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사막의 모래바람 3
* * *
탁.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내려온 채찍이 화살통을 채 하늘로 올라갔다.
화살통을 허리에 건 발리안이 다시 미친 듯 화살을 쏘아댔다.
“다들 조심해라!”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향해, 설상가상 이번에는 앞쪽에서부터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생각한 호독니 일행의 반격이었다.
“으아아아!”
“으악!”
“으아아악!”
돌산과 땅 두 곳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화살에 당황한 적들이 끝내 말머리를 돌렸다.
“이, 일단 몸을 피해라, 어서!”
따그닥 따그닥.
그들이 살기 위해 내빼는 옆으로 사람을 태우지 않은 말들이 스쳐 지났다. 근처 절벽 밑에서 발리안을 기다리던 탄해와 다른 말들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발리안의 휘파람 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은 그들이 주인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었다.
“대장!”
“괜찮습니까, 대장?”
절벽 밑으로 달려온 수하들이 목을 꺾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괜찮다. 한데 여긴 어찌 알고 온 것이냐?”
“다와가 꿈자리가 사납다고 어찌나 극성을 부리는지……. 하투 칸을 만나고 오더니 저희더러 당장 파음에 가 보라고 재촉을 해서 왔습니다.”
“그랬구나.”
역시. 열 군사 부럽지 않도록 믿음직스러운 다와였다.
“한데 꼭 보여야 할 놈이 안 보이는구나.”
효령의 일이라면 빠지지 않을 교기가 오지 않다니. 호독니가 용케도 그 말뜻을 알아챘다.
“교기 놈 말입니까? 말도 마십시오.”
후. 호독니가 그답지 않게 한숨을 토했다.
“축제랍시고 다들 그놈에게 제대로 된 기탄 술맛을 보여 준다면서 작당하고 덤빈 바람에……. 교기 그놈, 완전히 인사불성으로 뻗었습니다. 우리가 출발할 때까지도 영 정신을 못 차려서 …….”
“안 봐도 눈에 선하군.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내려가마.”
피식 웃은 발리안이 곧 내려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 * *
“대장!”
땅에 발을 디딘 발리안을 향해 수하들이 몰려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대장? 대체 놈들이 누구기에 우릴 공격한 겁니까?”
“효령인 어쩌다……? 혹 놈들에게 당한 겁니까?”
“대장은요? 어디 다친 데라도……?
발리안이 손을 들어 수하들을 말렸다.
“그 전에…… 물 좀 있으면 다오.”
“아! 죄, 죄송합니다.”
부하가 물이 든 가죽 부대를 가져오는 사이, 발리안이 몸에 묶은 끈을 풀어 효령을 바닥에 누였다.
“효령인 전갈에 쏘였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지만 당분간 고통이 극심할 거다.”
가죽 부대를 받아든 발리안이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에 물을 떨어뜨렸다. 무의식중에도 물을 삼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제야 안도한 발리안이 겨우 자신의 목을 축였다. 그러나 그 휴식과 평화도 잠시였다.
“대, 대장 저기 좀 보십시오!”
수하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서쪽을 가리켰다. 저 멀리 사막 끝에서 뿌연 모래 먼지가 일었다. 말에 탄 군사들이었다.
그 수가 엄청난 것이 족히 백 명은 넘어 보였다.
“저놈들은 뭐죠? 조금 전 달아난 놈들은 모두 이쪽으로 갔는데…… 저들은 대체……?”
수하의 말처럼, 지금 나타난 자들은 발타고의 수하들과는 무관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무장을 한 것이나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기세로 보아 절대 호의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제길!”
호독니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
발리안의 미간도 사정없이 구겨졌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아픈 효령에, 자신도 수하들도 이미 화살이 바닥난 상태였다. 백병전으로 직접 맞붙는다면야 저 정도 숫자쯤 문제도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간 칼을 채 뽑아보기도 전에 적들의 화살에 목숨을 잃을 터.
상대가 누구든 기탄의 군사들은 그 하나하나가 최고의 명사수들이었다.
“호독니.”
발리안이 다급히 호독니를 불렀다.
“지금 당장 효령을 데리고 떠나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장?”
“십중팔구 저들이 노리는 건 나일 게다. 내가 남아 시간을 벌 테니 너흰 서둘러 여길 빠져나…….”
“미쳤습니까?”
호독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많은 적들을 혼자서 상대하겠다니.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동료들에게 버림받아 죽어 가던 날 살린 게 대장입니다. 근데 나더러 지금 대장을 배신하란 말입니까? 못 갑니다. 아니, 안 갑니다. 차라리 여기서 대장과 같이 죽……!”
순간, 발리안이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내가 네놈을 어떻게 살려 놨는데 함부로 죽음을 입에 담아?”
그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남은 수하들을 노려보았다.
“네놈들 눈엔 내가 여기서 죽을 만큼 시시한 놈으로 보이나? 난 겨우 이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전장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내가 지나온 나락을 너희들이 다 안다고 생각지 마라.”
“대장!”
“무의미한 개죽음은 충성이 아니라 나에 대한 모욕이다.”
발리안의 시선이 얼핏 바닥에 내려놓은 효령을 향했다.
“난 절대 죽지 않는다. 약속했단 말이다. 평생 같이하기로, 어떤 순간에도 지켜 주겠다고!”
그가 다시금 호독니에게 말했다.
“약속해라. 효령을 안전하게 다와에게 데려가겠다고. 난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살아 돌아간다. 그러니…….”
호독니가 지지 않고 외쳤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래서 효령이 저놈이 처음부터 싫었던 겁니다. 언젠가 저놈이 대장 발목을 붙들 것 같아서…….”
“호독니!”
호독니가 사납게 발리안의 손을 떨어냈다.
“좋습니다. 대장 말대로 하지요. 하지만 이거 하난 명심하십쇼. 대장이 살아 돌아오지 않으면 효령이 저놈은 내 손에 죽을 겁니다. 하늘의 천신께 맹세코, 이 손으로 저 목을 비틀어 버릴 겁니다.”
호독니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그러니 놈을 지키고 싶으면 꼭 살아 돌아오란 말…….”
발리안이 와락, 호독니를 끌어안았다.
“고맙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를 모질게 밀쳐낸 발리안이 훌쩍 도도의 등에 올라탔다.
“돌아가는 대로 수하들을 전원 무장시키고 대기해라.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알겠습니다.”
“대장. 이거…….”
수하 하나가 남은 화살을 모조리 끌어모아 그에게 내밀었다.
“조심하십시오, 대장.”
“그래, 고맙다. 모두들 주도에서 다시 만나자. 그럼…….”
발리안이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모래 폭풍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적들을 다른 방향으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부디 그 약속 꼭 지키십쇼, 대장.’
그 담담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호독니가 어금니를 사리물며 몸을 돌이켰다.
“우리도 그만 가자.”
“저, 정말 이대로 가는 겁니까, 천장?”
“대장을 두고 가다니 말도 안 됩…….”
호독니가 버럭 성을 냈다.
“네놈들이 감히 대장의 명을 어기겠다는 거냐? 적이 아니라 내 손에 죽어 볼 테냐?”
그 엄청난 기세에 수하들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토를 다는 놈은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그건 대장이 죽을 거라고 믿는단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내 말 알아들었으면 어서들 말에 타.”
발리안을 대신하여 효령을 등에 묶은 호독니가 제일 먼저 말에 올랐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라. 우리가 되도록 빨리 여길 벗어나는 게 대장을 도와주는 거다. 그래야 대장도 마음 놓고 놈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럼 나부터 출발한다. 하!”
정말 호독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말을 달렸다. 그제야 부랴부랴 수하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멀어지는 소리에 발리안의 입 끝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고맙다, 호독니. 우리 살아서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효령이를 부탁한다.’
그가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려라, 효령아. 곧 네게 달려가마.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라.’
* * *
어느새 황혼이 물드는 시간.
기탄의 주도 대정에서는 오늘도 왕족 회의가 한창이었다. 대칸을 중심으로 그 양옆에 나눠 앉은 칸들이 탁자 위에 놓인 자루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칸이 단사관에게 일러 들이라 한 것이었다.
“이것이 이번에 대도위가 내게 선물로 가져온 콩이요. 추운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종자라더군.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줄 테니 다들 영지에 심어 보시오.”
대칸의 말에 하투 칸이 제일 먼저 관심을 보였다.
“그러잖아도 겨울이면 식량이 부족하여 걱정이었는데……. 이것을 재배할 수 있다면 백성들의 굶주림을 더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렇지. 대도위 말이 이것은 사람뿐 아니라 말에게도 두루 도움이 된다 하오.”
대칸의 말에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람 이상으로 말을 중시하는 기탄인에게는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다.
“말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된답니까?”
“대도위가 말하길, 이건 말들이 아주 아주 좋아하는 곡물이라 하더군. 하여 아픈 말도 잘 받아먹는다지. 또 풀보다 양분이 많아 말들의 근육량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했소.”
대칸이 말을 이었다.
“껍데기까지 먹일 수 있어 버릴 것이 없는 데다, 무엇보다 안전해서 속병이 있는 말에게도 효과가 있다지 뭐요?”
말이 장거리를 달리거나 교배를 하기 위해선 잘 먹고 몸에 양분을 비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말들은 갖은 질병에 시달렸고 그에 따라 자주 식욕을 잃었다.
앓느라 아무것도 먹지 않는 말을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망아지들에게도 빈번히 나타나는 속병은 말치기들에게는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심할 경우 말의 위에 구멍이나 출혈이 생기는 것은 물론 폐사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런 걱정을 덜 수 있다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는구려. 이건 땅의 지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되고 비탈진 산에 심어도 잘 자란다 하니, 곡식을 키우기에는 적당치 않은 우리 기탄엔 꼭 필요한 작물이오.”
“그렇게 되면 고질적인 건초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하투 칸이 반색하며 말했다. 다른 칸들도 거들고 나섰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것이 잘만 자라 준다면 사람이나 말이나 겨울나기가 한결 수월해지겠습니다.”
“저희에게도 넉넉히 나눠주십시오, 대칸.”
여러 칸들이 앞다투어 흥미를 보이는 것과 달리 태자 발타고와 절도 칸만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다 생각이 딴 데 가 있기 때문이었다.
‘발리안 그놈, 지금쯤 사막에서 들짐승들 밥이 됐겠지?’
발타고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이. 절도 칸은 미간을 찌푸린 채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절대 발리안이 죽게 둬서는 안 되네.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오게.」
지엄했던 황후의 명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그러잖아도 황궁 이곳저곳에 끄나풀을 심어 둔 그녀가 앵속에 중독된 아들 발타고를 가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가 무슨 사고라도 칠까 봐, 그녀는 발타고와 요희의 감시에 바짝 공을 들였다.
발타고가 발리안을 죽이기 위해 수하들을 움직였다는 걸 안 황후는 서둘러 절도 칸에게 그들의 뒤를 쫓으라 명을 내린 것이었다.
「하, 하지만 황후마마. 그러다 구림 부족에서 이 일을 문제 삼기라도 하면 제 처지가…….」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걸세. 왜냐하면…….」
황후가 절도 칸을 향해 선득하게 웃어 보였다.
「곧 그깟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질 테니까.」
그때를 떠올린 절도 칸의 입에서 남모르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늦지 않아 다행이야. 태자가 일을 치기 전에 대도위를 붙잡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