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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63화 (63/116)

63화. 서툰 우정 2

* * *

발리안은 치기 어리고 순수했던 소년 시절의 추억,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연제준은 발리안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때론 동생 같고 때론 친구 같았다. 그걸 알아서인지 발리안도 뾰족하게 굴망정 연제준을 피하지 않았다.

티격태격, 귀찮아하면서도 일일이 대거리를 했다. 어느 때 보면 그걸 즐기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형제들을 대하는 걸 보면 더욱 분명해졌다.

발리안에게 있어 형제는 남보다 못한 존재였다. 그가 허물없이 대하는 것도, 그를 편견 없이 대하는 것도 오직 연제준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 평생 친구 하는 거다.」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툰 우정을 이어오고 있었다.

‘효령인가 뭔가 하는 놈이 여자라는 걸 전혀 모른다 이거지? 그렇담 잘됐군.’

연제준은 발리안에게 효령의 정체에 대해 알려 주려던 생각을 바꿨다.

발리안에겐 미안하지만, 연제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었다.

‘난 네 녀석이 좋다, 리안. 그래서 널 꼭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어. 허올란을 얻은 것처럼.’

연제준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며 물었다.

“너…… 절도 칸이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는 짐작하고 있겠지.”

“그러잖아도 기분이 더러워서 그 목을 비틀어 버릴까 생각 중이다. 어디서 그런 끔찍한 발상을…….”

“그러게. 널 죽이기는커녕 사위로 삼으려 하다니, 의외였어. 그 노인네 원래부터 그렇게 머리가 좋았었나?”

“머리가 좋은 건 그쪽이 아니라 황후마마지. 날 옴짝달싹 못 하게 자기 편에 묶어 두고 감시하려는 속셈이다.”

“역시……. 대칸께서 네 녀석을 곁에 두고 싶어 하신단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러려고 짝부터 지어 주려 하시는 거고.”

후. 발리안이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잖아도 이곳 주도에 도착했을 때, 대칸이 그를 불러 당부한 말이 그것이었다.

「무림제가 끝나는 대로 적당한 여인을 찾아 혼인해라, 발리안.」

「예?」

「내 기력이 예전 같지 않구나. 한데 발타고는 영 못 미더우니. 혼인 후 여기 남아 날 도와다오.」

「하지만 대칸. 발타고 형님께선 제가 여기 남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실…….」

「기탄의 대칸은 그놈이 아니라 나다, 발리안.」

「전 아직 안야국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혼인 생각도 없고요. 저 같은 놈을 세상에 또 남기는 것도 싫습니다. 전 그저 기탄과 대칸을 위해 일하다…….」

대칸은 일언지하에 발리안의 청을 거절했다.

「이번만은 나도 양보 못 한다, 발리안. 네 녀석이 정 싫다면 내가 직접 상대를 고를 테니 그리 알아라. 이건 명령이다.」

「대칸.」

「요즘 부쩍 꿈에 네 어미가 보인다. 죽어 네 어미를 만났을 때, 나도 오라비로서 할 말이 있었으면 싶다. 그리 알고 물러가라.」

그러고 보니 하투 칸이며 절도 칸이며, 이래저래 그들과 얽히는 바람에 내내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당장 무림제가 코앞인데 이 일을 어찌 해결할지…….

툭. 연제준이 상념에 잠긴 발리안의 옆구리를 쳤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

“뭘?”

“혼인.”

“생각 없다.”

“그딴 말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거 알잖냐? 그래서 말인데…… 우리 연제야는 어떠냐?”

“뭐?”

“너 그 녀석 못 본 지 오래됐지? 벌써 다 컸다. 얼굴도 성격도 끝내줘.”

“미친…….”

“내 누이지만 연제야는 여느 여인들과는 달라. 통도 크고 배짱도 여간 아니거든. 그 녀석이라면 첩이나 수하 몇쯤 가까이 둔다고 난리 칠 일도 없을 거다. 어떠냐?”

“꿈 깨라. 너랑 이렇게 엮이는 것만도 지긋지긋한데 진짜 가족이 되자고? 하늘이 두 쪽 나도 싫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잘 생각…….”

“됐다. 더는 할 말 없으니 그만 헤어지자. 네놈 얼굴을 오래 보고 있었더니 속이 다 울렁거린다.”

에누리 없이 대화를 끊어버린 발리안이 말에 올라탔다.

“웬만하면 다시 보지 말자.”

여느 때와 똑같은 인사를 남긴 그가 순식간에 푸른 풀밭으로 달려 나갔다.

훗.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연제준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어렸다.

“글쎄 그게 뜻대로 되어야 말이지. 그러게, 누가 너더러 그렇게 잘생기라고 했냐? 연제야가 널 신랑감으로 찍었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그 녀석 고집이…….”

우우. 연제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문득 발아래에서 작은 돌멩이를 발견한 그가 그것을 집어 돌무덤 위에 던졌다.

“미안하지만 이것으로 우린…… 곧 진짜 가족이 될 거다, 리안.”

* * *

풀 끝마다 방울방울 맺힌 밤이슬이 은구슬처럼 아름다웠다. 짙고 어두운 하늘 위로 어느새 꽃노을이 밀려들었다.

쏴아, 나무 사이를 스친 바람이 야트막한 언덕 위로 내달렸다.

둥둥둥.

청명한 가을의 첫째 날 이른 새벽. 무림이라 불리는 신성한 산에서 한 해를 지켜주신 천신께 올리는 감사의 제사 의식이 시작되었다.

둥둥둥둥.

둥둥둥둥.

제물로 바쳐진 사슴을 태운 연기가 푸른 신록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산 중턱에 마련된 돌 제단 앞으로 나아간 대칸이 그 위에 술이 담긴 잔, 세 개를 바쳤다. 각각 하늘과 땅,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촤악, 촤악.

기도를 마친 천군이 술잔을 들어 하늘에 뿌렸다. 그사이, 대칸을 비롯하여 다섯 부족을 이끄는 칸들이 제단 주위를 세 바퀴씩 돌았다.

그리고 돌을 주워 제단 옆 돌무덤 위에 올려놓았다.

한 시진에 걸쳐 이어진 긴 제사가 끝날 무렵, 어느새 하늘 저편이 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둥둥둥.

의례를 마친 대칸과 칸들이 정해진 자리에 착석한 가운데, 드디어 무림제의 꽃, 무예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힘찬 북소리가 울렸다.

앞으로 3일간. 이 자리에서 기탄 최고의 무사를 뽑는 필사의 격전이 벌어질 터였다.

뿌우.

긴 호각 소리를 신호로, 각 부족을 대표하는 기수들이 깃발과 함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대칸의 중앙군을 의미하는 것이 노란색. 하투의 빨간 기와 구림의 파란 기, 절도의 하얀 기와 막계의 검은 기. 그리고 그 옆에 연갈색의 깃발이 하나 더 있었다.

“저 연갈색 깃발은 어느 부족 거예요, 시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효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 그건 대칸과 같은 차뉴 부족.”

“그런데 왜 다른 깃발을 써요?”

“그건 대칸의 친동생이신 차뉴 칸이 다스리는 곳이라서 그래. 같은 부족이지만 통치자가 다르니까.”

시타가 설명하는 순간, 대회 참가자들이 줄을 맞춰 절도 있게 걸어 들어왔다. 각기 정해진 색깔의 허리띠를 둘렀기에 어느 부족인지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와아!

와아아아!

초원을 둘러싼 구경꾼들이 자기 부족의 참가자들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와아! 모두들 힘내요!”

효령도 시타, 교기와 함께 그에 질세라 힘껏 목청을 높였다.

발리안의 수하들은 대칸의 군사들과 같은 노란 기의 대열에 섞여 있었다.

‘대장도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발리안은 다른 칸, 세자, 중신들과 함께 경기를 보게 되어 있었다. 호독니는 대회에 참가한 수하들을 인솔하느라 자리를 비웠다.

“시작하라!”

대칸의 명과 함께 군사와 무사들이 경기를 위해 정해진 자리로 이동했다. 시타가 효령에게 경기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첫날은 활쏘기, 둘째 날은 격투, 셋째 날은 말타기 시합이 벌어져. 그중 활쏘기가 제일 경쟁이 심하고, 위험한 건 격투, 제일 인기 있는 건 말타기야.”

“그럼 오늘은 활쏘기겠네요. 대장 수하들은 기탄 최고의 군사들이라고 했으니까 우승하기 어렵지 않겠죠?”

“아니.”

뜻밖에도 시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싸움할 때 얘기고. 경기와 전투는 엄연히 달라. 기탄 사람들은 너나없이 활쏘기나 말타기 명수라서, 대장처럼 특출난 경우를 제외하곤 최고와 최하의 실력 차가 거의 없어.”

“그래요?”

“오죽하면 우승과 꼴등은 운수 차이란 말이 다 있겠냐? 그래서 무예 대회를 앞두곤 너도나도 용한 무당을 찾아간다니까. 부적 만들러.”

“아.”

“활은 예선에서 열 발, 중간 단계에선 다섯 발, 결승에서는 딱 세 발만 쏴. 결승 땐 과녁의 거리가 엄청 멀어. 기탄 사람이 아니면 눈에 안 보인다고 할 정도로.”

걷는 대신 늘 말을 타고 달리는 기탄 사람들에게 있어 눈썰미와 시력은 매우 중요했다. 찰나에 스치는 풍경 속에 숨은 적과 사냥감을 발견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발리안이 자신은 매의 눈을 가졌다고 한 것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모두들 세 경기에 다 참여하나요?”

“아니. 보통 하나만. 진종일 이어지는 경기를 3일 내내 치르려면 어지간한 체력으론 어림없거든. 세 군데에서 다 대표로 뽑히기도 어렵고. 그래서 다들 대장을 무시무시하다고 하는 거야.”

“정말 그렇겠네요.”

“특히 격투 경기 후엔 완전히 나가떨어져. 회복하는 데만도 며칠이 걸린다니까.”

“아.”

“세 경기 중에 최고로 치는 게 말타기야. 말타기 우승자는 축제 때 첫 번째로 춤출 자격을 얻는데, 그때 마음대로 상대를 고를 수 있어.”

“기억나요. 언젠가 시타가 말해 줬잖아요. 대장도 우승을 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춤을 췄다고.”

“맞아. 그날 우리도 신나게 놀아보자!”

시타가 떠드는 사이, 초원 여기저기에 설치된 과녁에 탁, 탁 화살 꽂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탄 각지에서 뽑혀온 최고의 무사들이 결승전에 오르기 위해 필사의 각오로 화살을 날렸다.

“와아!”

“에잇!”

“와아아아아!”

이곳저곳에서 응원의 함성과 낙심한 탄식이 이어졌다.

“우와! 봐, 봤냐, 효령아? 이번에도 말파가 이겼어!”

“그러게요. 정말 대단해요!”

발리안의 수하 중 하나인 말파가 다른 참가자들을 차례차례 물리치는 것을 보고 효령과 시타가 신이 나 폴짝폴짝 뛰었다.

흥분한 그들의 뒤로 산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 아주 신났구나?”

그녀는 모두가 먹을 음식을 준비해 오느라 남들보다 늦게 도착했다.

산시가 나타나자 시타가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그녀에게 엉덩이를 보인 이후 가끔 나타내는 증세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산시는 느긋하게 음식을 꺼내 놓았다.

“오다 보니까 대단한 사수가 있던데. 허리에 두른 띠 색깔로 봐선 구림 부족 같더라.”

“어디, 어디?”

효령이 목을 뺐다. 산시가 멀리에 있는 파란 띠의 무사를 가리켰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체격이 작은 편인데 어쩜 그렇게 실력이 좋은지. 내가 보기엔 강력한 우승 후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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