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사막의 모래바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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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로 벌어진 옷 사이로 이제껏 효령이 감추고 있던 비밀이 드러났다.
답답하리만큼 칭칭 동여맨 하얀 천 위. 손을 대면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듯 보드랍고 뽀얀 가슴이 가쁜 숨소리와 함께 위태로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서, 설마 너……!”
발리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엄청난 충격에 모든 감각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대장. 혹…… 스스로가 납득 못 할 당황스러운 순간이 온다 해도 자신을 믿으십시오. 대장은 몰라도, 대장의 본능과 영혼은 그게 옳은 선택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요.」
효령을 구하고자 강제로 그녀와 입을 맞췄던 날 모개가 했던 말…….
그 의미를 깨닫자마자 갑자기 숨이 막히며 현기증이 일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유난히 무더웠던 안야국의 여름, 그 긴긴밤 자신이 잠 못 들던 이유. 잠결에 뒤척이던 효령이 무심히 가슴에 안길 때마다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던 이유를…….
짙고 긴 눈썹, 발그레한 뺨,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지 살며시 벌어진 붉은 입술. 문득 거기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침상을 박차고 나갔던 게 몇 번이었는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돌처럼 굳어버린 제 심장을 너무도 소란스레 깨워버린 그 사랑스러움, 그 아름다움을 어찌 그리 무심히 넘겼을까.
자신의 끝 모를 아둔함에 치가 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뒤설렜다.
술과 들뜬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효령에게 취했던 축제의 밤. 그 밤의 깊은 어둠 속, 자신의 불온한 욕망을 서슴없이 헤집어 놓았던 꿈이 이제 더는 헛꿈이 아니었다.
더 이상 그녀를 밀어내려 애쓰지 않아도, 제 감정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
효령의 위태로운 상태를 떠올린 발리안이 얼른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시야 안으로 핏기가 사라진, 아니 어느새 파랗게 질려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신 차려, 효령아!”
미친 듯 그녀의 몸을 일으킨 발리안이 효령의 몸에서 옷을 완전히 걷어냈다.
과연 그녀의 하얀 등, 목 아랫부분에 불긋한 흔적이 있었다. 그 주변이 부은 것이 아무래도 전갈에게 당한 모양이었다. 야행성인 전갈이 어둡고 비좁은 돌 틈에 숨어 있다 효령이 거기 손을 짚는 순간 밀려나 그녀의 몸 위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리안은 효령의 상처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독을 빨고 또 빨았다.
“아…… 파.”
반쯤 의식을 놓은 채 가느다랗게 외치는 효령의 목소리에 가슴이 찢어졌다.
전갈 독에 당하면 불에 데거나 뾰족한 것에 몸이 관통당하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에 비해 근육은 마비되어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발리안은 그녀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저 좀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효령일…… 제게서 효령일 빼앗아 가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발리안은 얼굴도 모르는 친아버지를 향해 애원했다.
어머니가 그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했던 슬픔의 장소.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만으로는 차마 다 헤아리지 못했던 그 괴로움이 순식간에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힘을 내, 효령아. 날 위해 힘을 내, 제발…….”
그러게, 이 험한 곳에 그녀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사막이 보고 싶다’던 효령의 진심은 자신 혼자 슬픔을 삭이게 두지 않겠다는 배려였을 터.
그걸 뻔히 알면서도 효령을 끝내 뿌리치지 않았던 건 잠시라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이기심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효령아.
발리안이 자책감으로 입술을 사리문 사이.
“무, 물…….”
바짝 마른 입술을 한 효령이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 그예 의식을 잃었다.
“효령아, 효령아!”
발리안이 효령을 안고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축 늘어진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젠장!”
버럭 소리를 지른 발리안이 다급히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단검을 뽑아 바닥에 던져 놓은 그가 효령의 머리를 무릎 위에 받쳤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라, 효령아.”
쓰윽. 발리안이 단검을 들어 제 손바닥을 베었다.
잘 벼려진 날이 지난 자리에 이내 흥건히 피가 고였다. 주먹을 움켜쥔 발리안이 손바닥에 난 피를 효령의 입으로 흘려 넣었다.
뚝, 뚝.
힘없이 벌어진 효령의 입 안으로 붉은 핏물이 스며들었다.
‘제발 정신 차려라, 효령아. 제발…… 제발…….’
뚝, 뚝.
간절한 염원을 대신하는 무거운 소리가 조용한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당장 터질 것 같은 발리안의 심정과 상관없이 무념한 시간이 더디 흘렀다.
진하디진한 피가 푸릇한 효령의 입술에 고요히 스미기를 수십여 차례. 콜록콜록 작은 기침 소리와 함께 그녀의 숨통이 트였다.
“효령아.”
“대…… 장.”
간신히 눈을 뜬 효령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대장에게 할…… 말이…….”
“아니, 하지 마. 나중에…….”
“아니……. 지금 꼭…… 해야…….”
발리안의 만류에도 효령이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 이제껏…… 거, 거짓말을 했어요. 사실 난…… 사내가 아니라 여자…… 예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리고…….”
하아, 하아. 많이 고통스러운지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난 한유의 먼 친척이 아니라…… 그 애의…… 사촌이에요.”
“……뭐?”
예상 밖의 말에 발리안의 눈이 커졌다.
발리안이 아는 한 한유의 아버지 명국공에게 형제라고는 누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선황제의 후궁이 되었다 산고로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그렇다면 효령의 정체는?
“……!”
순식간에 발리안의 말문이 막혔다. 여태껏 멋모르고 거리낌 없이 대한 효령이 실상은 금지옥엽 장공주였다니.
맹유천이 눈에 불을 켜고 효령을 쫓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발리안이 연이은 충격으로 얼어붙은 사이. 효령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늘…… 말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소…… 속여서…… 미안해요. 나…… 대장이랑 같이 대장 아버님의 무덤에도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
고통을 참느라 효령이 아랫입술을 힘껏 사리물었다. 어느새 혀가 빳빳해진 것이 이제는 말 한마디 잇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그 감당하기 힘든 아픔도 그녀의 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 안의 생명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는 지금, 효령에게 더는 주저할 시간도 망설일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 대장을 마, 많이…… 좋아…… 해요. 그래서 대장을…….”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그러겠다고 모개, 다와와 약속했는데…….
효령의 커다란 눈망울 가득 눈물이 고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 것을…….
발리안으로 인해 두려웠던, 가슴 떨렸던, 그리고 행복했던 모든 순간들이 그림처럼 눈앞을 스쳤다.
부용각에서 제 손목을 붙든 그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순간 얼마나 심장이 두근댔는지, 자꾸만 그 얼굴이 떠올라 잠 못 이룬 밤이 얼마였는지…….
절 안아 주던 너른 가슴, 늘 그 입 끝에 머물던 짓궂은 미소. 툭툭 던지는 말과는 달리 따뜻하고 다정했던 손길……. 발리안과의 소중한 추억들이 뜨거운 눈물 속에 아롱졌다.
그와 처음으로 짝이 되어 춤을 췄던 축제의 밤. 자신을 향하던 발리안의 뜨거운 눈길과 평생 함께하자던 굳은 약속, 그리고 열기로 갈라졌던 그의 입술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메마른 입술에 먼저 입 맞추고 사랑한다 고백할 텐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뼈아픈 후회가 되어 주르륵,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하니 그러지 않기를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죽은 후 발리안이 받을 상처가 너무도 크기에.
내내 아픈 삶을 살아온 그에게 또다시 모진 짓을 하는 것만 같아 가슴이 찢어졌다.
「대칸께서 왕자님을 연제야 공주님과 혼인시키려는 것 같다. 그래서 큰일을 맡기시려고.」
다와의 말을 떠올린 효령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야. 대장이 나 때문에 오래 아파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효령의 눈으로 다시금 눈물이 밀려들었다.
‘미안해요, 공주님. 부디 날 용서해 줘요. 오늘 하루만…… 이번 한 번만 대장을 나에게 양보해 줘요. 당신에겐 많은 날들이 있지만, 나에겐, 나에겐…….’
이내 호흡이 흐트러지면서 효령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시야가 흐려진 그녀가 보이지 않는 발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 대장…….”
“효령아…….”
발리안이 허공을 휘젓는 효령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하아. 그녀가 마지막 힘을 다해 발리안을 향해 웃어 보였다.
부디 대장의 마지막 기억 속의 나는 이렇게 환한 모습이길…….
사랑해요……. 효령은 턱 끝까지 올라온 마음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다른 말을 했다.
“안아…… 줘요, 대장. 나……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긴…… 싫……. 그러…… 니까, 그러니까 제…… 제…… 발 이 고통…… 을 잊게 해…….”
평생 같이 있겠단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대장.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줘요. 사랑해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앞으로도 영원히…….
끝내 말을 맺지 못한 효령의 입에서 위태로운 비명이 새어 나왔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그녀의 온몸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
소리를 내지 않으려 발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힘주어 깨물었는지 어느새 잇새로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찢어진 입술보다, 베인 손보다 아픈 건 마음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줄 알았다면…….
목숨보다 아까운, 차마 바라보기만 해도 애틋한 그녀를 이런 차갑고 허름한 곳에서 가지게 될 줄, 떠나보내게 될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진작 미친 척 널 안아 볼 것을.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효령의 말처럼 그녀가 느끼는 저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는 것뿐.
“…….”
입안에 고인 피와 함께 심장이 찢기는 괴로움을 억지로 삼켜 버린 발리안이 제 옷의 허리띠를 풀었다.
저고리를 벗어 던진 그가 효령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한다, 효령아. 사랑해…….”
효령의 입술 위에 겹쳐진 그의 얼굴에서 툭,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그와 맞닿은 차가운 입술이 그를 받아들이려 애처로이 버둥댔다.
하나로 겹쳐진 두 개의 입술이, 생명을 대신하는 간절한 숨결과 비 오듯 쏟아지는 눈물로 뜨겁게 젖어 들었다.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
얼음처럼 창백해진 효령의 몸 위로 피 같은 붉은 열꽃이 피어났다.
당장 꺼지려는 불꽃과 그를 붙들려는 필사의 몸짓. 그 애처로움에 달마저 고개를 돌렸다.
“내 말 들려, 효령아? 효령아. 효령…….”
이를 악다문 발리안의 어깨가 부서질 듯 떨렸다. 소리 없는 흐느낌이 짙은 어둠 속을 가득 채웠다.
부디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밤이 아니기를…….
부디…… 이 차가운 흙바닥, 싸늘한 적막만이 가득한 버려진 자들의 땅에서 널 안은 내 죄과를 씻을 날이 오기를.
그래서, 그래서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널…… 꽃이 가득한 향기로운 침상, 행복이 수놓인 비단 이불 위에서 아내로 맞을 날이 다시 오기를……. 제발 그날이 꼭 오기를…….
가슴을 저미는 탄식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