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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73화 (73/116)

73화. 운명의 소용돌이 2

* * *

“그러잖아도 놈을 꼬여낼 방법을 찾느라 고민이었는데……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놈이 다른 곳도 아닌 파음에 가다니. 이건 마치 죽여 달라 비는 꼴이 아니냐?”

파음이라니.

발리안의 무덤으로는 제격이었다.

파음은 시간에 쫓기는 상단들이나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이 아니면 여간해서는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물이 나는 샘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서, 준비 없이 들어갔다 길을 잃으면 갈증으로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수하들을 동원하여 당장 놈의 뒤를 쫓아라. 그리고 놈을 발견하는 즉시 해치워라. 시체는 들키지 않게 잘 처리하고.”

“알겠습니다. 태자 전하. 하면 대도위님과 동행한 자는…….”

“그게 누구든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우리가 벌인 일에 대해 아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그럼.”

고개를 숙여 보인 수하가 이내 밖으로 사라졌다.

“흐흐. 이것으로 네놈의 지긋지긋한 낯짝을 다시 보는 일은 없겠구나. 잘 가라, 발리안.”

발타고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일이 생각보다 술술 풀린다 생각하니 당장 요희 생각이 간절했다. 그가 이 기쁜 소식을 요희에게 전하고자 털이 달린 겉옷을 급히 몸에 걸쳤다. 가을이 되면서 해가 진 후로는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어둠을 틈타 발타고는 서둘러 처소를 나섰다.

“태자의 추진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요.”

역시. 발타고의 예상대로 요희는 그가 전한 소식에 누구보다 반가움을 표했다.

“그래. 그 험한 곳에 달랑 수하 하나만 거느리고 갔으니 놈이 죽는 건 시간문제지. 안야국 사신들이 출발을 이틀만 늦췄더라면 그쪽 태후에게 직접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을.”

안야국 사신들은 무예 대회가 끝나는 즉시 고국을 향해 출발했다.

가을 중반부터 눈이 내리는 기탄의 날씨를 고려해서였다.

“그야 말해 무엇하겠어요? 하지만 태자. 대도위가 파음에 갔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는 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요. 대도위가 오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하투 칸이나 대칸이 가만 계시지 않을 테니까요.”

흐음. 발타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군.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시체를 잘 처리하라고 했으니까. 설사 실수가 있다 해도 거긴 배고픈 들짐승들 천지야. 시체는커녕 흔적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울 게다.”

“아…….”

“그럼 아버지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나? 그나저나 갈증이 나서 그런데…….”

발타고가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안야국 약술이라는 거 지금 좀 마실 수 있나?”

“그야 물론이죠.”

미소를 지은 요희가 금세 술병과 잔을 가져왔다.

“마음껏 들어요.”

발타고가 잔은 빼고 술병만 받아들었다.

그가 술을 들이켜는 걸 지켜보는 요희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바꾼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한데 황후마마와 상의 없이 태자 마음대로 대도위를 처리해도 되겠어요? 그러다 황후마마가 화라도 내시면…….”

탁. 발타고가 빈 술병을 요란하게 내려놓았다.

“내가 어린앤 줄 아나? 일일이 어머니 허락을 받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나야, 나.”

그가 욱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야 당연하죠. 하지만 황후마마가 지나치게 태자 일을 간섭하려 드니 걱정이 되어 그러죠. 사실은…….”

요희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왕족 회의가 끝나면 우리…… 더는 만나지 못할 거예요, 태자.”

“뭐, 뭐야? 그게 무슨…….”

“황후마마께서 이미 우리 사이에 대해 다 알고 계세요. 대칸의 후궁이 되어 감히 태자를 유혹했다면서 날 가만두지 않으시겠대요. 난 곧 황후마마 손에 죽게 될 거예요.”

뜻밖의 말에 발타고가 당황했다.

“말도 안 돼. 당장 어머니를 찾아가…….”

“아뇨. 그러지 말아요.”

요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발타고를 붙들었다.

“황후마마껜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아요. 태자를 사랑하니 제발 이해해 달라고 몇 번이나 빌었지만 소용없었어요. 지금 태자가 나선다면 틀림없이 내가 부추겼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아니. 날 믿어. 내가 가서 어머니께 확실히 말하지. 당신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아뇨, 이미 늦었어요. 곧 천군이 왕족 회의에서 모두에게 말할 거예요. 내게 기탄을 망칠 마가 끼었다고, 날 살려두었다간 기탄에 화가 미칠 거라고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천군의 말은 대칸께서도 무시하시지 않는다고.”

“빌어먹을!”

쾅. 화가 난 발타고가 탁자를 내리쳤다.

“어머니나 천군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버진 내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니 대체 무얼 어찌해야…….”

“태자.”

요희가 발타고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됐어요. 태자의 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난 충분해요. 이국땅에 버려진 날 따뜻하게 안아준 건 당신뿐이었어요. 나 때문에 태자가 곤란해지는 건 원치 않아요.”

그녀가 애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발, 날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그러다 괜히 대칸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는 날엔…….”

그녀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지금도 대도위만을 총애하시는 대칸께서 혹 진노하시어 태자를 바꾸겠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만약 당신이 나 때문에 불행해진다면 난, 난…….”

요희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

그녀가 의도적으로 던진 말에 발타고의 분노가 불처럼 타올랐다.

마치 지옥의 야차처럼 붉게 달아오른 눈을 한 발타고가 요희를 으스러져라, 힘껏 끌어안았다.

“내 약속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당신을 지켜 주겠다고. 아버지고 어머니고 날 방해한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겠어.”

“태자!”

요희가 감격에 겨워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씨익. 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황후. 지금쯤 날 죽이려 혈안이 됐겠지만, 쉽진 않을걸? 기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 당신 아들이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그 순간.

기탄의 미래를 바꿀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요동치고 있었다.

* * *

초원과 숲으로 이루어진 땅 창지는 대칸의 직속령이 끝나는 곳이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파음은 구림 부족의 영지였다. 사막을 코앞에 두고 평소라면 조용했을 숲이 말발굽 소리로 요란했다.

“힘들지 않아? 그러게 나 혼자 다녀온다니까.”

발리안이 효령을 보며 툴툴거렸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단 두 번을 쉬었을 뿐, 말을 바꿔 타며 계속해서 이어진 강행군이었다. 최대한 효령에게 맞춘다고 하고 있지만, 축제 내내 무리를 했던 그녀에게는 몹시도 버거운 일일 터.

얼핏 봐도 그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견딜 만해요. 그리고 난 꼭 사막이 보고 싶다고요, 대장.”

효령이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 번은 찾아봐야지 않겠니, 네 아버지의 무덤?」

두 사람은 지금 하투 칸이 일러준, 발리안 친부의 무덤을 향하는 길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길. 발리안의 동행은, 자신도 가겠다고 우기며 기어이 따라붙은 효령뿐이었다.

이 여정은 발리안 못지않게 효령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녀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외숙 명국공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빼지 않고 발리안의 친부, 설규한의 제사를 받들었다.

효령은, 이제는 없는 외숙을 대신하여 꼭 설규한의 묘에 참배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곳에서 발리안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밝힐 참이었다.

「왕족 회의를 앞두고 지금 황궁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효령아.」

어젯밤 다와가 해 준 귀띔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와?」

「대칸께서 구림 칸과 그 아드님인 세자 저하를 부르셔서는…… 아무래도 왕자님의 혼사 문제를 상의하신 것 같다.」

「호, 혼사 문제요?」

효령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도 봤지? 무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구림 부족의 공주님.」

「네.」

「그분과 짝을 채워 왕자님께 큰일을 맡기시려는 것 같아. 만약 대칸의 명이 떨어지면 그땐 왕자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을 거야. 그건 너도 알지?」

효령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만약 왕자님께 마음이 있다면…… 아니, 네가 왕자님을 좋아한다는 거 잘 알아. 그건 왕자님도 마찬가지고. 우리 남편이 그래서 널 여기 보낸 거잖니?」

다와가 효령의 손을 붙들었다.

「왕자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해, 왕족 회의가 끝나기 전에.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때를 떠올린 효령의 얼굴이 얼핏 어두워졌다.

상대가 하필 구림 부족의 공주라니.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귀한 신분과 출중한 외모는 물론 뛰어난 무예 실력, 거기에 엄청난 배짱과 기백까지. 기탄 사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신붓감이었다.

상대가 그녀라면 발리안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을 터. 효령이 믿을 것은 ‘평생 같이 있자’던 발리안의 약속뿐이었다.

혹 내가 대장의 앞날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나만 아니라면 대장은 더 높은 자리에…….

‘아니, 아니야.’

효령은 고개를 저어 불안감을 떨쳐냈다.

부귀영화가 곧 행복은 아니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다니.

효령의 삶에 행복이 깃든 건 황궁과 장공주라는 화려한 허울을 벗어버리고 난 후였다.

겨우 그딴 것에 주눅들 것 없어. 힘을 내자, 진효령.

「저기, 효령아. 나…… 시타 오라버니와 혼인하기로 했어. 쉿! 아직 어머니한테는 비밀이야.」

시타와 사고를 친 다음 날, 산시가 했던 고백을 기억해 낸 효령이 비장한 얼굴로 각오를 다졌다.

‘그래, 행복은 누군가가 가져다주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거야. 두고 봐, 내 남자는 반드시 내 힘으로 지킬 테니까.’

“……?”

발리안이, 불끈 주먹을 쥐는 효령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사이, 두 사람이 탄 말은 어느새 파음에 들어서고 있었다.

* * *

효령의 입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졌다.

“세상에!”

멀리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언덕을 타고 내려오니 거짓말처럼 숨어 있는 비경.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래밖에 없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고고히 솟은 수십 그루 나무들과 하늘처럼 새파란 샘이 있었다.

“이게 이 사막에 있는 유일한 샘이야. 두어 군데 더 물이 있긴 하지만, 거긴 쓴물이라 먹을 수 없어. 금세 돌아올 거긴 한데, 혹시 모르니 가죽 부대를 채워서 가자.”

발리안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탄해와 산자를 비롯하여 함께 온 말들이 알아서 물가로 다가갔다. 발리안이 부대에 물을 담는 사이, 효령과 말들도 한껏 목을 축였다.

“아, 시원하다. 대장, 대장도 물 좀 마셔……!”

효령이 손으로 물을 떠 발리안에게 내미는 순간.

“위험해, 엎드려!”

가죽 부대를 청마 도도의 등에 걸던 발리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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