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검독수리 1
* * *
과연. 미시가 지나고 신시(오후 3시)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전체 이백여 명의 참가자 중 최종 20인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것이 산시가 말한 파란 띠의 무사였다.
“다행이다. 저기 말파도 들었어.”
효령과 산시가 이마의 땀을 닦고 있는 말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힘내요, 말파.”
그들을 알아본 말파가 씨익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와!”
“어어어어어!”
“에잇!”
관중들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몇 차례의 접전이 이어진 후.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그 진출자는 모두의 예상과 바람대로 파란 띠의 무사와 말파였다.
결승전의 과녁은 두 사람이 선 곳에서 자그마치 100장(丈, 1장은 3m)이나 떨어져 있었다. 어찌나 멀리에 있는지 커다란 과녁이 사람 손바닥보다 작게 보였다.
그것을 알아보는 데만도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시작을 알리는 기가 올라가자 둘은 거침없이 활을 겨눴다.
휘잉.
휘이익.
두 사람이 간발의 차이로 화살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화살이 꽂혔음을 알리는 깃발이 나부꼈다.
이쪽에선 아예 화살이 보이지 않아 그 깃발이 아니고선 결과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두 번째 화살 역시 동시에 나란히 과녁에 박혔다.
“이제 마지막 한 발 남았다!”
파란 띠의 무사와 말파가 운명이 걸린 세 번째 화살을 겨눈 순간. 얄궂게도 윙윙, 바람 소리가 요란해졌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느라 벌어진 현상이었다. 바람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지자 활줄을 당기려던 말파와 상대가 일시적으로 동작을 멈췄다.
“어쩌지?”
“그러게요. 힘내요, 말파!”
지켜보는 이들이 손에 땀을 쥐는 사이.
팅.
티딩.
드디어 두 개의 화살이 시위에서 튕겨 나갔다. 꾸불꾸불. 마치 뱀이 기어가듯 두 화살이 좌우로 휘어지며 힘차게 바람을 뚫고 날았다.
“어때 보여, 교기야?”
“글쎄요. 아까보다 활줄을 더 뒤로 당긴 것 같긴 한데 과녁까지 도달할지는……. 저도 이렇게 멀리서 쏘는 경기는 처음 봐서요.”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결과를 알리는 깃발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멀리서 두 개의 깃발이 솟았다.
“저것 봐. 둘 다 명중이야.”
산시가 흥분해서 박수를 쳤다.
“후우. 다행이다. 정말 조마조마했는데. 근데 둘 다 명중이면 어떻게 승부를 가려?”
효령의 물음에 교기가 대답했다.
“과녁판을 가져와 누가 더 가운데를 맞췄는지 확인할 겁니다.”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교기의 이야기처럼 경기장 안으로 과녁판을 실은 말들이 들어왔다.
진행을 맡은 사람들이 과녁판을 내려 그 결과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승자를 알리는 깃발이 하늘 높이 흔들렸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꼭 같은 색, 파란색의 기였다.
“와아!”
구림 부족의 구경꾼들이 앉은 쪽에서 지축이 떠내려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와 대조적으로 발리안과 대칸 쪽 구경꾼들의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다.
“우승자는 앞으로 나오라.”
대칸의 명에 파란 띠의 무사가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대에게 눈표범의 칭호를 허락한다.”
대칸이 무사의 머리 위에 우승자의 모자를 씌웠다.
“와아!”
“와아아아!”
군중들의 함성으로 공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우승자가 상으로 받은 활과 화살통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지는 저녁노을에, 화살통에 그려진 눈표범이 눈을 번득이며 포효했다.
* * *
무예 대회의 마지막 날. 시간은 어느새 인시(5시)의 끄트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초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눈이 돌기둥이 서 있는 결승점을 향했다.
모두가, 잘 훈련된 말을 타고 달려 나간 열두 명의 결승 진출자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이틀간의 경기에서 활쏘기의 우승자인 ‘눈표범’, 격투의 우승자인 ‘늑대’가 정해졌다. 드디어 오늘, 축제의 첫 춤을 시작할 말타기의 우승자 ‘사슴’이 결정될 터였다.
구림 부족과 대칸 쪽에서 각각 눈표범과 늑대가 나온 상황이라, 남은 사슴의 자리를 두고 각 부족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어제 경기는 너무 일방적이어서 좀 시시했는데, 오늘은 흥미진진하구먼.”
기다리기 지루해진 사람들이 어제 벌어진 격투의 결과를 두고 수다를 떨었다.
경기 이틀째 벌어지는 격투는 나이와 체급에 상관없이, 한쪽의 팔꿈치가 땅에 닿을 때까지 이어지는 가장 남성적이고 위험한 경기였다.
사용하는 무예나 기술, 시간에 제한이 없어 매해 부상자가 속출하곤 했다. 그러나 올해 경기는 예외였다.
“대도위님 수하라고 했지, 어제 그 늑대 말이야.”
“맞아. 험한 전투에서 잔뼈가 굵어서 그런지 다들 상대가 안 되던데, 뭘. 실력 차가 워낙 심해서 너무 일찍 끝났잖아. 부상자도 별로 안 나오고.”
“맞아. 대도위님 수하들끼리 결승을 치르니 긴장감도 덜 하고 말이야.”
“그러게. 오늘 말타기 결승에도 대도위님 수하가 다섯이나 들었다면서? 하여튼 대단하긴 대단해.”
“그래도 혹시 몰라. 아까 보니 하투 부족에도 대단한 실력자가 있던데? 말도 보통 명마가 아닌 것 같고 말이야.”
“참, 결승 진출자 중에 눈표범도 들어 있던데, 이러다 혹 그쪽이…….”
“에이, 설마.”
“야, 인마. 넌 설마가 사람 잡는단 말도 모르냐? 암만 봐도 눈표범 운발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니까.”
바로 그때, 구경꾼들 틈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기 봐! 나타났다, 나타났어!”
저 멀리 뿌연 흙먼지와 함께 입에 거품을 문 말들이 나타났다.
조금이라도 앞서 나가려고 서로를 밀치는 말과 기수들의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이러다 누가 다치기라도 할까, 지켜보는 사람들이 가슴을 졸였다.
맨 앞을 다투는 것은 빨간 띠와 노란 띠, 파란 띠를 두른 자들이었다. 셋의 말머리가 나란한 것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백중지세였다.
“이럇, 이럇.”
“하!”
“하!”
기수만큼이나 흥분한 말들이 콧김을 뿜어대며 미친 듯 앞으로 내달렸다. 순간.
쾅. 격렬한 경쟁의 도중 두 마리의 말이 몸통을 부딪쳤다. 그 충격의 여파로 몸집이 작은 파란 띠의 기수가 고삐를 놓치고 비틀거렸다.
“아아!”
“으아!”
“아악!”
“저, 저걸 어쩌냐?”
그 장면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중심을 잃은 그의 몸이 옆으로 기울며 곧 바닥으로 떨어질 위기였다. 그러다 자칫 뒤에 오는 말과 충돌하면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허벅지와 다리의 힘으로 아슬아슬 버티던 그가 반동을 이용하여 말 위로 몸을 돌이켰다. 그러더니 금세 고삐를 다시 움켜쥐었다.
“하!”
다시금 그가, 자신을 제친 두 마리의 말을 쫓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말은 이제껏 먼 거리를 뛰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속도를 올렸다. 삽시간에 그는 앞 말과의 간격을 좁혔다.
“하, 하!”
선두에 선 노란 띠와 붉은 띠의 기수가 이에 질세라 전력을 다해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돌기둥 앞을 가장 먼저 지나친 것은 파란 띠의 기수와 그 말이었다.
“구림 부족의 승리다!”
“눈표범이 우승했다!”
“눈표범이 사슴이 됐어!”
큰 외침과 함께 꽃노을이 물드는 하늘에 파란 깃발이 휘날렸다.
“우승자는 앞으로 나오라!”
우레와 같은 환호 속에 말에서 뛰어내린 기수가 시원스러운 걸음으로 대칸 앞으로 걸어갔다.
무릎을 꿇은 그의 머리 위로 우승자의 모자가 씌워졌다.
“그대에게 사슴의 칭호를 허락한다.”
대칸이 그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장하구나. 눈표범에 이어 사슴의 칭호까지 받다니. 올해 최고의 용사는 너로구나.”
대칸이 그에게 손잡이가 금으로 된 말채찍을 하사했다.
와아. 사방이 다시 떠들썩해진 찰나. 파란 띠의 우승자가 대칸을 향해 말했다.
“잠시, 대칸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씩씩한 목소리에 금세 주변이 조용해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대칸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제 무례와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대칸.”
“무례라니? 무슨……?”
순간, 모두의 눈앞에서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파란 띠의 무사가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휘익.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그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겉에 입고 있던 풍성한 겉옷을 벗어내자 곧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단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 맙소사. 여자잖아?”
“뭐야? 여자가 활쏘기와 말타기에서 우승을 했다고?”
모두가 너무도 놀라 얼어붙은 사이.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은 대칸이 물었다.
“넌 누구냐?”
그, 아니 그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구림 부족의 공주 연제야입니다.”
두 종목의 우승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공주란 말에 다시금 소란이 일었다.
대칸이 손을 들어 모두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연제야. 네 어찌하여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 이 일에 대해 네 아비도 알고 있느냐?”
“아닙니다. 아버지와 다른 저희 부족 분들은 이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전 정당히 경쟁에 참여했고 다른 군사와 무사들을 이기고 제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당하다, 라……. 모두를 속인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느냐?”
그녀가 지지 않고 항변했다.
“저도 압니다, 무림제에는 사내들만 참여한다는 걸. 하지만 아무도 여인이 참여해선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여인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앞으로도 그러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연제야.”
“나라가 위험하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은 남녀의 구별이 없다 생각하는데,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제아무리 뛰어나도 여인은 여인이란 이유만으로 앞에 나서면 안 되는 것입니까?”
“…….”
“제게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여인인 저를 이리 뛰어나게 만드신 천신께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너무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대칸의 입에서 시원스러운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그래, 네 말이 옳다! 네 주장에 어디 하나 그른 곳이 없으니 더는 널 나무랄 수 없겠구나.”
그가 흡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천신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많은 인재를 보내 주셨구나. 지략이 뛰어난 자에, 기개가 남다른 너까지. 앞으로 우리 기탄이 더욱 강성해질 모양이다.”
대칸이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다들 잘 들어라. 올해 최고의 용사는 구림 부족의 공주 연제야다. 기탄의 사내들은 앞으로 더욱 기량을 갈고닦는 데 힘써야겠다. 여인들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말이다. 알겠느냐?”
“예.”
“예, 대칸.”
여기저기서 머쓱한 답이 돌아왔다.
대칸의 시선이 다시금 연제야를 향했다.
“연제야. 올해 축제의 첫 춤은 사내가 아닌 네가 시작해야겠구나. 내, 네게 춤 상대를 정할…….”
연제야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칸의 말을 막았다.
“저기, 그 전에……. 대칸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라니?”
“검독수리인 대도위와 겨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