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검독수리 4
* * *
“그래 너. 효령이 너 말이야.”
“하, 하지만 대장. 이건 남녀가…….”
말을 더듬는 효령을 두고 발리안이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안아서 데려가기 전에 빨리 나와!”
“……!”
화들짝 놀란 효령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발리안이 커다란 보폭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가 장작불 앞에 서기까지. 모두가 뒤집어질 듯 놀라 웅성거렸다.
“뭐, 뭐야? 이거?”
“대도위님이 기껏 고른 상대가 저자라고?”
“저거 사내 아냐?”
“그런 거 같은데?”
황족과 왕족들 쪽에서도 난리가 났다. 언젠가 절도 칸이 발리안과 효령을 두고 한 말을 떠올린 그들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여인이 모자란 탓에 간혹 군사 중엔 묘한 취향을 가진 자들이 있다던데……. 대도위의 취향이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되는구먼.」
“설마 절도 칸의 말이 사실일 줄이야.”
“대도위가 저 안야국 사내랑…… 하!”
“마, 말도 안 돼!”
다들 술렁거리는 틈에서 연제준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영악한 놈, 장가가기 싫다는 시위 한번 요란하게 하네. 너 아무래도 성공한 것 같다, 리안. 다들 속아 넘어가신 것 같은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그제야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런 게지? 그럼 그렇지. 난 또…….”
“하여튼. 대도위가 사람 놀라게 하는 덴 일가견이 있는 것 같소이다.”
“하지만 이리되면 백성들 사이에선 이상한 소문이 돌 텐데. 하, 그것도 난감한 일 아니오?”
모두가 자신을 두고 떠들거나, 말거나. 발리안은 태연한 얼굴로 효령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봐요, 대장. 사, 사람들이 오해해요. 지금이라도 다른 공주님을…….”
“마음에 없는 소리 관둬. 네 얼굴 지금 기뻐 보이는데……?”
“아니 그, 그게…….”
속내를 들킨 효령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잖아도 발리안이 추는 춤을 보고 싶다는 마음과, 그가 다른 여인과 춤추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두 마음이 내내 다툼을 벌였다.
설마 나에게 춤을 청하지는 않겠지? 바, 바보……. 이건 연인들끼리 추는 춤이잖아. 내게 기회가 돌아올 리가…….
쓰린 마음을 산시와 교기에게 들키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느라 얼굴이 다 당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발리안이 하고 많은 공주님을 뿌리치고 자신 앞에 섰을 때.
눈앞에 내밀어진 그의 손을 보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터질 듯 기뻤는지. 주책없이 욱하니 눈물이 솟아 혼이 났다.
“난 기탄 춤은 전혀…….”
“날 따라서 해. 하나도 안 어려워.”
드디어 발리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과 팔을 번갈아 흔들며 앞으로 걷는 것처럼. 어색하고 창피했지만, 효령은 열심히 그를 흉내냈다.
서로 마주 보다가 엇갈려 지났다가 다시 마주했다가. 어느 순간 발리안이 효령의 뒤로 다가왔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아. 이렇게.”
발리안이 두 팔을 벌리고 선 그녀의 허리로 손을 뻗었다.
“대장.”
동작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다만 얼굴 가까이서 느껴지는 발리안의 숨결에 당장 터질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연인을 보는 것처럼 그윽한 눈빛, 허리에 닿은 커다란 손, 점점 더 고조되는 음악 소리. 흥겨우면서도 어딘지 간드러진 현의 음률이 자꾸만 마음 깊은 곳을 간질였다.
어느새 주변은 어둠 속으로 밀려나고 너른 초원 위에 단둘만 있는 느낌이었다. 뺨을 스치는 가을바람이 봄날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효령아.”
발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얼핏, 알 수 없는 열기가 스쳤다.
평생 같이 있자.
바람과 음악이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순간에도, 효령은 그 말만은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너무나 행복해서, 가슴이 벅차서 다시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럴게요…….
야릇한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발리안의 눈빛이 효령의 눈과 입술을 번갈아 더듬었다.
꿀꺽. 효령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지 주저하고 번민하는 듯한 발리안에게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었다.
‘망설이지 말아요, 대장. 난 사내가 아니에요. 난, 나는…….’
혀끝에 걸린 고백이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찰나.
“재미있어 보이는데 저도 같이 추겠습니다.”
“나도!”
“저도 추가요!”
“이놈들아, 왜 나까지……!”
왁자한 목소리와 함께 교기와 시타, 산시와 호독니가 장작불 앞으로 난입했다.
그들이 풀쩍풀쩍 발리안과 효령 주위를 맴돌았다. 지레 겁을 먹은 시타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나 아니에요, 대장. 교기 이놈이, 대장이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사정을 하는데 버틸 수가 있어야지.”
시타가 교기와 짝을 지어 발리안과 효령의 춤을 따라 췄다. 그 곁에서 산시가 뻣뻣한 호독니에게 지청구를 날렸다.
“이러니 장가도 못 가 보고 아저씨 소리를 듣죠? 좀 더 성의있게 못 춰요?”
그들 틈으로 무예 대회에 참가했던 발리안의 수하들까지 모조리 몰려들었다.
“호독니 천장. 너무합니다. 왜 우린 뺍니까? 춤을 추려면 같이 춰야지.”
그들이 하나씩 상대를 끌어 잡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사내들이 짝을 지어 다정하다 못해 끈적거리는 군무를 선보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구경꾼들의 입에서 뻥, 하니 웃음이 터졌다.
“뭐야, 그런 거였어? 난 또 뭐라고.”
“그럼 그렇지, 대도위님이…….”
“으하하하하. 거참 볼 만하네.”
“어디, 그럼 나도?”
“그래, 까짓. 짝이 없으면 어떠냐? 오늘은 나도 원 없이 춤이나 춰 보자!”
평소라면 연인들에 밀려 우울하기 그지없을 외기러기 사내들이 신이 나 장작불 곁으로 뛰어들었다.
“저희도 끼워 주십시오, 대도위님!”
“어이, 그쪽은 나랑 추지!”
“야, 인마. 간지러워. 어딜 만져?”
“살살들 해라, 살살.”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왁자한 웃음소리가 사방을 뒤덮었다. 우스꽝스럽다 못해 배가 아플 만큼 재미난 춤이 끝나고 금세 음악이 바뀌었다.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 악사들의 연주에 힘이 실렸다. ‘오호오호’ 하는 기묘한 추임새와 함께 음률이 점점 더 빨라졌다.
씩, 미소를 지은 발리안이 어깨를 움직였다. 마치 날개를 펼치려는 새처럼 두 팔을 벌린 그가 한 발로 땅을 튕기며 오른쪽으로 나아갔다.
이어 다음 사람이,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사람이. 모두가 꼬리를 물듯 같은 동작을 하며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현란한 현악기의 연주 위에 둥둥둥둥, 크고 작은 타악기 소리가 얹어졌다. 그에 맞춰 사람들의 손과 발의 놀림이 복잡하고 격렬해졌다.
마치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고 채찍을 내리치는 것을 형상화한 것 같은 몸짓이었다. 나는 듯, 힘차고 절도 넘치는 발리안의 동작을 바라보는 효령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발리안의 춤. 효령의 눈앞에서 한 마리 검독수리가 초원을 박차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앉아 있던 사람들이 춤에 맞춰 손뼉을 치며 기합을 넣었다. 보고만 있어도 몸이 절로 들썩거렸다.
효령과 교기도 신이 나 발을 굴렀다. 선 사람과 앉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다 함께 전신을 흔들었다.
“쯧쯧. 저게 무슨 괴상망측한 꼴인지……. 다들 눈 버리기 전에 우리가 제대로 된 춤을 보여줍시다, 공주.”
“예, 저하.”
연제준과 허올란이 손을 맞잡고 불 앞으로 달려갔다.
“우리도 가자고!”
“그래요.”
그들을 시작으로 우르르, 다른 연인들도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하, 하, 하, 하!
수천의 사람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하늘과 땅이 흔들렸다.
상쾌하고 시원한 밤바람. 어둠을 뚫고 높이 솟은 불기둥. 빠르고 경쾌한 음악 소리. 그보다 더 거대하고 요란한 생명력과 활기. 기탄의 가을밤이 눈부시게 깊어 가고 있었다.
* * *
“……!”
새벽녘에야 잠이 든 발리안이 번쩍 눈을 떴다.
빌어먹을!
그러잖아도 새하얀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지난밤 아무래도 술이 너무 과했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발리안이 당황한 얼굴로 옆을 살폈다. 효령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몇 번이고 끝없이 이어진 춤에 넙죽넙죽 받아 마신 술 때문인지 그녀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하.
한숨을 내쉰 발리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런 미친놈.
그의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효령을 상대로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다니. 앵속에 취해서 환각을 보았던 날 이후 내내 이 지경인 걸 보니 그 충격의 여파가 생각보다 더 큰 모양이었다.
『……!』
꿈속에서 효령은 몸에 붙는, 저고리와 치마가 하나로 이어진 옷 위에 소매가 짧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늘 입던 사내 옷 대신 기탄 여인의 차림을 한 그녀는 생각보다 더 가녀리고 아름다웠다.
새하얗고 기다란 목, 수줍게 솟은 가슴, 날씬한 허리. 여느 때처럼 하나로 높이 묶는 대신 길게 풀어 내린 머리가 허공에 곱디고운 선을 그렸다. 한 떨기 바람꽃처럼 향기로운 그녀가 저 멀리 초원의 끝에 서 있었다.
『거기 서, 효령아!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발리안의 외침에 그녀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은 효령이 이내 지평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윙윙. 기세 사납게 불어온 산곡풍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그 바람에 떠밀려 그녀가 사라질까 불안해진 발리안이 서둘러 효령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그녀는 잡힐 듯, 잡힐 듯 아슬하게 멀어졌다.
『효령아!』
애가 탄 발리안이 그녀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
마치 기적처럼, 영영 닿지 않을 것 같던 옷의 끝자락이 손에 닿았다. 혹여 그녀를 놓칠세라 발리안은 거칠게 그 옷을 잡아당겼다.
순간, 품 안을 가득 채운 그녀의 몸이 느껴지며 두 사람은 초원 위로 쓰러졌다.
『효령……!』
발리안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목을 끌어안은 효령이 거세게 입술을 부딪쳐 왔기 때문이었다.
온 초원이 울릴 만큼 진하고 달큼한 입맞춤이었다. 마치 끝없이 이어진 사막 끝에서 샘을 만난 사람처럼 오랜 갈증을 해결하려는 다급한 몸짓.
『……!』
거기, 몸이 반응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그녀를 자신의 밑에 가둔 발리안이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옷을 벗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순백의 몸 위로 하얀 햇살이 쏟아졌다. 그 찬란함을 차마 감당하지 못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젠장!’
그다음 장면을 떠올리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