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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68화 (68/116)

68화. 감춰 왔던 진심 1

* * *

하늘을 향해 누워버린 풀들과 얽혀 있던 네 개의 다리, 그리고 깍지 낀 손. 꿈의 끝부분을 스쳐 간 편린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아둔한 발리안이 아니었다.

자신의 추악한 욕망에 진저리를 친 그가 이불을 박차고 침상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여기 더 있다간 효령을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일지 두려워졌다.

탁.

궁려의 문을 닫은 그가 가쁜 숨을 토했다.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추고. 내내 부정하고 외면했던 감정이 일시에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언젠가 효령과 입을 맞췄던 그 날부터 줄곧, 수시로 떠오르는 붉은 입술과 그 감촉을 잊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을 향하는 효령의 맑은 눈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해 고개를 돌렸던 게 몇 번이었는지.

「대장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형제를 죽인 야차든, 그보다 더한 악당이든, 뭐든…… 내가 곁에 있어 줄게요.」

그 말이 한편으론 기쁘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인 것을 알기에 고통스럽고 쓰라렸던 마음.

넌 왜 하필 여인이 아닌 사내인 것이냐, 효령아.

어느 순간부터인가 뇌리를 가득 채운 그 생각이 너무도 버겁고 두려웠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된다, 스스로를 다그칠수록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효령이 눈앞에서 잠시만 사라져도 마치 손안의 것을 빼앗긴 아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질투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제도 다르지 않았다. 춤을 추기 위해 단둘이 마주했을 때. 파르르 떨리는 효령의 눈썹이 얼마나 어여뻤는지.

자신을 온전히 의지하며 서툰 춤을 이어가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고조되는 음악, 터질 듯 빨라지는 심장의 고동.

세상은 간데없고 오직 효령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흥분으로 상기된 연분홍 고운 뺨과 슬그머니 벌어진 입술. 그 순간 자신을 구하겠다며 뛰어든 깜찍한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효령에게 입 맞추지 않았을까. 찰나였지만 분명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널 안을 수 있다면,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조롱과 비난도 감당할 수 있노라고.

처음엔 욱해서 장난스럽게 효령과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마음만 확인한 꼴이었다.

“하.”

깊은 한숨을 쉰 발리안이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쏟아질 듯 많은 별 중에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잊지 마, 리안.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란다. 어머니가 저 하늘의 별이 되어 널 지켜 줄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씩씩하게 살아 줘. 내가 오래도록 널 지켜볼 수 있게…….」

어머니 발란주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어떡하면 좋죠……?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인지.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여러 생각과 감정이 뒤엉켜 오늘따라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난 확실했다. 자신이 효령과 선을 넘는 순간, 이제껏 목숨처럼 지켜온 약속이 산산이 부서지리라는 것.

「어떤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거나 허투루 살지 않겠습니다.」

어머니가 땅에 묻히는 것을 숨어서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리던 날, 하늘의 별이 된 그녀에게 했던 맹세.

일생 조롱과 멸시 속에 살아온 어머니 발란주의 이름이 더는 욕되게 기억되지 않도록 누구보다 열심히, 제대로 살아 보겠다 했던 마지막 그 다짐을 스스로 깨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머니…….’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다무는 발리안의 눈이 어느새 불긋해졌다.

‘부디 제가 그날의 맹세를 지킬 수 있게…… 더는 흔들리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어머니.’

“으아아아!”

허공을 향해 한껏 소리를 지른 그가 미친 듯 풀밭을 향해 뛰었다. 서늘한 새벽바람에 더러운 욕망이 다 씻겨 나가도록.

차가운 이슬에 발과 바지가 젖는 것도 모르고 발리안은 한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 * *

탁.

그 이른 새벽, 잠을 깬 사람은 발리안만이 아니었다. 그가 달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금 한 궁려의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닫혔다.

하아, 하아.

덜렁 바지 차림에 맨발. 조금 전 발리안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그림자가 가쁜 숨을 토했다.

“나, 어떡하냐!”

마른 몸을 부르르 떨며 두 뺨에 손을 올린 사내는 다름 아닌 시타였다.

“내,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힐끗 뒤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완전 울상이었다.

모든 사달은 바로, 어젯밤에서 막 오늘로 넘어온 자정 무렵에 시작되었다.

「사람 미치겠네, 정말!」

말에서 뛰어내린 산시가 땅을 내려다보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놓은 채 그녀의 뒤에 매달려 있던 시타가 그예 말 등에서 굴러떨어졌다.

숙영지, 그것도 궁려 앞에 다 온 참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신 차려, 오라버니. 이봐, 시타 오라버니.」

산시가 불만스럽게 시타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시타는 인사불성이었다. 아니 말에서 떨어지며 정신이 들긴 했지만 절대 깨었단 티를 낼 수 없었다.

아까 술을 핑계로 쏟아 놓은 말 때문이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남들은 다 축제를 즐기느라 바쁜데 나만 이게 무슨 꼴이냐고.」

산시가 툴툴거리며 시타를 부축해 앉혔다. 그러고는 그를 불끈 등에 업었다. 누구보다 강인하고 씩씩한 게 기탄 여인이라지만 산시는 그중에서도 유별났다.

키도 크고 아귀힘도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못 말리는 덜렁인 데다 넘치는 오지랖에 푼수기도 있었다.

‘헤, 여자에게 업히는 기분도 괜찮네.’

속이 없게도, 술이 덜 깬 시타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산시는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고마운 줄 알아, 이놈의 오라버니야. 다른 여자 같으면 진작에 오라버니를 버리고 내뺐을 거라고. 이게 다 나나 되니까…… 어?」

말을 하다 말고 산시의 눈이 커졌다. 저만치 앞을 걸어가는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영차. 힘차게 시타를 추어올린 산시가 빠르게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와, 왕자님.」

앞에 가던 사람은 효령을 업은 발리안이었다. 꿈이라도 꾸는지 효령은 작은 소리로 간간이 ‘하, 하, 하, 하!’ 기합을 넣었다.

「효령인 꿈속에서도 춤을 추고 있나 봐요.」

「그런 모양이다.」

「저희 빼곤 다들 부어라, 마셔라, 신이 났다니까요. 춤판에서 끝장을 보겠다나, 뭐라나.」

발리안의 수하들은 지금 대부분 축제 장소에 남아 있었다. 그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발리안은 술에 취한 효령을 데리고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겠다는 호독니마저 거절하고 오는 길이었다.

1년 내내 쉼 없이 달려온 수하들에게 겨우 주어진 자유 시간이었다. 그걸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단 무림제가 시작되면 대칸의 군대가 숙영지 전체의 수비를 책임지기 때문에 수하들이 없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산시, 네가 고생이 많구나.」

「그렇죠? 남자가 못나면 여자가 고생이라니까요.」

다와를 꼭 닮은 말투에 발리안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겨우 엉덩이 좀 본 것 가지고 책임을 지라느니 말라느니……. 그동안 어떻게 그 말을 참고 있었나 몰라요. 다들 보는 앞에서 삿대질까지 해가면서 따지는데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산시가 기다렸다는 듯 불만을 왕창 쏟아 놓았다.

「제가 뭐 그 엉덩일 보고 싶어서 봤나요? 자기가 확 까서 보여준 주제에 책임지라니. 저야말로 억울하다고요. 제가 남자 엉덩이나 밝히는 여잔 줄 알더라니까요.」

산시가 뾰로통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서 싫으냐?」

「아, 아니 그게…….」

잘만 떠들던 산시가 모처럼 말을 더듬었다.

「아직 그걸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붉혔다.

「비실비실한 사내는 질색인데…… 이놈의 오라버니는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니까요. 지금도 보세요. 겨우 술 몇 잔 들어갔다고 이 꼴이니.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잖아요.」

「좋으면 잡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발리안의 말에 산시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직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안야국엔 미인들 많다. 시타 그 녀석. 그래 봬도 꽤 인기가 좋아.」

산시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공교롭게도 어느새 그녀의 궁려 앞이었다.

「그 녀석. 볼살이 통통하고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여자가 이상형이라더라. 전 몸도 약하고 가진 게 없어 장가가기는 포기했다면서도 술에만 취하면 이상형 타령이니……. 잘 자라.」

일방적으로 인사를 마친 발리안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에서 산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처소 앞에서 산시는 한동안 고민했다. 시타를 그의 궁려까지 데려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재울 것인지.

「미안하지만 오늘 하루는 여기서 자. 나도 힘들어서 더는 못 가겠는 데다, 거기와 여기, 두 곳이나 불을 피우는 것도 일이라고. 안에 남는 침상이 있으니 안 될 것도 없잖아?」

끄응. 힘들게 문을 열고 들어선 산시가 한쪽 침상에 시타를 눕혔다. 그리고는 얼른 화로에 다가가 불을 피웠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따뜻해질 거야.」

타닥, 타닥. 불꽃 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궁려 안이 불빛으로 환해졌다. 산시는 화로 곁에 앉아 잔 나뭇가지를 불에 던져 넣었다.

「그러게,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렇게 마셔? 그러다 골골대고 아프면 오라버니만 손해라고.」

「…….」

「지금이야 먹고살 만해졌다고 해도, 어려서 고생한 건 다 몸에 남는대. 오라버니가 자주 아픈 것도 그래서란 말이야. 그러니까 몸 좀 아끼라고. 보는 내가 다 속이 탄다니까.」

「…….」

「사내들은 왜 하나같이 애처럼 구는지 몰라. 자기 몸 좀 자기가 챙기면 안 돼? 앞으로 더 좋은 날들이 많을 텐데 미리미리 몸을 아껴 둬야……!」

말을 하다 말고 산시가 흠칫,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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