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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74화 (74/116)

74화. 운명의 소용돌이 3

* * *

휘이익,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효령의 귓전을 스쳤다.

탁. 효령의 머리카락을 지나친 화살이 그대로 모래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누런 능선 위로 수십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어서 말에 타! 그리고 반대편을 향해 달려. 돌로 된 산이 나타날 때까지.”

고함을 친 발리안이 말 안장에서 채찍을 내렸다.

휘익.

그가 낸 휘파람 소리에 도도를 제외한 모든 말들이 일제히 모래 언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대, 대장은……!”

“먼저 가. 곧 뒤따라갈 테니까.”

“알았어요.”

발리안이 채찍을 휘둘러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는 사이, 효령은 재빨리 말에 올랐다.

“빨리 와야 해요, 대장.”

힘껏 외친 그녀가 말무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발이 푹푹 빠짐에도 불구하고 말들은 미친 듯이 경사면을 질주했다.

그 뒤를 따라 언덕에 오르니 굽이굽이 모래사막 끝에 흐릿하니 돌로 된 산과 절벽들이 보였다.

‘대, 대장!’

효령이 뒤를 돌아보았다.

“……!”

능선을 넘어온 무사들이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리며 벌떼처럼 샘가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들에 가려 발리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대장 혼자서 저 많은 사람을 감당하기엔……. 안 되겠어, 나라도……!’

말머리를 돌리려던 효령의 귀로 이전에 발리안이 했던 말이 스쳤다.

「위험에 처하면 짐이 되지 않는 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설사 네가 무리에서 떨어져 길을 잃는다 해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내. 그러니 최대한 위험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

발리안의 말이 맞았다. 이렇다 할 무기도, 능력도 없는 자신이 나섰다간 오히려 그의 발목을 붙잡게 될 터.

‘기다릴게요, 대장. 꼭 무사히 날 찾으러 와 줘요.’

모질게 마음을 먹은 그녀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을 향해 달렸다.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언덕 몇 개를 넘었을 때, 저 멀리 아물거리는 아지랑이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힐끗 뒤를 돌아본 효령의 얼굴이 해처럼 환해졌다.

“대장!”

점점 빠르게 다가오며 모습을 키우고 있는 그들은 발리안과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도도였다. 다시 만나기 무섭게 효령이 발리안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아요? 다친 덴 없어요?”

“난 괜찮은데 물이 든 가죽 부대가 화살에 맞아 터졌다. 놈들이 모래바람에 묶인 사이 서둘러 여길 피해야 해. 가자!”

두 사람은 다시금 함께 말을 달렸다.

수도 없이 일었다 사라지는 모래 먼지 속을 뚫고 달리기를 반 시진여. 멀리 배경처럼 보이던 돌산이 드디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가까이서 보는 돌산은 생각보다 높고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양쪽으로 어찌나 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사막의 모래 언덕과 같은 색과 모양을 한 그것이 장벽처럼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젠 어떡해요?”

“…….”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었던 발리안이 이내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휘익. 그의 휘파람 소리에 탄해가 가까이 다가왔다. 발리안이 탄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치 사람에게 하듯 말을 했다.

“저쪽…….”

발리안이 돌산의 남쪽을 가리켰다.

“놈들을 저리로 이끌어야 한다. 할 수 있지?”

히이잉. 탄해가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앞발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도도에게서 활과 화살, 채찍을 챙긴 발리안이 효령에게 말했다.

“탄해가 놈들을 유인하는 동안 우리는 이 산을 넘어간다.”

“네, 이 산을요?”

효령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돌산은 험한 데다 가파르기가 절벽과 다름없었다. 그 중턱을 지나면 모래 언덕처럼 매끈한 산봉우리가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과연 자신이 여길 올라갈 수 있을지.

그러나 효령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우겨서 따라온 길인데 발리안의 짐이 될 순 없었다.

“알았어요, 해 볼게요. 그럼 어서 가요.”

“먼저 올라가.”

발리안이 효령을 안아 손을 잡을 만한 곳에 대줬다. 그녀가 서툰 몸짓으로 돌산을 올라가는 사이, 발리안이 탄해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가라, 탄해. 부탁한다!”

히이잉. 힘차게 울부짖은 탄해가 돌산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말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발리안은 재빨리 바닥에 남은 자신과 효령의 발자국을 지웠다. 그리고 몸을 돌려 돌산의 바위 위를 기어올랐다.

금세 효령을 앞질러 올라간 그가 말했다.

“내가 밟는 곳, 잡는 곳을 잘 보고 따라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아, 알았어요.”

효령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아야!”

산의 절반쯤을 기어올랐을 때. 효령의 입에서 난데없는 비명이 터졌다.

“왜 그래?”

발리안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효령은 대답 대신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와 몸을 흔들고 있었다.

“효령아!”

다급한 몸짓이 한동안 이어졌다.

발리안이 그녀에게 다가가려 밑으로 발을 내리려던 때.

“이, 이젠 괜찮아요.”

효령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벌레가 물었는지 따끔해서……. 괜찮아요. 떨어진 거 같아요.”

“정말 괜찮아?”

“네, 괜찮아요.”

“조금만 힘내, 여기까지만 올라오면 쉴 수 있……!”

발리안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 멀리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하, 하.

분명 말을 재촉하는 음성이었다.

“서둘러, 효령아. 놈들이다!”

“알았어요.”

효령이 위의 바윗돌을 향해 얼른 손을 뻗었다. 거기 힘을 주며 왼발을 내디딘 순간, 마음이 급했던지 그만 발이 미끄러졌다.

“앗!”

효령의 작은 몸이 가파른 경사면 중간에서 위태로이 흔들렸다. 설상가상, 몸의 무게 중심이 쏠리면서 손으로 붙들고 있던 돌이 당장이라도 뽑힐 듯 갸우뚱 한쪽으로 기울었다.

비명과 함께 효령이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탁. 발리안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엄청난 힘으로 효령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대, 대장.”

“밑을 보지 말고 날 봐. 절대 너 안 떨어뜨려.”

그 말처럼 효령은 곧 안전한 곳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절벽과도 같은 돌산의 중턱, 움푹 팬 곳에 닿기 무섭게 발리안이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대장.”

“쉿!”

발리안이 효령의 머리를 감싸며 몸을 낮췄다.

말발굽 소리를 흡수하는 모래 때문에 적들은 소리도 없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떼를 지어 달려온 수십여 명의 무사가 두 사람이 있는 바로 아래 말을 멈췄다.

“어디로 갔지?”

“저기, 저쪽이다!”

한 무사가 말 발자국이 무성한 남쪽을 가리켰다.

“태자 전하의 명이 지엄하시니, 절대 두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이 사막을 빠져나가기 전에 해치워야 하니 서두르자!”

“이랴.”

“하!”

요란하게 말을 재촉한 무사들이 어느새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그들의 뒷모습을 살피던 발리안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태자 전하라면…… 발타고 형님이?’

이내 표정을 가다듬은 그가 효령을 일으켜 세웠다.

“힘든 곳은 다 지났다. 조금만 올라가면 쉴 만한 곳이 나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급경사가 끝나고 완만한 봉우리가 나타났다. 미끄러워 조심스럽긴 해도 암벽을 타는 것보다는 수월했다.

높은 곳에 서니 저 멀리 파음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림 부족의 영지에 속한 파음은 정말 낯설고 신기한 땅이었다.

초원을 지나 작은 숲을 빠져나오면 느닷없이 사막이 시작되는 것도, 그 한쪽 끝에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길게 늘어선 돌산 하며, 그 뒤로 다시 이어진 초원 하며.

파음은 곳곳에 암석이 노출된 암질 사막 지형이었다.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크고 작은 돌산과 암벽이 보였다. 물이 없는 상태에서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잘 살펴보면 이곳 어딘가에 굴이 있을 거다. 한때 다른 부족에게 땅을 잃고 갈 곳 없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야. 그들은 생존을 위해 도적이 되었지. 그리고…….”

그들의 손에 발리안의 친부가 목숨을 잃었다. 하투 칸의 말대로라면 설규한의 무덤은 그 굴들 근처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효령아, 저기!”

거대한 돌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틈으로 교묘하게 난 작은 구멍.

발리안이 오랜 모래바람에 거의 메워져 버린 석굴의 입구를 발견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

말을 하다 말고 발리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다행이라는 듯 저를 보고 웃는 효령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거기다 내쉬는 호흡마저 끊어질 듯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그녀에게 다가간 발리안이 효령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 왜 이래? 대체 언제부터……!”

「벌레가 물었는지 따끔해서……. 이제 괜찮아요. 떨어진 거 같아요.」

아까 효령이 했던 말을 떠올린 발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길!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이 험한 사막과 돌산에 물려도 좋은 벌레가 있을 리 없었다.

“너 걸을 수 있겠……!”

묻기가 무색하게 효령의 몸이 발리안을 향해 쓰러졌다.

“효령아, 효령아!”

그녀를 받친 발리안이 얼른 효령을 등에 업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라, 효령아.”

그가 위태로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석굴 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늑했다. 무시무시하리만치 차가운 사막의 밤바람을 막아주기에 충분했다.

저 멀리 숨통처럼 뚫려 있는 구멍으로 어느새 떠오른 가을 달빛이 쏟아졌다. 사막의 달은 유난히 크고 환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깐 발리안이 거기 효령을 눕혔다.

그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미 온몸의 핏기가 사라지고 눈의 초점마저 흐릿해져 있었다.

“아…… 아…… 파요, 대장.”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효령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게, 왜 바보같이…….”

말을 하다 말고 발리안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지금 이 상황은 그녀의 잘못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애먼 그녀에게 화를 내봐야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디야, 물린 데가?”

“드…….”

“등?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발리안이 효령의 옷으로 손을 뻗었다.

탁. 순간 효령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왜 이래, 효령아! 시간 없어. 이거 놔!”

“대, 대장……. 나, 대…… 장에게…… 하, 할 말이…….”

“나중에, 나중에 해!”

마음이 급한 발리안은 효령의 말을 듣는 대신 서둘러 그녀의 손을 떨어냈다.

발리안이 톡톡하고 든든한 겉옷의 매듭을 푸는 사이 효령이 다시금 그를 향해 떨리는 팔을 내밀었으나 소용없었다.

발리안이 겉옷에 이어 서슴없이 안쪽에 입은 그녀의 저고리를 풀었다.

툭. 허리띠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스르르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

내내 거침없던 발리안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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