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사막의 모래바람 2
* * *
뿌우, 뿌우.
“……!”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는 호각 소리에 발리안이 퍼뜩 눈을 떴다.
대체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머리 위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벌건 새벽노을이 쏟아져 들어왔다.
‘……효, 효령아!’
효령에게 생각이 미친 발리안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제 모습 그대로 효령은 아직 그의 품에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둥근 어깨가 여명의 파편 아래 투명하게 반짝였다.
지난밤은 마치 꿈 같았다. 볕이 나면 사라져버릴 이슬처럼 위태하고 아슬아슬했던 순간들. 하지만 그래서 매 순간이 더 소중하고 애틋했다. 그 극심한 고통의 와중에도 효령은 제 목에 두른 손을 풀지 않았다. 그 간절한 손길이 마치 이생을 향한 마지막 미련처럼 느껴져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달빛에 빛나던 효령의 몸은 양털보다 보드랍고 눈보다 하얬다.
그녀의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서, 발리안은 그의 생에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세심함으로 효령을 소유했다.
물기에 젖은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그 입에서 전갈 독이 주는 고통과는 전혀 다른 신음이 새어 나왔을 때. 발리안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사리물었다.
“……!”
쓰라림과 환희가 교차하던 지난밤을 반추하던 발리안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핏기가 사라진 효령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더럭 두려움이 밀려왔다.
효령이 숨을 쉬는지 확인해야 했지만, 겁이 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더는 그녀 없는 삶을, 밤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괴로워진 발리안이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은 순간.
“……!”
그의 눈이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졌다. 마치 그의 불안과 공포를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효령의 입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효, 효령아!”
발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가 서둘러 효령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미세하지만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효령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됐다! 됐다, 효령아!”
발리안이 기쁨에 겨워 효령을 끌어안았다. 파음에 사는 전갈의 맹독에 당하면 보통 두 시진(4시간) 안에 사망했다.
그 가장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 약 3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겠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발리안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더는 한시도 이 누추하고 차가운 곳에 효령을 두고 싶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효령의 옷을 단단히 여며준 발리안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돌아온다.”
발리안은 활과 화살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아직은 이른 새벽. 천지는 아직 흐릿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차가운 어스름을 뚫고 산꼭대기에 오른 발리안이 먼 곳을 향해 눈을 들었다.
조금 전 들은 호각 소리는 뭐지?
발리안은 새벽빛에 의지하여 분주히 사방을 살폈다. 서쪽과 북쪽의 사막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동쪽의 초원과 남쪽 땅 역시 평화로이 잠들어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무리 다시금 귀를 기울여도 사방은 무서우리만큼 적막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발리안이 효령에게 돌아가려 몸을 돌이키려는 찰나, 그의 눈에 어제는 보지 못한 풍경이 들어왔다. 그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절벽 아래, 튀어나온 커다란 바윗돌에 가려 있던 나무 몇 그루.
‘……!’
고맙게도 그 나무는 느릅나무였다.
“저거라면……!”
눈을 빛낸 발리안이 서둘러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환할 때보다 몇 배는 더 어렵고 아슬아슬한 길이었지만 그의 동작엔 거침이 없었다. 땅 아래 발을 디딘 발리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조금만 기다려라, 효령아.’
그가 무서운 속도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느릅나무의 껍질은 아주 질겨서 꼬면 밧줄 대신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거라면 정신을 잃은 효령을 데리고 가는 데 도움이 될 터.
필요한 양을 챙긴 발리안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나무들 뒤에 얼핏 숨은 돌무더기가 보였다.
‘……서, 설마!’
「석굴이 가득한 절벽 아래 네 아비를 묻었다.」
하투 칸의 말을 떠올린 발리안이 천천히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꿈처럼 아득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실체와 마주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려 좀처럼 진정하기 어려웠다.
“……!”
이 황량한 사막에 어울리지 않게 홀로 짙푸른 느릅나무 뒤. 아버지는 거기 있었다.
모질게 흘러간 세월의 흔적으로 누런 모래가 쌓이고 돌 몇 개가 떨어져 내렸지만, 무덤은 여전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울컥, 목구멍까지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아…… 버지.”
발리안의 입에서 오래도록 상처로 남아 있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하투 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끝없이 미워하고 원망했던 사람.
발리안에게 있어 아버지는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그래서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린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름도 모르는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병석에 누운 어머니께 차마 진실을 물을 수 없어 홀로 그 얼굴을 그리며 잠 못 들던 밤이 얼마였던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설규한, 아버지의 이름 석 자를 발견했을 때. 그때부터 안야국은 이미 죽은 그를 대신하는 동경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이었지만, 힘없는 안야국 백성들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여버렸던 데에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도 한몫했을 터.
하지만 모두가 떠난 사막에 외로이 홀로 남은 아버지의 무덤과 마주한 지금.
발리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미움과 원망이 모래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걸 느꼈다.
「네 아비는 너와 네 어미를 지키다 죽었다. 훌륭한 사내였다, 네 아비는. 내 생전에 그보다 눈부신 사내는 보지 못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은 아버지가 새삼 존경스럽고 또 자랑스러웠다.
‘뵙고 싶었습니다, 오래도록.’
발리안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색색으로 물든 하늘 위를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발리안은 그 날개 위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마음을 실었다.
절 낳아주셔서…… 세월에 지지 않고 오늘까지 굳건히 절 기다려 주셔서…… 그리고 효령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어머니께 그러셨던 것처럼 저 역시 목숨을 걸고 효령일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못다 했던 몫까지…… 반드시 행복해지겠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절 지켜봐 주십시오.
아버지에게 인사를 고한 발리안이 뒤돌아 절벽을 향해 달렸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오랜 마음의 짐을 던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환했다.
앞으로 어떤 시련이 몰아친다 해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하늘에서 지켜보는 부모님과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하투 칸이,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효령이 있었다.
‘효령아.’
차가운 바람을 뚫고 달리는 발리안의 뒤로 새날을 알리는 찬란한 햇발이 밀려들었다.
* * *
효령을 업은 발리안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의식을 잃은 사람을 데리고 험한 산을 타는 건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었다. 더욱이 급경사에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은 매끈한 돌산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느릅나무 껍질을 꼬아 만든 그물망 덕분에 두 손이 자유로웠다. 효령을 자신의 등에 단단히 묶은 그가 바짝 몸을 낮춘 채 산등성이를 기다시피 걸었다.
탄해가 달려간 남쪽을 향해 발리안은 쏟아지는 햇살을 뒤로 한 채 쉼 없이 돌산의 산봉우리를 넘었다. 땅으로 내려간다면 지금보다야 편할 테지만 적을 만났을 때 속수무책이었다.
높은 곳이 아래를 살피기에도 공격하기에도 훨씬 더 유리할 터.
“…….”
어제 오후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데다 효령까지 데리고 가자니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러나 발리안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효령보다 몇 배는 무거운 아굴가와 다른 수하들을 업고 전쟁터도 사막도 지나온 그가 아니던가.
‘조금만 견뎌라, 효령아. 곧 편히 쉬게 해 줄……!’
순간.
뿌우. 새벽에 들었던 호각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새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소리는 조금 더 또렷하고 가까이에서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어디지? 대체 누가……?’
자신을 죽이려던 자들이, 있는 곳을 들킬 어리석은 짓을 할 리는 없고. 호각을 분다는 건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거나, 누군가를 찾는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저기다!’
이내 발리안의 시선 안으로 그가 향하는 돌산의 남쪽 부분에서 흐릿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워낙 거리가 먼 탓에 형체가 정확하지 않았지만, 얼핏 말에 탄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나, 둘, 셋…… 열?
숫자로 보아 어제 그 무사들의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누구……!
순간, 발리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뿌옇게 이는 모래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한쪽 귀밑머리만 딴 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머리, 덥수룩한 수염, 떡 벌어진 어깨. 분명 호독니였다.
“……!”
그러나 기뻐하던 것도 잠시. 그들의 뒤로 그 몇 배나 되는 무사들이 따라붙었다. 어제 발리안과 효령을 공격한 발타고의 수하들이었다.
호독니 일행은 아직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뒤를 쫓는 자들이 화살이라도 쏜다면 끽소리 한 번 못 내고 그대로 전멸이었다.
“빌어먹을!”
재빨리 일어선 발리안이 다급히 활에 화살을 걸었다.
“뒤를 봐라, 호독니. 뒤를 보란 말이다!”
휘이익. 발리안의 화살이 사막의 거센 모래바람 속으로 튕겨 나갔다. 약 120장(360m)을 날아간 화살이 호독니의 귀를 스쳐 바닥에 떨어졌다. 느닷없는 공격에 놀란 호독니가 화살을 피해 뒤로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들을 추격하는 낯선 무리를 발견했다.
“빌어먹을, 앞뒤로 웬 놈들이야?”
곧이어 휘익. 길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호독니 천장, 저기!”
수하 중 한 사람이 높은 돌산 위에 우뚝 선 발리안을 발견했다.
“대장이다!”
길게 휘날리는 발리안의 검은 머리카락을 알아본 다른 수하가 소리쳤다.
“그렇다면……!”
조금 전 날아온 화살이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발리안이 쏜 것임을 깨달은 호독니가 소리쳤다.
“다들 흩어져 전속력으로 달려라. 거리를 벌린 다음 반격을 시작한다.”
“예, 천장.”
순식간에 호독니와 수하들이 대열을 벌리며 흩어졌다. 그들이 점점 더 발리안과 가까워지는 사이, 발리안이 수하들의 뒤를 따르는 적들을 향해 다시금 화살을 날렸다.
휘이익, 휘이익. 동시에 날아간 두 대의 화살에 두 명의 무사가 목을 뚫려 말에서 떨어졌다.
“조심해라, 기습이다.”
으아아아!
으악.
휘이익, 휘이익. 쉼 없이 날아오는 화살에 적들이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었다.
“반격, 반격하라.”
당황한 적들도 어느새 공격 대형을 갖췄다.
앞의 무사들이 방패를 든 가운데, 뒤를 달리는 무사들이 발리안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햇살과 돌산의 높이에 막혀 대부분 절벽에 빗맞았다.
그사이. 화살이 동난 발리안이 주르륵, 위태로이 산등성이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탁. 아슬하게 벼랑 끝 튀어나온 돌에 발을 버틴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수하에게 외쳤다.
“화살!”
발리안의 말을 알아들은 수하 하나가 자신이 차고 있던 화살통을 풀었다. 그리고 달리는 말 위에서 하늘 높이 그것을 쳐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