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검독수리 3
* * *
연제야가 막 깃대를 손에 잡은 순간, 동시에 날아온 두 대의 화살이 깃대에 묶여 있던 깃발의 끈을 끊어버렸다.
휘익.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연제야가 황급히 그걸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풀거리며 날아간 깃발이 연제야의 불과 두어 장(丈) 앞에서 멈춘 발리안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안 돼!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른 연제야가 다급히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어어?
어어어어!
당황한 구경꾼들이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깃발을 깃대에서 끊어내느라 발리안은 화살을 다 쓴 상태였다. 하지만 연제야의 수중엔 아직 두 대의 화살이 남아 있었다.
저걸 어째?
어떡해?
대, 대도위님!
위험합니다, 대도위님!
마치 모든 장면이 느린 그림처럼 천천히 지났다.
효령과 사람들이 귀를 막으며 고함을 치는 사이. 이를 악다문 연제야의 화살이 발리안을 향해 날아갔다. 피하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거리였다.
……!
코앞에서 날아드는 살기에 발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얼굴 정면에 꽂히려는 화살을 간신히 피한 순간, 다시금 그를 향하는 마지막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으아아아아!”
“아아!”
“으악!”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휘이익.
발리안의 머리카락을 파고든 화살이 아슬아슬 그의 뺨을 스쳤다. 촤라락. 발리안의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어지며 그의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
모두가 너무도 놀라 말을 잃었다.
차라리 몸을 숙이기라도 할 것이지. 긴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말 위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발리안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얼굴이라도 다친 건가?
당황한 것은 연제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말머리를 틀길 바라며 쏜 것인데……. 바닥에 꽂히는 화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두려울 줄이야.
활을 든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발리안의 얼굴이 연제야를 향했을 때.
“우와아아!”
“와아!”
“대도위님, 만세!”
“검독수리, 만세!”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검독수리 만세’란 소리가 들불처럼 온 초원에 번졌다. 이제 막 서산으로 지려던 해마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 맙소사!
효령을 비롯하여 산시와 시타, 교기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연제야를 바라보고 있는 발리안의 한 손에 깃발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는 두 개의 화살이 물려 있었다.
퉤.
발리안이 땅을 향해 물고 있던 화살을 뱉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툭. 안도와 실망이 뒤섞인 감탄과 함께 연제야의 손에 들려 있던 활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라비 연제준마저 구림 부족에는 당할 자가 없다고 인정한 실력이었는데. 낯선 사내들과 몸을 부대끼기 싫어 출전하지 않은 격투만 아니라면 자신도 검독수리란 칭호쯤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발리안이 기탄에 존재하는 유일한 검독수리인지. 오라비 연제준이 왜 갖은 핑계를 대가며 그가 나오는 무예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었는지.
이제껏 시도조차 안 하는 오라비가 비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비겁한 게 아니라 영리한 것이었다.
오라비는 그저 무사태평에 만사 대충인 능글맞은 사내가 아니었다. 직접 부딪히기 전까지는 결과를 모르는 아둔한 태자 발타고와는 달리, 애초에 자신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극명한 실력 차를 미리 알아챈 것뿐이었다.
‘미안, 오라버니. 멍청한 건 오라버니가 아니라 나였네.’
허탈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말에서 내려, 탄해를 쓰다듬고 있는 발리안에게 다가갔다.
“내가 졌어요, 대도위. 정말 엉망으로 깨졌네요.”
“아닙니다. 하마터면 제가 질 뻔…….”
“거짓말 말고요. 그런 건 위로가 아니라고요.”
훗. 발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맞습니다. 절대 질 생각, 없었습니다.”
“우와. 너무 에누리가 없네요. 거절당하는 사람 생각도 해야죠.”
“하지만 공주님은 여느 여인처럼 연약하지도 않고, 오히려 사내를 위협할 만한 기백과 실력을 갖추셨잖습니까? 달리 대할 이유를 못 찾아서요.”
연제야가 입을 삐죽거렸다.
“피. 얄미운 말만 골라 하는 걸 보면 오라버니 친구가 맞다니까. 둘이 어쩜 그렇게 똑 닮았는지 몰라.”
그녀가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나 하나 떼어 냈다고 안심하지 마요. 가장 강적인 내가 떨어져 나갔으니 주저하고 있던 다른 부족 공주들이 옳다구나, 환장하고 덤벼들걸요. 대도위의 고생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에요. 알아요?”
연제야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
“사내를 위협할 만한 기백과 실력을 갖췄어도 난 엄연히 여자라고요. 여인을 이렇게 무참하게 상처 주다니……. 어디 대도위도 곤란한 지경 한 번 당해 봐요.”
냉큼 대칸 앞으로 달려간 그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칸. 역시 검독수리와 겨루기에는 제 실력이 모자랐습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깨끗이 제 패배를 인정하고 오늘 축제의 첫 춤을 출 권리를 대도위에게 양보하겠습니다.”
그녀의 제안에 대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락하마.”
“……!”
하. 연제야의 뒤에 서 있던 발리안이 당했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를 향해 연제야가 얄궂게 웃어 보였다.
* * *
각 부족을 상징하는 오색 깃발이 펄럭이며 밤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너른 공터에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른 장작더미가 일으킨 커다란 불꽃이 순식간에 사방을 환히 밝혔다. 여기저기서 맛있는 음식 냄새와 함께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대낮도 무색하게 할 만큼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밤이었다.
실컷 먹고 마시고 배를 채운 사람들이 목이 빠져라, 축제의 시작을 기다렸다.
대칸의 짧은 축사에 이어 천신께 바치는 기원의 노래가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흥겨운 춤의 시간이 돌아왔다.
“대도위 발리안은 앞으로 나오라.”
대칸의 부름으로 앞에 나가는 발리안을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설마…… 이번에도 첫 춤을 거절하시는 건 아니겠지?”
“이젠 아픈 어머니도 안 계신데 설마 산통을 깨시려고.”
“수하 중에서 늑대가 나왔으니 기분이 좋아서라도 한 곡 추시겠지.”
“그나저나 누구랑 추시려나?”
“그러게. 혹 마지막 대결을 했던 구림 부족 공주님?”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얼굴에 대고 화살을 쏘는 여자랑 무서워서 어떻게 춤을 추냐? 너 같으면 그러고 싶겠냐?”
“으으, 상상만으로도 겁이 난다. 나라면 7황비마마나 허올란 공주님 같은 야들야들한 미인이랑…….”
“나도!”
여기저기서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사이. 드디어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남녀가 함께 추는 비교적 차분한 곡이었다. 커다란 장작불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오늘은 절대 흥을 깨지 마라. 그건 내가 용납지 않는다.」
대칸의 명을 떠올린 발리안의 미간이 슬그머니 구겨졌다.
대체 누구와 춤을 추라는 것인지…….
“……!”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발리안의 시야에 연제준이 들어왔다.
황족과 왕족들을 위한 자리에 앉은 그는, 절도 칸이 째려보든 말든 허올란과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기 바빴다. 보는 눈만 없다면 당장 입술이라도 물고 빨 기세였다.
역시, 여자 후리는 걸로는 단연 검독수리감이었다.
‘망할 놈. 누이 하나 단속 못 해서 날 이런 곤경에 빠뜨려?’
문득 발리안의 시선을 느꼈는지 연제준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떫냐? 부러우면 너도 장가를 가든가.’
‘미친…….’
‘야, 인마. 대충 아무나 골라. 여잔 우리 허올란 빼면 다 거기서 거기다. 나도 허올란이랑 춤 좀 추게 빨리 좀 끝내라. 응?’
순간, 연제야가 제 오라비의 뒤통수를 밀쳤다.
‘눈꼴시니까 오라버닌 저리 꺼져. 그나저나…… 대도위 표정이 참 볼 만하네요. 고것 참 쌤통이다!’
그녀가 얼굴 가득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거봐요. 날 찬 거 후회할 거라니까. 근데 이거 알아요? 오늘 대도위에게 선택된 여잔 그걸 청혼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는데. 어쩔 거예요? 이래저래 참 난처하게 됐네요.’
‘……!’
윽. 거기 생각이 미친 발리안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제야 자신을 향한 수많은 여인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황족, 왕족들의 자리에 앉은 공주들, 특히 미혼의 공주들은 설레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껏 멋을 내고 치장한 그녀들이 상기된 얼굴로 다가올 운명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칸이 발리안의 신붓감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문이 어느새 새어 나간 까닭이었다.
보좌에 앉은 대칸 역시 기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젠장!’
발리안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늘 이 순간에 자신의 긴 미래가 달려 있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간 평생 그녀에게 코를 꿰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
어쩐다?
잔뜩 달아오른 이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서 혼인에 관한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전달할 길은 없는 건가.
“……!”
순간, 방법이 떠오른 발리안이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넌 대체 어디에……!’
드디어 목표물을 찾은 그의 입매가 야릇하게 휘어졌다. 성큼성큼. 발리안이 거침없이 사람들 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오!”
구경꾼들이 소리를 지르며 눈을 빛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결같이 그의 뒤통수에 꽂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발리안이 황족, 왕족들의 앞을 그대로 지나치자 사람들이 의아하여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을 걸은 그가 많은 구경꾼 틈에 섞인 한 사람 앞에 멈춰 섰다.
휙. 물이 갈라지듯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몸을 비켰다.
“나와.”
“예? 나, 나…… 나요?”
예상 밖이었는지 지명을 받은 상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