단지로 다가갔다.
“여기에서 간악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녀가 품에 손을 넣어 하얀 깃털을 꺼냈다. 그것은 처음 기탄을 세웠던 1대 대칸 앞에 나타났다는 천신의 것이었다.
흰독수리로 현신한 그가 기탄의 주도가 될 터를 가르쳐주고 사라지면서 남겼다는 깃털은 기탄의 천군들에게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영험한 물건이었다.
날 선 표정의 그녀가 뽀얀 유주가 담긴 단지에 깃털을 넣었다.
깃털이 유주 속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그 찰나의 시간은 영원처럼 길었다. 마침내, 천신의 깃털이 모두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 이럴 수가!”
지켜보던 자들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유주에 잠겼던 깃털 부분이 피처럼 붉어졌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유주를 들여오라 명했던 차뉴 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때 단사관 하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칸. 유주가 담겨 있던 가죽 부대 아래에서 이런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흰 천에 담아온 작은 갈색 돌멩이와 미세한 가루들을 대칸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것이라…….”
다들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황후가 앞으로 나섰다.
“앵속입니다.”
“앵속? 그게 무엇이오?”
처음 듣는 낯선 이름에 대칸을 비롯하여 모두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앵속은 미낭화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대현국와 안야국에 흔히 피는 꽃이라 들었습니다. 여러 색이 있지만, 그중 붉은색이 가장 유명하다지요. 여기 이것은 앵속 열매의 유액(乳液)을 굳혀 만든 약재입니다.”
“약재?”
“기침과 설사를 멈추고 통증을 없애는 약, 목과 뼈, 장이 아픈 데도 잘 듣는 귀한 약이지요.”
막계 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남의 나라의 약재에 대해 황후마마께서 어찌 그리 잘 아시는 겁니까?”
“나도 이것에 대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소. 얼마 전, 궁 안에 이 약재로 인해 죽은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오.”
“예?”
황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이 일이 한낱 여인의 투기로 비추어질까 두려워 쉬쉬했건만, 이젠 어쩔 수 없군요.”
그녀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래 앵속은 기탄에는 없는 것이었소. 7황비가 혼수로 가져오기 전까지는…….”
“7황비?”
다시금 거론된 7황비로 인해 대칸의 미간이 구겨졌다.
“예, 대칸. 좀 전에 말씀드린 효능은 7황비가 제게 일러준 것입니다. 한데 그녀는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멋모르고 앵속을 먹은 아랫것들이 죽고서야 저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대칸이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안야국 황실에서는 앵속을 약재 대신 다른 용도로 쓴다고 하더군요. 최음제……. 미약 중에서도 그 효력이 단연 으뜸이라지요.”
막계 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 최음제라면……. 황후마마, 최음제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지구력과 체력이 남다른 기탄 사내들에게 최음제는 먼 나라 얘기였다. 그건 힘없고 비실비실한, 유약하고 못난 사내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단순한 최음제라면 그렇지요. 하지만 앵속은 다른 것보다 중독되기 쉬운 데다 그 폐해가 커 안야국 황실에서도 사용을 금할 것을 고려 중이라 하오.”
“폐해라면…….”
“처음 한두 번 먹을 땐 황홀하고 기분이 좋지만, 일단 중독이 되면 안색이 창백해지고 식욕이 싹 사라지는 데다 숨이 차고 손발이 떨린다지요.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 반면 낮엔 수시로 졸리고 말이오.”
황후가 쉼 없이 말을 이었다.
“거기에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나는 것은 물론 약효가 사라지면 고통으로 몸이 견디지 못한다는 게요. 그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그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양을 조절하지 못하면 단 한 번만으로도 중독이 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오. 두 황자처럼 숨을 제대로 못 쉬어서 말이오.”
“그럼 7황비가 가져왔다는 그 앵속들은 지금 어디 있소?”
대칸의 물음에 황후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사람을 죽일 만큼 위험하다는 걸 안 이상 그냥 둘 수 없어……. 아랫것들이 죽은 날 바로 창고에서 끌어내 모두 불태웠습니다.”
“황후의 말대로라면 이 황궁에 더는 앵속이 없을 것이 아니요? 한데 어찌……!”
대칸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치켜떴다.
황후가 태운 건 황궁에 바쳐진 혼례 물품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사라진 것이 분명하나 앵속의 쓰임새를 잘 알고 있는 7황비가 사사로이 그것을 가지고 있지 말란 법은 없었다.
대칸과 같은 생각을 한 모두가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알면 알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두 황자의 죽음에 7황비가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곧 경악으로 이어졌다.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가 그런 무서운 짓을……?
그러나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태자 발타고였다.
「일단 중독이 되면 안색이 창백해지고 식욕이 싹 사라지는 데다 숨이 차고 손발이 떨린다지요.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 반면…….」
황후가 열변을 토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점점 더 납덩이처럼 굳었다.
「거기에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나는 것은 물론 약효가 사라지면 고통으로 몸이 견디지 못한다는 게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그 모두가 요즘 자신에게 나타나고 있는 증상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제야 요희가 자신과 잠자리를 갖기 전 내밀었던 술에 생각이 미쳤다.
「이거 한번 마셔 볼래요? 이걸 먹으면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천상의 환희를 경험할 수 있다는데……. 안야국 황궁에선 너나없이 사용하는 비약이에요. 정력에 좋다는 건 죄 들어 있거든요.」
실제로 그날 발타고는 인생 최고의 쾌락을 맛보았다. 한 번 그 짜릿함을 맛보고 나니 도저히 그 기분을 잊을 수 없었다. 해서 그날 이후로 줄곧…….
‘그러니까 지금까지 네년이 날 가지고 놀았단 말이냐?’
발타고가 끓어오르는 울분으로 주먹을 움켜쥔 사이. 천군이 나섰다.
“황후마마의 말씀을 들으니 천신께서 말씀하신 마군의 정체는 앵속, 나아가 그것을 기탄에 들여온 7황비마마가 틀림없는 듯싶습니다.”
황후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천군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7황비가 어찌 그리 위험한 것을 기탄에 들였으며 그 부작용에 대해 굳이 숨겼겠……!”
황후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채 끝내기도 전, 성난 얼굴의 발타고가 대칸의 허락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태, 태자! 태자!”
놀란 황후가 발타고를 소리높여 불렀다. 대칸은 물론 다른 칸들도 태자의 무례한 행동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들 앞으로 천군이 나섰다.
“이런 말씀 송구합니다만, 황자님들만큼은 아니어도 태자께서도 이미 중독이 되신 듯합니다. 안색이 창백하고 눈빛이 온통 흐린 것이…… 마군의 농간이 분명합니다.”
탁.
천군의 말에 대칸이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온몸이 가눌 수 없는 분노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칸들에게는 미안하오만, 오늘 회의는 여기서 접어야겠소. 내 이 일의 전모를 알아보기까진 당분간 회의 진행은 어려울 것 같소.”
“대칸 저희들이 도울 일이라도…….”
대칸이 손을 들어 하투 칸의 말을 잘랐다.
“모두들 오늘 일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었으면 좋겠소. 내 진범이 밝혀지는 즉시, 칸들에게 먼저 알릴 것이니 그리 알고 기다려 주시오. 그럼…….”
대칸이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이어 황후와 천군, 단사관이 그 뒤를 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오?”
“그러게나 말이오. 모두가 모여 추수의 기쁨을 나누는 무림제를 피로 물들이다니. 어찌 이런 참혹한 짓을…….”
“태자까지 중독되었다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니오? 어쩐지 안색이 심상치 않다 했더니만.”
“그러게 말이오. 그나저나 고칠 방도가 있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태자도 위험한 것이 아니오?”
“하. 이래서 약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게요. 힘과 정력이 달리는 놈들이 믿을 데라곤 없으니 그런 것에 연연하는 게지.”
“그나저나 정말 7황비의 짓이 맞을까요? 그럴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보시오, 절도 칸. 뭐 아는 거 없소?”
질문을 받은 절도 칸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밀한 후궁의 일을 내 어찌 알겠소? 그보다 이러고 여기 있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으니, 난 이만 돌아가겠소.”
“이보시오, 절도 칸. 허, 참.”
“절도 칸의 말이 맞소. 대칸을 믿고 우리도 그만 돌아들 갑시다.”
“그럽시다. 달리 우리가 할 일도 없으니 말이오.”
절도 칸을 필두로 칸들이 하나둘, 회의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 * *
“이런 때려죽일 년. 네년이 감히 나를 속여?”
요희의 처소 안이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 찼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건만. 남들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쳐들어온 발타고가 다짜고짜 요희의 목을 그러쥐었다.
우드득. 살벌한 소리와 함께 강제로 침상에 눕혀진 요희의 목에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태, 태…… 자. 그, 그게 무스…….”
놀란 요희가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앵속. 네년이 밤마다 내게 먹인 술 속에 그것이 들었다는 걸 내 모르는 줄 아느냐?”
발타고의 입에서 튀어나온 앵속이란 말에 요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