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감춰 왔던 진심 2
* * *
어느새 다가온 시타가 뒤에서 덥썩, 산시를 끌어안았다.
「뭐, 뭐야? 그새 깬 거야? 내가 떠, 떠들어서?」
당황한 산시가 말을 더듬었다.
「나, 다 들었어. 너 나 싫어하지 않는 거지?」
「오, 오라버니.」
「그, 그럼 나 채, 책임져. 내 엉덩이도 다 봤으니까 채, 책임지라고.」
시타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술김에 확 끌어안기는 했는데……. 말을 하다 보니 점차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러다 나 맞아 죽는 거 아냐?
그러나 산시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오라버니 엉덩이 본 사람…… 내가 처음 아니잖아?」
쿵. 의외의 대답에 시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순간 머리가 띵해져서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그래. 네 말이 맞아. 기녀들은 나처럼 약해 빠진 놈도 거절하지 않더라. 병자여도 싫은 기색도 하지 않고.」
「…….」
「내가 기운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대장이 치르는 돈 때문이 아니면 나랑 자겠단 여자가 있겠느냐고.」
시타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주제를 모르고 뻔뻔하게 굴었네. 나 같은 게 무슨…….」
그가 맥없이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내가 술이 덜 깼나 보다. 이런 헛소리나 지껄이는 걸 보면…….」
탁. 산시가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화로에 던져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나랑 자고 싶어?」
화들짝 놀란 시타가 산시를 바라보았다.
「정말 나랑 자고 싶냐고.」
꿀꺽. 마른침을 삼킨 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놓고는 한 박자 늦게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아, 아니 그, 그게 내 말은…… 지금 당장 어쩌자는 게 아니라 다, 단지 그냥…….」
「그럼 자.」
「뭐?」
너무나 쉽게 돌아온 대답에 시타가 아연실색하여 눈을 크게 떴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자기가 먼저 이 이야길 꺼낸 사람이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사, 산시 너 미쳤냐? 내 말은 그, 그게 아니잖아. 난 그냥 네가 평생 나, 날 책임져 줬으면 해서…….」
「남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랑 자고 싶어 한다는데…… 아냐? 하긴, 좋아하지 않아도 잘만 자더라. 그럼 하나만 물을게. 오라버니가 하고 싶은 게 나랑 자는 거야, 아니면 혼인하는 거야?」
「그, 그야…… 두, 둘 다…….」
시타가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돌렸다. 제아무리 산시와 허물없는 사이라도 이런 말을 대놓고 할 만큼 낯이 두껍지는 못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그게…… 마, 말하면 화낼 텐데?」
「그래도 해 봐.」
「예, 예전에 네 볼살이 귀엽다고 했을 때부터…….」
「뭐?」
느닷없이 산시가 버럭 화를 냈다.
「그때부터 날 좋아했단 말이야? 그런 인간이 아랫도리 하나 단속 못 하고 여기저기서 기녀들을 안고 다녔다고?」
「그, 그야…….」
시타가 질세라 저도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나만 보면 그랬잖아.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바람만 불어도 휙 쓰러질 것 같은 남자라고. 대장처럼 멋지고 사내다운 사람이랑 혼인하겠다고 떠든 게 누군데? 내가 너 때문에…….」
시타가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내 맘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알아? 나란 놈은 영 가망이 없구나, 진작 포기했다고. 그리고 뭐…… 내가 좋아서 거기 간 줄 아냐?」
시타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몰라. 건강하다 못해 기운이 뻗치는 놈들 틈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어떤 건지. 다들 날 계집애 취급이었다고. 대장이 아니었으면 진작 몸을 버렸을지도 몰라. 그놈의 계집애 소리가 듣기 싫어서…….」
「…….」
「그래서 나도 사내라는 걸 증명하려고…….」
그가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몇 번 어울렸던 것뿐이야. 조,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고. 나도 알아. 그래 봐야 네겐 다 변명처럼 들린다는 거. 하지만 내겐 다른 방법이 없……!」
순간. 산시가 시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뭐, 뭐야? 너?」
시타가 흠칫하며 몸을 뒤로 뺐다.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아니.」
산시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경고야.」
「뭐? 경고?」
「이제부터 오라버닌 내 거라는 증거.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여자와 한 번만 더 이상한 짓을 했다간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겠다는 맹세이기도 해.」
산시가 살벌한 소리를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늘어놓았다. 그런데도 시타의 얼굴은 물색없이 풀어졌다.
「저, 정말? 나, 책임져주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아니면 오라버니가 평생 장가를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난 가진 것도 없고 더구나 신붓값 같은 건…….」
하. 산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그건 우리 집안 여자들 내력이니까.」
「……?」
「우리 어머니도 쥐뿔도 없는 아버지랑 사고부터 쳐서 날 가졌다고. 고지식한 우리 아버지가 신붓값을 다 모으길 기다렸다간 할머니가 되고도 남았을 테니까. 생각해 봐. 우리 어머니나 나나…….」
「……?」
「웬만한 신붓값으로 데려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잖아. 안 그래?」
산시가 넘치는 자신감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평생 빚진 심정으로 내게 온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란 말이야. 알았어?」
「어? 어.」
시타가 얼결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리 가까이 와, 오라버니.」
시타가 주저하며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오라버니도 여기 증거를 남겨.」
우. 산시가 눈을 감으며 입을 내밀었다.
「알았어. 대신 한 번 약속한 건 평생 못 무른다.」
「누가 할 소리.」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입술이 어설프게 포개졌다. 똑같은 키의 두 개의 그림자가 불꽃 앞에 어지러이 흔들렸다.
쪽. 쪽.
으,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막상 하다 보니 너무 좋아서 그만 갈 데까지 가고 말았다.
예상외로 산시는 막무가내인 말과는 달리, 모든 게 수줍고 서툴렀다. ‘자자’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에 뭐라도 좀 아는 줄 알았더니.
그래서일까. 노련한 기녀들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늘 주눅이 들었던 시타가 오히려 여유를 찾았다.
「지금부턴 살짝 깨물 거야. 아프거나 싫으면 말해.」
차분히 설명하며 맞추다 보니 산시가 무얼 좋아하는지, 꺼리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전에 없던 자신감이 솟으면서 이전보다 더욱 산시가 좋아졌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오라버니…….」
여자 입에서 처음 듣는 ‘행복하다’는 고백에 시타의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문제는 둘이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을 때 벌어졌다.
연기처럼 느닷없이 불쑥, 시타의 눈앞에 모개와 다와가 나타났다.
『저, 저기요, 모개, 다와. 그러니까 이게 어, 어떻게 된 거냐면…….』
난데없는 그들의 등장에 당황한 시타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하.』
모개는 뭐라 말을 하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다와의 눈에선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죽어라, 이 날도둑놈!』
다와가 솥 젓는 주걱으로 시타의 귀싸대기를 휘갈겼다.
『허억!』
생생한 신음 소리와 함께 파란 하늘로 콩알 같은 이빨이 날아올랐다.
『아, 안 돼, 내 이……!』
시타의 입에서 처절한 절규가 새어 나온 순간. 두 손으로 주걱을 칼처럼 잡은 다와가 그의 아랫도리를 향해 힘껏 돌진했다.
『아, 안 돼요, 다와. 거, 거기만은 제발…….』
그 순간,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천지 분간을 못 한 시타가 허겁지겁 바지만 주워 입고 밖으로 달려 나온 것이었다.
“으으, 이제 난 꼼짝없이 죽었다!”
시타의 입에서 공포에 찬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
꽃노을처럼 붉었던 산시의 얼굴이 그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보름달보다 더 탐스러웠던 그녀의 가슴과 몸도.
“에라, 이제 나도 모르겠다.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 산시 한 번만 더 안아 보자. 으, 추워!”
부르르 몸을 떤 시타가 후다닥, 궁려 안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 * *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른 날.
끊임없는 음악 소리와 웃음이 주도를 가득 채웠다. 눈이 닿는 곳곳마다 춤판과 술판이 한창이었다. 그 틈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시비와 다툼이 벌어졌다. 그마저도 재미있는지 사람들은 잠도 뿌리치며 떼를 지어 몰려다니기 바빴다.
백성 모두가 흥에 겨워 즐거워하고 있을 때. 황궁 안은 내일부터 벌어질 왕족 회의 준비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앞으로 열흘 간 이어지는 왕족 회의는 오후의 회담과 밤의 연회가 아우러진 모임이었다. 거기에선 각 부족의 왕위 승계 문제부터 이민족에 대한 침략과 대비, 교역과 농경 등, 기탄을 둘러싼 각종 현안이 폭넓게 다뤄졌다.
황궁의 안과 밖이 들뜬 분위기인 것에 비해 유독 황후의 처소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도 그럴 만했다. 발리안을 망신 주려던 계획도, 그를 포섭하려는 계획도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된 일이 없었다. 한데 거기…… 그보다 몇 배는 더한 날벼락이 떨어질 줄이야.
황후와 절도 칸, 천군이 굳은 얼굴로 마주한 가운데. 이제 막 불려온 발타고가 그들 곁에 자리를 잡았다.
“절 급히 찾으셨다면서요?”
어두운 표정의 절도 칸이 발타고 앞으로 유주가 든 잔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나눌 이야기가 기니 일단 목부터 축이시지요.”
발타고가 그것을 다시 밀어냈다.
“됐습니다. 유주는 맹물처럼 밍밍한 게 더는 못 먹겠습니다. 이왕 주실 거 더 독한 건 없습니까?”
황후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밤새 마셔놓고 이른 아침부터 또 술이라니. 그러니 네 안색이 그 모양 아니냐? 대체 무슨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얼굴이 그 지경이야? 혹 탈이라도 난 것이냐?”
술이라면 말술을 퍼마셔도 멀쩡한 것이 기탄의 사내였다. 한데 며칠 만에 가까이에서 본 아들의 얼굴이 영 말이 아니었다.
낯빛이 창백한 것은 물론, 눈도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거기다 연신 땀을 흘리는 것 하며 숨소리가 크고 거친 것 하며.
이런 꼴로 어찌 내일 왕족 회의에 고개를 내밀려는 것인지. 한심하다 못해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발타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애써 손을 저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머니. 무림제라고 연일 연회가 이어지다 보니……. 그나저나 전 왜 부르신 겁니까?”
“그게…….”
“제가 하지요, 황후마마.”
절도 칸이 황후를 대신하여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뭐, 뭐라고요?”
수염이 거뭇한 발타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축제고 나발이고. 그러잖아도 어제 발리안에게 쏟아진 백성들의 환호와 박수 때문에 열받아 죽을 지경인데. 거기에 또 뭐?
“지금 뭐라 말한 겁니까, 형님? 바, 발리안이 뭐가 돼요?”
발타고가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