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날벼락 2
* * *
파르르. 분노로 치를 떤 황후가 문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있느냐?”
그녀의 물음에 궁녀 하나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황후마마?”
“지금 당장 가 7황비를 내 앞으로 끌고 오너라, 어서!”
“예.”
서늘한 명령에 궁녀가 득달같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네년이 감히, 감히 내 아들을……!”
황후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발리안에게 정신을 집중한 틈에 엉뚱한 데서 뒤통수를 맞다니. 그것도 반반한 얼굴만 빼면 별 볼 일 없다 여긴 하찮은 후궁 따위에게.
탁.
황후가 휘청이는 몸을 가누기 위해 탁자를 붙들었다.
‘네년이 기탄에 앵속을 가져온 이유가 이것이었더냐? 대칸의 후궁이 되어 감히 내 아들을 제 침상으로 꾀더니. 그것으로 모자라 앵속에 중독시켜? 이런 찢어 죽일 년!’
황후의 눈이 무섭도록 날카로이 번득였다.
‘네년이 내 아들을, 아니 아예 이 나라를 망칠 작정을 한 모양이로구나. 이 교활한 계집. 어디 그게 네년 마음대로 될 성싶으냐? 내 네년을 고이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네년의 눈을 뽑고 혀를 뽑고, 살을 뜨고 뼈를 발라 이 땅 여기저기에 짐승의 먹이로 내어줄 것이다. 이런 천벌을 받아 마땅한 년!’
황후가 끓어오르는 격노를 다스리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사이. 궁녀들에 이끌린 요희가 황후의 처소 안으로 들어왔다.
“네 이년!”
짝.
그녀를 보자마자 황후가 따귀를 올려붙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요희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아.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힘이 좋기도 하지.”
요희는 당황하기는커녕 황후를 보며 얄궂게 미소를 지었다.
“뭐, 뭐라? 네년이…….”
그녀의 반응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황후였다. 요희의 입에서 나온 유창한 기탄 말하며, 오만방자한 그 태도며. 도무지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요희가 어이없어하는 황후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오래 참으셨습니다, 황후마마. 전 태자와 뒹군 다음 날로 당장 끌려올 줄 알았는데……. 하긴, 아드님 목이 떨어질 것이 두려워 내내 쉬쉬하고 계셨던 거겠죠.”
“네, 네년…….”
“그런 분이 오늘 기어이 절 부른 걸 보면…… 지금쯤 다 눈치채신 것 아닙니까? 태자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는 거.”
요희가 겁도 없이 요망한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렸다.
“그 대단하다는 천군을 수하로 두고도 나 하나를 못 막다니. 기탄의 천군도 생각보다 별거 아닌가 봅니다. 남의 자리를 훔쳐 억지 천군이 되었다더니. 어디 그 신력을 믿을 수나 있겠습니까?”
“뭐, 뭐라?”
당황한 황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모욕을 당한 천군의 얼굴도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희는 제 할 말을 이었다.
“그러게, 아드님의 탐욕이 어지간해야 말이지요. 남들은 그만큼 중독되려면 한참이 걸리는데, 이건 뭐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는 것도 아니고…….”
“…….”
“어찌나 절 못 안아 안달이던지. 딱 한 번 실망한 표정을 지었더니 글쎄, 절 만족시키겠다면서 앵속이 든 술을 쉬지도 않고 퍼마시지 뭡니까?”
나긋나긋 걸어간 요희가 허락도 없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송구합니다. 제가 반강제로 끌려오다 보니 다리가 아파서……. 기탄의 궁녀란 것들은 드세고 무식하기만 한 것이 도무지 예의를 모른다니까요. 그나저나 황후마마…….”
“…….”
“절 다잡을 시간에 아드님을 위해 녹두라도 구해 보지 그러십니까? 앵속 중독에 녹두 달인 물이 그렇게 좋다는데……. 하긴 아드님은 녹두로 다스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지만.”
“네 이년! 지금 네년이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깔깔깔깔깔. 요희가 머리를 젖히며 한껏 웃었다.
“그렇지 않고요. 황후마마께서 칼자루를 쥔 쪽이 누군지도 모르고 날뛰시는데 제가 웃지 않고 배겨낼 턱이 있습니까?”
“너…….”
“잘 들으세요, 황후마마. 사실 전, 생각처럼 그렇게 못된 계집이 아니랍니다. 개인적으로 황후마마께 악감정도 없고요.”
“…….”
“마마께서 조금만 마음을 여신다면 제가 꽤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는 걸 아실 수 있을 텐데……. 제가 원하는 건 의외로 단순하거든요.”
요희가 거만하게 팔짱을 끼었다.
“발리안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안야국에서 완전히 철수시킬 것, 두 번 다시 안야국 땅을 침범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만 약속하신다면 아드님을 말끔히 고쳐드리지요. 그뿐 아니라…….”
“…….”
“저 역시 마마의 눈앞에서 깨끗하게 사라져드리겠습니다.”
“뭐, 뭐라? 내 앞에서 사라지겠다?”
황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네년, 발타고를 꼬여 황후 자리에 앉으려던 것이 아니냐? 그래서 내 아들을…….”
“저런…….”
요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황후마마, 아드님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크신 것 아닙니까? 솔직히 발리안이라면 모를까, 아드님은 그다지 매력적인 상대가 아니랍니다. 입 냄새도 역겨운 데다 도무지 상대의 기분을 헤아릴 줄 모르거든요.”
“…….”
“게다가 그 머리와 성격으로 대칸이 된다 한들 그 자리를 오래 지킬 수나 있겠습니까? 얼마 못 가 누구든 치고 올라올걸요? 하지만 그거야 황후마마께서 알아서 막으시면 될 일이고.”
“…….”
“어떻습니까? 저와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대로 아드님이 망가지는 걸 마냥 지켜보고만 계실 겁니까? 지금이야 몸이 축나는 것뿐이라지만 머지않아 심각한 증상이 나타날 텐데…….”
“…….”
“이러다 남들이 그 상태를 눈치라도 채는 날엔 마마께서도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황후가 날 선 눈으로 요희를 노려보았다.
“네년이 약속을 지킨다 어찌 믿는단 말이냐?”
“지키지 않으면요. 그럼 제가 혼자 몸으로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겠습니까? 그럴 만큼 황후마마와 기탄이 만만하던가요?”
끄응. 황후가 대답 대신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이 정도 조건이면 황후마마의 편의를 충분히 봐드렸다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발리안이 죽는 건, 태자는 물론 황후마마도 간절히 바라는 일일 테고. 손바닥만 한 안야국쯤이야…….”
“…….”
“기탄 입장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요?”
“…….”
“그렇다고 지금 꼭 답을 듣겠다는 건 아니에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드리죠. 그럼 세 분이 잘 상의해 보세요.”
요희가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아! 혹시 몰라 드리는 말씀인데…… 해독제는 제 처소에 두지 않았답니다. 사람을 보내 뒤져 봐야 소용없다고요. 헛수고하실까 봐 미리 알려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
“절 죽이려 드시면 그 대가는 아드님이 치르게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그럼 전 이만…….”
비릿한 미소를 입에 건 요희가 유유히 황후의 처소를 걸어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황후가 치욕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감히, 감히 하찮은 후궁 년 따위가 날 농락해? 내 진작 저 오만방자한 년을 죽였어야 했는데…….”
“진정하십시오, 황후마마.”
절도 칸이 나서 그녀를 달랬다. 평소 황후가 할 말을 오늘은 그가 대신했다.
“지금은 화를 내기보다 대책을 세워야 할 땝니다.”
천군이 그를 거들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황후마마. 저 마군을 그대로 두었다간 기탄에 더 큰 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하아. 황후가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분을 삭였다.
‘앙큼한 년 같으니라고. 감히 나를 상대로 거래를 하려 들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네년 따위가 내 연륜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오냐, 내 네년에게 보여주마. 사람은 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는 걸.
황후가 표독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지. 내 오늘 받은 수모를 기필코 저년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고 말 것이야. 이보게 천군, 발타고를 구할 방법이 있겠는가?”
“오늘부터 제가 마군의 숨통을 죄고 태자 전하의 정신을 되돌리는 주술을 행하겠습니다. 하지만 효력을 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는 터라…… 그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천군이 말을 이었다.
“7황비마마의 말마따나, 왕족 회의 기간 동안 태자 전하의 상태가 다른 칸들께 알려진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절도 칸이 말을 보탰다.
“그건 둘째 문젭니다. 태자가 대칸의 후궁을 건드렸다는 사실이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엔……. 더 이상 태자 자리를 지키기는 어려울 겁니다. 7황비가 저리 거만하게 나오는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 자네들 말이 옳네.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이 알려지는 것만은 막아야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당분간 그 계집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황후마마, 설마 7황비마마의 뜻대로 대도위를 죽일 작정이십니까? 하지만 그건…….”
황후가 손을 들어 천군의 말을 막았다.
“기탄의 존속을 위해 검독수리가 꼭 필요하다면……. 그럼 반만 죽여 놓으면 될 것 아닌가? 죽지 않았으되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
“예?”
“팔다리를 모두 부러뜨린 후 숨만 붙여 놓으면 될 일이야. 다른 짐승들처럼 줄에 묶어 우리에 가두어 두면 그만이지.”
훗. 황후의 입매가 잔인하게 비틀렸다.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꼬. 7황비 고것이 영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군그래. 덕분에 좋은 방법을 찾았으니.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황후가 요희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았다.
‘네년의 처소에 해독제를 두지 않았다 했더냐? 하지만 적어도…… 앵속은 넉넉히 가지고 있겠지? 두고 보아라, 내 네년이 겁도 없이 날뛴 걸 곧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
황후가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다들 걱정할 것 없네. 우리에겐 아직 7황비 그 계집이 미처 생각 못 한 방법이 두 가지나 있네, 그년이 가진 패를 쓸모없게 만들 기막힌 방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