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검독수리 2
* * *
느닷없는 불똥이 발리안에게 튀었다.
또다시 괜한 일에 휘말린 발리안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근처에 앉아 있던 연제준이 씨익, 그 뒤통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 네 마음대로 안 될 거랬지?’
“대도위.”
대칸의 부름에 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기탄의 사내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내 너를 대신하여 연제야의 청을 받아들였다. 부디, 네가 기탄 사내의 체면을 세워 주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발리안이 연제야를 향해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그러네요, 대도위.”
발리안이 연제야를 보는 것은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연제준의 등 뒤에 숨어서 몰래 자신을 훔쳐보던 꼬맹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을 줄이야.
연제준의 말처럼 연제야는 꽤 미인이었다.
나이는 효령보다 한 살 어린 열일곱. 또렷한 이목구비 하며 굴곡진 몸매 하며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거기 더해 한눈에 보기에도 의지가 강하고 대범해 보였다.
“저와 무엇을, 어떻게 겨루길 원하십니까?”
“왜 겨루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는 궁금하지 않나요?”
“궁금해해야 합니까?”
“네, 그래 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청하는 대결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것이니까요.”
연제야가 다부진 표정으로 말했다.
“난 나 자신에게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기탄의 누구와 겨뤄도 밀리지 않는 신붓감이라고 생각해요. 해서…….”
“…….”
“내 낭군이 될 사람 역시 그에 못지않은 사람이었으면 해요. 하지만 난 공주이니 보통은 부족의 이해관계나 필요에 따라 상대가 정해지겠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
“난 단지 나와 어울리는 지위의 사람이란 이유로 상대를 받아들이진 못하겠어요.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거나 남편으로 인정할 자신이 없거든요. 그래서요. 대도위와 혼인하고 싶어요.”
“예?”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발리안이 숨을 멈췄다.
“이것이 내가 대도위에게 대결을 청하는 이유예요. 겨우 춤 한 번 추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잠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발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까지 절 생각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전 매이는 걸 싫어하는 데다 안야국에 벌여놓은 일이 많아 혼인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게 다 재수 없는 우리 오라버니 때문이죠? 그 능글맞은 인간이 싫어 나까지…….”
“공주님.”
“긴말 필요 없어요. 날 떼어 내려면 승부에서 이기는 길밖에 없을걸요?”
연제야가 여간해서는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걸 안 발리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제가 이기면 두 번 다시 혼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도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로 하고요.”
“좋아요, 약속해요.”
“그럼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활쏘기, 말타기?”
“둘 다 한꺼번에요.”
그녀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운데 깃발을 두고 그 양쪽 끝에서 서로가 말을 달려오는 거예요. 깃발을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승자죠. 이때 상대를 막기 위해 쏠 수 있는 화살은 세 발.”
“…….”
“화살을 피하려 말머리를 돌리거나 깃발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당장 시작하죠.”
두 사람이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무예 대회의 진행자가 이 대결의 방법에 대해 구경꾼들에게 설명했다.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 동요가 일었다.
“뭐야? 상대에게 직접 활을 쏜다고? 전시도 아닌데? 이러다 누구 하나 크게 다치는 거 아냐?”
“다치는 게 뭐냐? 잘못하다간 죽는다고!”
“야! 두 분 다 안 죽을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거겠지. 설마하니 아무 대책도 없이 저런 위험한 짓을 하겠냐?”
“와, 이거 정말 재미있겠는데. 치고받는 격투보다 이쪽이 훨씬 더 아슬아슬하겠다.”
“근데 누가 이기려나?”
여기저기서 가지각색의 반응이 쏟아졌다.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연제야와 발리안이 정해진 자리에 섰다. 뽑기 쉬운 작고 가벼운 깃발이 초원 한가운데 급히 만들어진 돌무더기에 꽂혔다.
그것을 중심으로 연제야가 왼편, 그 맞은편 끝이 발리안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과 깃발 사이의 간격은 서로 달랐다.
발리안은 연제야보다 세 배는 더 먼 곳에 서 있었다. 말타기 경기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제야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발리안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대장!”
저 멀리 언덕 중간쯤에 앉아 있던 효령이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산시와 시타, 교기가 그 뒤를 이었다.
산시가 애가 달은 효령을 달랬다.
“걱정할 것 없어. 틀림없이 왕자님이 이기실 거야.”
“하지만…….”
발리안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그와 깃발 사이가 너무도 멀었다.
구경꾼들의 맨 앞줄에 선 효령이 눈을 들어,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있는 연제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극적이고 조신한 안야국 여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온몸에 자신감과 기백이 넘치는 것이 탄성이 나올 만큼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왜……?
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는 이런 아슬아슬하고 무모한 내기를 제안한 걸까. 그저 실력을 겨룬다고 보기에는, 웃으며 넘기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대결이었다.
‘대장.’
효령이 불안감에 입술을 깨문 찰나.
뿌우.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말이 깃발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힘내요, 대장!”
“힘내요!”
“힘내십시오, 대도위님!”
“힘내라, 힘!”
연제야보다 훨씬 더 원거리에서 출발한 발리안을 향해 응원이 쏟아졌다. 응원만 두고 보자면 발리안 쪽이 압도적이었다.
특히나 사내들은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너나없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높였다.
말굽에 채인 긴 풀들이 휙휙 뒤로 누웠다. 윙윙. 말머리에 부딪힌 바람이 갈기를 뒤흔들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어느새 하늘을 물들인 꽃노을도 미친 듯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두 사람 위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진해서 출발선을 뒤로 물리다니. 대도위의 자신감이 지나친 건가요, 아니면 생각보다 내가 혼인 상대로 싫지 않은 건가요?」
「글쎄요, 결과를 보면 알겠지요.」
경기 직전 발리안과 나눈 대화를 떠올린 연제야의 입매가 비릿하게 비틀렸다.
‘만약 날 깔본 거라면 큰코다치게 될 거예요, 대도위. 하지만 그 오만함이 당신의 매력이죠.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당신을 곧 기탄 최고의 사내로 만들어 줄 테니. 난 겨우 대도위의 아내로 만족할 여자가 아니거든요.’
그녀의 말이 놀라운 기세로 깃발을 향해 달려갔다. 새 말로 갈아탄 덕분에 속도라면 자신 있었다.
그에 질세라 발리안을 태운 탄해도 폭풍처럼 앞으로 치고 나갔다.
기탄에서 명마로 손꼽히는 말들은 대부분 장거리를 지치지 않고 달리는, 지구력이 뛰어난 말들이었다. 그러나 탄해는, 지구력보다는 무시무시한 순발력과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는 속력을 자랑하는 말이었다.
갈기와 꼬리를 휘날리며 달린 탄해가 금세 깃발과의 거리를 좁혀 놓았다.
‘젠장!’
여유로운 승리를 장담했던 연제야의 미간이 흐려졌다.
과연 발리안은 괜히 검독수리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만약 같은 거리에서 출발했다면 십이면 십, 자신의 패배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녀 쪽이 깃발과 더 가까웠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질 내가 아니라고요.’
“하!”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한 그녀가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당신을 상대로 화살까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간단히 끝내버려 미안하군요, 대도위.’
휘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연제야의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쉭쉭. 화살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발리안을 향해 날아갔다.
“으아, 화, 화살이다!”
“세상에, 진짜로 화살을 쏘다니!”
“피해요!”
“피하십시오, 대도위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곧장 목표를 향하는 화살에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아우성을 쳤다.
그래도 설마설마했는데 저렇게 대놓고 화살을 쏠 줄이야. 자비를 모르는 화살은 정확히 발리안의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대장……!”
너무도 놀란 효령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챙. 탁.
금속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방이 일시에 잠잠해졌다.
“마, 맙소사!”
누군가의 고함이 얼어붙은 공기를 뒤흔들었다. 삽시간에 초원이 다시 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세상에!”
“너 방금 봤냐? 봤어?”
“뭔가 보긴 본 것 같은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연제야의 화살에 의해 발리안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눈 깜짝할 새 그의 손에서 튕겨 나간 화살이 연제야의 것과 충돌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겨우 점처럼 보일, 아니 그나마도 빠른 속도 때문에 포착하기 어려운 화살촉을 화살로 맞춰 떨어뜨리다니. 운, 아니면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
발리안의 남다른 솜씨를 확인한 연제야의 입에서도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몸을 숙여 피할 줄 알았더니…… 정말 당신에겐 못 당하겠네요, 대도위. 역시 당신 실력이 나보다 한 수 위네요. 하지만…….’
회심의 미소를 지은 연제야가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깃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 승부는 내가 이겼어요!’
콱. 돌무더기 위로 삐져나와 있던 깃대가 순식간에 연제야의 손아귀로 딸려 들어갔다.
“으아아아아!”
“으아!”
“안 돼!”
“안 된다고!”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믿었던 발리안이 이렇게 속절없이 지다니. 마지막으로 그에게 희망을 걸었던 기탄 사내들의 자존심이 와르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망연자실, 넋을 놓은 자들에게서 절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오는 찰나,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 탄식을 이내 노도와 같은 함성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우와!”
“와아!”
“우와와아아아!”
초원이 흔들리는 가운데, 연제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젠장, 빌어먹을!”
깃대를 움켜쥔 그녀가 빽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