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72화 (72/116)

72화. 운명의 소용돌이 1

* * *

“정말이십니까, 황후마마?”

꿀꺽. 절도 칸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대체 그 방법이란 게 뭡니까?”

“이번에 내가 쓰려는 방법은 이미 이전에 대도위가 썼던 것일세.”

“예? 바, 발리안이 썼던 방법이라면……?”

어리둥절해하는 절도 칸 곁에서 천군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황후마마의 영명하심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 방법이라면 분명 태자 전하를 무난히 지키실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하지. 이왕 이렇게 된 것 7황비 그 계집을 비롯하여 눈에 걸리는 것들을 모조리 한꺼번에 쓸어버려야겠네.”

황후의 시선이 이내 절도 칸을 향했다.

“이보게, 절도 칸.”

“예, 황후마마.”

“자네는 당장 사람들을 동원하여 서역 상단에 연통을 넣게. 갖가지 물건을 다 다루는 그들이라면 앵속의 해독제도 구할 수 있을 것일세.”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야 할 것이야. 7황비 그년에게 진짜 해독제가 있다 장담할 수도 없거니와 설혹 있다 해도 순순히 내놓을 년이 아니니 말일세.”

비소를 머금은 황후가 이번엔 천군을 향해 말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네 역할이 중요하네.”

“염려 마십시오. 맡겨만 주십시오, 황후마마.”

천군이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체할 시간 없네. 그럼 다들 움직이세나.”

“예, 황후마마.”

“예, 황후마마.”

황후를 필두로 절도 칸과 천군이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 * *

같은 시각. 발리안은 하투 칸의 숙영지에 있었다.

하투 칸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있어 온 길이었다. 그것도 내내 안 가겠다며 버티는 걸 효령이 간신히 달래서 데리고 왔다.

「무림제가 끝나면 곧 여길 떠날 텐데 마지막 인사를 하는 셈 치고 다녀오는 게 어때요? 이대로 돌아가면 대장 마음도 편치 않을 거예요.」

이미 안으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발리안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며 버티고 있었다.

“기다리고 계실 텐데 얼른 들어가요.”

효령이 발리안을 재촉했다.

‘어쩜 이럴 때 보면 꼭 심술 난 어린애 같다니까.’

이러니 안심이 안 되어 따라올 수밖에.

효령이, 어제 과하게 마신 술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안 들어가려면 말아요. 그럼 나라도 대신…….”

탁. 그제야 발리안이 효령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 간다고. 넌 그냥 여기 있어. 들어가 봐야 좋은 꼴 못 볼 테니까.”

얼굴을 구긴 그가 궁려 안으로 들어갔다.

“왔구나. 이리 와 앉아라.”

발리안은 마지 못해 하투 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왕족 회의가 시작되면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아 말이다. 네게 꼭 해 줄 말이 있어 불렀다.”

“그럼 얼른 하시죠.”

하투 칸은 말을 하는 대신 하나뿐인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리안은 내켜서 온 것이 아니란 티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만 보면 웃으며 달려오던 옛 모습을 떠올리니 새삼 가슴이 아프고 쓰라렸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이게 다 자신이 자초한 일인 것을.

하투 칸이 자꾸만 헛된 상념에 빠지려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친아비에 대해…… 알고 있느냐?”

“……!”

순간, 발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도 뜻밖의 질문이라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네 표정을 보아하니 발란주에게서 듣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그러고 보면 네 어미도 참 고지식한 데가 있어. 하긴, 모두가 다 내 탓이지.”

“…….”

“널 살려두는 조건으로…… 평생 내 아들로 키우라, 강요했으니까.”

하투 칸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훌륭한 사내였다, 네 아비는. 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 사람이 어찌나 용맹하고 올곧던지. 내 생전에 네 아비보다 눈부신 사내는 보지 못했다.”

“…….”

“내가 죽인 게 아니다. 이제껏 그게 궁금했던 게 아니냐?”

발리안은 입이 붙어버린 사람처럼 대꾸가 없었다. 하투 칸의 시선을 피해 애먼 탁자만 노려볼 뿐이었다.

하투 칸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내게 네 어미를 부탁한다 했다. 행복하게 해 주라고도 했지. 나로서는 영 불가능한 일인데도…….”

순간, 발리안이 날 선 눈으로 하투 칸을 노려보았다.

“그 말씀은 아버…… 아니, 제 친부께서 어머니를 버리셨다는 겁니까?”

“아니.”

하투 칸이 굳은 표정으로 잠시 숨을 멈췄다.

“네 아비는…… 너와 네 어미를 지키다 죽었다.”

하투 칸의 눈이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이십 년도 넘은 까마득한 옛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황량한 사막에 흰 눈이 흩날리던 날, 자신을 향하던 절박하고 간절한 눈빛. 마치 심장 한가운데 칼로 새겨진 것처럼 선명한 그 얼굴을 어찌 죽어서인들 잊을 수 있으랴.

하……. 깊은 한숨을 내쉰 하투 칸이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네 아비와 발란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모진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지.”

“…….”

“혹독한 굶주림과 추위에도 두 사람은 굴복하지 않았다. 살이 내려 뼈가 앙상해지고 양 손발이 다 동상에 걸렸어도 서로가 있어 행복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

“두 사람은 길을 잘못 든 바람에 도적 떼와 마주쳤다. 당시엔 선대 대칸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도, 다른 부족들과의 결속력도 완전하지 못했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도적이 사방에서 들끓었지.”

“…….”

“네 아비는 홀로 수십의, 도끼를 휘두르며 덤비는 무자비한 도적들과 맞서야 했다. 혼자 몸이었다면 달아나기 어렵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하투 칸의 미간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때의 기억을 돌이키는 것만으로 심장이 저릿해졌다.

“그의 곁엔 약해질 대로 약해진 네 어미가 있었지. 내가 그들을 발견했을 땐……. 사방이 온통 도륙 난 도적들의 시체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거기, 남은 한 팔로 네 어미를 끌어안은 네 아비가 있었다.”

“…….”

“기절한 네 어미를 안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더구나. 당신을 욕심내어 미안하다고. 포기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

“누구보다 죽이고 싶었던 사내였지만, 죽어가고 있는 그 앞에선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평생 이 사내를 이길 수 없겠구나…….”

“…….”

“도적들의 도끼에 팔이 잘리면서 피를 너무도 많이 쏟은 탓에 네 아비는 곧 죽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발에 머리를 대고 빌었다. 네 어미를 부탁한다고, 부디 행복하게 해 달라고.”

“…….”

“너무나 행복해서 자신 같은 사람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해 달라더구나.”

“…….”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했었지. 만약 자신에게 다음 생이 허락된다면…… 그땐 내 종이 되어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이 은혜를 갚겠다고…….”

하투 칸의 눈이 어느새 물기로 젖어 들었다.

발리안 역시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눈빛에 감복하여……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말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고개만 끄덕였지. 고맙다 하더라. 물론 그 말을 다 맺진 못했지만…….”

“…….”

“그때가 11월이었나, 12월이었나. 이른 가을부터 시작된 눈으로 사방이 꽁꽁 얼어붙었었지. 그 굳은 땅에 돌을 쌓아 네 아비를 묻었다, 네 어미가 깨어나기 전에.”

하투 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은 찾아봐야지 않겠니, 네 아버지의 무덤?”

“…….”

“이제 와 이런 변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널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다, 리안. 다만 두려웠다. 너무도 네 아비를 닮은 네 모습이…… 네 어미에게 그자를 떠올리게 할까 봐서.”

그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네가 아니래도, 네 어미에게 네 아비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이를 먹는다고 사람은 절로 지혜로워지는 게 아니더구나. 그때의 난 왜 그다지도 어리석었는지.”

“…….”

“미안하다, 리안. 용서해다오. 널 잃고서야…… 네가 내게 얼마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는지를 깨달은 나를…….”

하투 칸의 눈에서 그예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 앞에서 다 늦은 사죄를 하는 그는 이전보다 부쩍 나이 들고 지쳐 보였다.

순간, 발리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려고 절 부르신 겁니까?”

움켜쥔 발리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평생 가슴에 응어리진 채 의문으로 남았던 친아버지. 늘 어머니와 절 버린 그를 원망했건만……. 그것이 오해였음을 깨닫게 되어 후련한 한편으로 왜 이렇게 참담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이는 하투 칸을 보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늘 당당하고 위엄 넘치던 하투 칸이 지금은 나약하고 초라한 초로의 사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이렇게 괴롭고 고통스러울 줄이야.

발리안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겨우 한 번의 눈물로 제 응어리가 풀어질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천만에요. 이렇게 간단히 풀어질 거였으면 애초에 이곳을 떠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

“평생 칸을 미워하고 원망할 겁니다. 그러니…… 진심으로 제게 용서를 받고 싶으시다면, 정말 그러고 싶으시다면…….”

“…….”

“제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그때까지…… 오래오래 사십시오, 아…… 버지.”

마지막 말을 힘겹게 내뱉은 발리안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래오래 사십시오, 아버지.」

아버지…….

발리안이 남긴 마지막 말이 하투 칸의 귓가를 몇 번이고 뒤흔들었다.

“리안…… 내 아들 탁리안…….”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버틴 하투 칸의 눈에서 비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 * *

“뭐라, 오늘 새벽에 발리안이 숙영지를 떠났다고?”

왕족 회의 당일. 수하의 보고를 받은 발타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림제가 끝나기 전인데 놈이 벌써 안야국으로 돌아갔단 말이냐?”

“아닙니다. 왕족 회의가 열리는 동안 급히 다녀올 곳이 있다면서……. 예니레쯤 걸릴 거라고 했답니다.”

“다녀올 곳이라니?”

“뒤를 밟던 수하가 전갈을 보내기를 아무래도 파음 지역에 가는 것 같답니다. 창지로 들어섰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창지는 파음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발타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파음이라면? 사막과 돌산으로 둘러싸인 곳이 아니냐? 그 험한 곳엔 왜?”

“저도 그것까진 잘…….”

수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됐다. 이유까지야 알 필요도 없지.”

후훗. 발타고의 입매가 사악하게 비틀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