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날벼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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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듣고도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천지가 뒤집어지지 않고서야, 대도위에 불과한 놈이 겨우 하룻밤 사이 그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리가…….
“발리안 그놈이 칸이 되다니.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하. 절도 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지 뭡니까? 대칸의 수하에게서 새어 나온 말이니 틀림없습니다.”
눈이 벌게진 발타고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지금 하투 칸이, 살아 있는 상태로 그 자리를 발리안에게 물린단 말입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이렇게 분통이 터지지는 않았을 게다.”
황후가 침통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니 그럼 놈이 무슨 수로…… 설마……?”
쾅. 더는 참지 못한 발타고가 탁자를 내리쳤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지금 제 생각이 맞는 겁니까, 어머니? 정말 그런 겁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 주십시오. 예?”
발타고가, 마치 황후가 발리안이라도 되는 듯 무섭게 쏘아보았다.
“진정해라, 태자.”
“진정이라니……. 제가 이 마당에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놈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발리안 그놈이 정식으로 칸이 된다는데 제가 어떻게 참습니까? 대체 어딥니까? 놈에게 어느 땅을…….”
“…….”
황후가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아들 발타고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남편 대칸이 그예 큰일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발리안을 양자로 삼은 것으로 부족해서 그에게 정식으로 아들 대접을 해 주려 들다니. 성(姓)도 없이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떠도는 조카가 안쓰러워 거둔 것까지는 애써 이해할 만했다.
한데 갈수록 가관이었다.
원래 태자가 아닌 대칸의 아들들은 장성하면 혼인을 한 후 영지를 하사받아 칸이 되었다. 지금 대칸이 발리안을 상대로 하려는 것이 바로 그 일이었다.
‘황자들에게 돌아갈 땅이 아까워 이제껏 몇 놈이나 죽여 없애 버렸건만.’
독을 쓰고, 위험한 전쟁의 화살받이로 앞세우고, 있지도 않은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그렇게 모질고 지독하게 지켜온 땅이었다. 발타고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황자들도 머지않은 장래에 해치워 버릴 참이었다.
이게 다 발타고가 대칸이 되었을 때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만약 다른 황자들과 땅을 다 나눴다간, 나중에 발타고가 다스릴 땅이 하투 칸보다 작아지기 때문이었다.
한데 아들인 발타고를 위해 애써 벌어둔 그 땅을 대칸의 친자식도 아닌 발리안 따위에게 빼앗기다니. 황후 역시 울분이 치밀어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어머니. 그놈에게 대체 어느 땅을 넘긴답니까?”
“그게…….”
평소 냉정하고 침착하던 황후의 목소리가 사뭇 떨렸다.
“구층산.”
“뭐라고요? 구층산이라면……. 설마 아약 땅을 말하는 겁니까?”
아약 일대는 대칸의 영지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곳이었다. 기탄에서 나는 곡식의 절반가량이 생산되는 곳.
크고 작은 강이 흐르고 높고 푸른 여러 개의 산과 넉넉한 초지, 거기 금광까지 딸린 지역이었다.
“이게, 이게 말이 됩니까? 아버지가 가진 땅 중에 가장 좋은 곳을 놈에게 내리시다니요? 아버지께서 노망이라도 나셨답니까?”
“말조심해라, 태자.”
“어머니!”
“누군 이 일이 좋아 참고 있는 줄 아느냐? 이게 다…….”
네놈이 못나 벌어진 일이 아니냐.
황후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러게, 진작 그럴듯한 전공이라도 세워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치르는 전쟁마다 죽을 쑤는 발타고 때문에 속을 태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신들을 움직여 기껏 쉬운 자리에다 골라 끼워 줬으면 알아서 챙겨 먹는 맛이라도 있을 것이지. 쓸데없는 만용과 고집을 부려 다 이긴 싸움도 번번이 망쳐놓은 그였다.
딱 한 번, 웬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기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발타고는 잠깐의 승전에 취해 장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정에 없던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는, 적의 꼬임에 빠져 협곡 한가운데로 들어갔다가 수천의 군사들을 잃었다. 그 결과로 북쪽 땅이 뭉텅이로 이민족의 수중에 떨어질 뻔한 걸 막은 것이 다름 아닌 발리안이었다.
난데없이 용병대를 이끌고 나타난 놈이 아니었으면 발타고의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놈이 자초한 일을 두고 누굴 탓해?’
발란주의 죽음 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발리안은 그 일로 화려하게 회생했다. 더는 누구도 그 과거의 죄를 문제 삼는 자가 없었다.
그 뒤로 그는 승승장구했다. 그 명성이 기탄 구석구석에 퍼지고 적들은 그로 인해 벌벌 떨었다. 하루가 멀다고 기탄의 땅을 넓히고, 재물을 불리고,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고. 이러니 누군들 놈을 싫어할 수 있으랴.
발타고의 실수로 땅을 잃을 뻔했던 차뉴 칸은 물론 서역과의 교역에 큰 도움을 받은 막계 칸은 발리안이라면 쌍수를 들고 반겼다.
못난 아들에 지쳐 있던 대칸의 눈이 번쩍 뜨인 것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못나도 아들은 아들이었다. 발타고를 위해서라면 황후는 못 할 일이 없었다. 잔혹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모진 그녀가, 위협이 되는 발리안을 내내 두고 본 것도 다 아들 발타고 때문이었다.
「송구하지만…… 검독수리의 날개 위에 기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가 아니면 기탄엔 결코 내일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원치 않던 종말을 목격하게 되겠지요.」
황후는 대칸을 만나러 갔다가 열린 문을 통해 우연히 그와 선대 천군이 나누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황후가 피나는 노력 끝에 아들 발타고를 막 태자의 자리에 앉힌 직후의 일이었다.
「조, 종말이라니?」
「기탄이라는 나라는 멸망하고 각 부족이 산산이 흩어져 저마다의 나라를 세울 거란 뜻입니다. 강산이 바뀔 때마다 몇 개의 나라가 사라지고 또 다른 나라가 생기겠지요.」
「…….」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기탄처럼 큰 나라를 이루진 못할 겁니다. 애써 이 땅을 통합한 조상들의 노력이 헛되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걸 막을 방법은 없나?」
선대 천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검독수리가 없는 한 불가능합니다.」
「하면…… 자네가 말하는 검독수리란…….」
「그건…… 언젠가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선대 천군. 그녀는 기탄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신력의 소유자로, 대천군이라고까지 불리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이니 대칸은 물론이고 황후 역시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검독수리. 그날 이후 황후는, 선대 천군이 이른 그 뜻 모를 이름을 가진 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기탄 땅 어디에도 그런 이름이나 별명을 가진 자는 없었다.
세월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황후의 뇌리에서 검독수리란 이름이 흐릿해질 무렵.
선대 천군의 말대로 그는 어느 날 느닷없이 모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탄 역사상 처음으로 무예 대회의 전 종목을 석권한 열네 살의 발리안을 두고 사람들은 ‘검독수리’라 부르며 환호했다. 검독수리는 백성들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날개를 펼쳤다.
「맙소사.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안 저놈이 검독수리라니…….」
하늘은 정말 잔인했다. 너무도 뛰어난 탓에 번번이 발타고를 좌절하게 만든 발리안의 손에 기탄의 운명이 달려 있다니.
그날 이후, 황후는 발리안을 증오했다. 발타고의 것이어야 마땅한 능력과 영광을 빼앗은 놈. 황후에게 그는, 아들의 미래를 뒤흔드는 원수요 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발리안을 죽일 수도 없었다. 그가 아니면 기탄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발리안을 죽이지 않은 채로 아들인 발타고를 지켜야 했기에 그녀의 근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눈엣가시 같은 선대 천군이 죽었을 때, 황후는 재빨리 자신의 사람으로 새 천군을 만들었다.
그녀와 함께 발리안의 해치울 방도를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발리안은 황후가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한 기분이었다.
「제발 이대로 사라진 채 돌아오지 말아라, 영영…….」
황후는 매일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그 원수 같은 발리안을 다시 황궁에 불러들인 건 우습게도 어리석은 자신의 아들, 발타고였다. 그 사실만 떠올리면 황후는 자다가도 벌떡 잠을 깰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떡하랴. 그런 놈을 아들이라고 낳아 놓은 사람이 바로 자신인 것을.
황후가 예의, 감정을 감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왕족 회의에서 분명 발리안의 일이 정식으로 다뤄질 것이다. 내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만은 막아볼 것이니 당분간은 자중하거라.”
“어머니께서 무슨 수로 말입니까?”
평소 황후 말에는 고분고분했던 발타고가 버럭 성을 내었다.
“차뉴 숙부께선 무조건 아버지 말씀을 따를 테고, 하투 칸과 막계 칸은 발리안 편인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믿을 건 달랑 여기 있는 절도 칸 형님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발타고.”
“놈이 아약을 다스리는 칸이 되고 훗날 하투 칸의 자리까지 물려받는다면……. 그럼 놈은 대칸인 저보다 더 너른 땅의 주인이 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제 체면이 뭐가 되냔 말입니다.”
“태자. 일단 진정하고 황후마마의 말씀을 좀…….”
절도 칸이 발타고를 말리려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나 발타고가 에누리 없이 그 손을 쳐냈다.
“더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이제부터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가만히 앉아 놈에게 당하고 있진 않을 거란 말입니다.”
거칠게 쏘아붙인 발타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발타고, 발타……!”
황후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등 뒤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천군이었다.
“소용없습니다. 지금 태자 전하께는 마(魔)가 잔뜩 끼어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가 끼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황후가 얼굴을 찌푸린 채 천군을 향해 돌아섰다.
“자네, 태자 말을 듣지 못했는가? 며칠을 과음하여 술병에 걸렸다지 않은가? 한데 그걸 두고…….”
“아뇨. 저건 절대 술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천군이 심각한 얼굴로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뵙지 못한 사이, 태자 전하의 인상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틀림없는 마군(악마의 군사)의 짓입니다.”
“뭐, 뭐라?”
“저보다 더한 폭음을 하시고도 언제 태자께서 술병에 걸리신 적이 있었습니까? 태자 전하께서는 얼핏 지독한 술에 취하신 것처럼 보이나, 이건 그 이상입니다.”
“그 이상이라니?”
“‘마’란, 말 그대로 태자 전하의 앞길에 헤살을 부리는 요사한 것들이지요. 그것은 사람일 수도, 귀신일 수도, 마음을 가득 채운 번민일 수도 있습니다.”
천군이 영험한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의 눈빛이 혼탁하고 그 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악한 것들에 사로잡히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을 붙든 마군이 어찌나 강한지 웬만한 방법으론 회복되시기 어렵겠습니다.”
“악한 것에 사로잡혀? 사로잡……?”
천군의 말을 되뇌던 황후의 눈이 별안간 커다래졌다.
아아!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황후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서, 설마 그 계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