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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62화 (62/116)

62화. 서툰 우정 1

* * *

‘날 이렇게 묶어 둔 걸 보면 혹…….’

지난밤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 이렇게 두려울 줄이야. 자신이 효령을 상대로 무슨 짓을 저지른 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발리안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바로 그때.

“어? 대장 깼어요?”

효령이 바스스 눈을 떴다. 잠시 눈을 비비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대장, 몸은 좀 어때요? 머리는요? 아프지 않아요? 나,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말해 봐요, 내가 누구예요?”

역시나. 그녀의 반응을 보니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하, 다행이다. 제정신으로 돌아왔네.”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효령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답답하죠? 얼른 풀어 줄게요.”

재빨리 몸을 일으킨 효령이 발리안의 손을 묶은 끈을 풀었다.

“간밤에 나…….”

그 뒤통수를 보고 있던 발리안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실수하지 않았나?”

“실수라니…… 뭐요?”

“뭐, 뭐든…….”

“음…….”

효령이 동작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주정이 좀 심했어요. 당장 절도 칸의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나서려는 걸 막느라 다와랑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다와도 같이 있었나?”

“네. 대장이 약이 든 술을 마신 것 같다면서……. 걱정된다고 내내 옆에 붙어 계셨어요. 새벽 일찍 궁에 가시기 전까지…….”

그제야 겨우 발리안의 얼굴이 풀어졌다.

“근데 내가 여긴 어떻게 돌아온 거냐?”

“구림의 세자 저하께서 비틀거리는 대장을 발견하셔서는 우리 쪽에 알려주셨대요.”

“뭐? 연제준 그놈이?”

발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그놈의 도움을 받다니.

끄응. 발리안이 앓는 소리를 내는 사이. 효령이 탁자 위에 놓인 녹두 물을 가져왔다.

“이거 마셔요. 해독에 좋은 거라면서 다와가 가져왔어요.”

발리안이 막 대접을 받아든 순간, 밖에서 시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효령아. 일어났어?”

“네, 시타. 들어와요.”

곧 문이 열리고 시타가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발리안이 물었다.

“군사들 훈련은?”

“걱정 마요. 호독니가 시키고 있으니까. 자기가 잘 알아서 할 테니 대장은 아무 걱정 말고 오늘 하루 푹 쉬래요. 그렇게 상한 얼굴로 나타나면 군사들 사기 떨어진다고.”

하. 무림제가 코앞인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발리안이 못마땅한 얼굴로 대접을 비웠다.

“그보다 대장. 나 할 말 있는데……. 화내지 마요.”

시타가 미적거리며 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구림의 세자 저하 얘길 할 거거든요.”

“연제준 그놈이 왜?”

“아까 음식 재료를 구하러 나갔다 온 녀석이 그러는데, 글쎄 절도 칸의 숙영지가 지금 발칵 뒤집혔다지 뭐예요. 바로 그 세자 저하 때문에요.”

“무슨 일로?”

“지난밤 연제준 저하께서 술에 취해서 궁려를 잘못 찾아 드셨는데……. 아 글쎄, 거기가 절도 칸께서 끔찍이도 아낀다는 허올란 공주님의 처소였다잖아요.”

“……!”

효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허올란이라면……. 절도 칸이 발리안에게 미약을 먹이면서까지 붙여주려 했다는 상대였다.

“오늘 아침 절도 칸께서 공주님 처소에 들었다가 두 사람이 홀라당 벗고 뒤엉켜 있는 걸 보고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잖아요.”

“뭐?”

“부랴부랴 잠에서 깬 세자 저하가 자기 실수니까 책임지겠다고 나선 걸 절도 칸이 필요 없다면서 쫓아냈다는데……. 어쩌겠어요? 이미 소문이 날 데로 다 났는데. 거기다…….”

“……?”

“평소 순하던 공주님이 후궁 끄트머리 자리여도 좋으니 그분과 절대 못 헤어진다고 울고불고 야단이라나 뭐라나. 암튼 지금 거긴 시끌벅적하니 완전 쑥대밭이 됐대요.”

어쩜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을 수가……. 효령의 말문이 막혔다.

연제준, 이 약아빠진 사내 같으니라고. 평소 허올란 공주에게 침을 흘리고 있었다더니, 발리안을 도운 것이 결국은 자기 잇속을 채우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곳에 그딴 옷을 입고 나타나다니, 너 제정신이야? 게다가 지금 이 옷차림…….」

어제 다와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효령은 발리안이 앵속에 취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마도 그의 환각 속에 나타난 자신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터. 어쩌면 발리안이 본 것은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더 낯 뜨거운 모습일지도 몰랐다.

거기 생각이 미치니 부끄러운 동시에 한편으로는 기뻤다. 도통 내비칠 줄 모르는 발리안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 같아서. 그 역시 자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충격적인 일을 겪었음에도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는 것 역시 발리안의 말 때문이었다.

「당장 여기서 나가. 내가 미친 짓을 하기 전에 얼른…….」

「이…… 이런 식으로 널 안고 싶지 않…….」

하. 효령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마음을 준 사람이 연제준과는 달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 발리안을 다른 여인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도와준 다와가 새삼 고마웠다.

효령이 슬그머니 발리안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마를 한껏 구긴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근사해 보였다.

어제까지는 그의 마음을 몰라 홀로 전전긍긍이었지만 이제부턴 아니었다.

‘대장을 지키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두고 봐. 난 절대 대장을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누구와 나누지도 않을 테니까. 평생 나만 바라보게 만들 거야.’

효령이 주먹을 움켜쥐며 다짐하는 찰나. 발리안이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시타. 당장 연제준에게 좀 다녀와. 내가 보잔다고. 숲속 돌무덤 앞으로 나오라고 해, 혼자.”

“알았어요, 대장.”

시타가 급히 궁려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몸으로 괜찮겠어요?”

“내 몸이 어때서? 아무렇지도 않아.”

시퉁하니 대답한 발리안이 겉옷을 집어 들었다. 효령이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럼 나도 같이 가요.”

“안 돼.”

발리안이 에누리 없이 거절했다.

“앞으로 연제준 그놈이 있는 곳은 어디든 따라오지 마. 이건 명령이야.”

순식간에 발리안이 밖으로 사라졌다.

* * *

짙푸른 초원을 가로지른 말 한 마리가 야트막한 숲 언저리에 들어섰다.

휙휙 스치는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높이 솟은 돌무덤이 보였다.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쌓아 둔 돌무더기 위엔 신령한 장소임을 알리는 푸른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그림 같은 사내가 말과 함께 서 있었다.

휘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낸 연제준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오래 기다렸냐?”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발리안에게 다가갔다.

“미친놈.”

“또 시작이네. 리안, 난 널 좋아하는데 넌 왜 그렇게 날 싫어하냐?”

“그걸 몰라 묻냐, 인마?”

“모르니까 묻지.”

“그럼 이번 기회에 알아 둬라. 연제준, 너랑 내 차이가 뭔 줄 아냐?”

“글쎄. 넌 뽀얗게 잘생겼고, 난 건강하게 잘생겼고?”

연제준이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생긴 걸로도 실력으로도 넌 날 못 따라와. 갖다 붙일 걸 갖다 붙여야 들어주든 말든 하지.”

“하.”

“너와 내 결정적 차이는…… 난 그냥 나쁜 놈이고, 넌 남을 위하는 척하는 나쁜 놈이란 거다. 네놈 정말 재수 없어.”

으윽. 연제준이 화살에 맞은 시늉을 하며 비틀거렸다.

“매정한 놈.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나 무지하게 상처받았다.”

“그게 지금 상처받은 놈 낯짝이냐? 내 보기엔 간밤에 너무 힘을 써서 누렇게 뜬 얼굴이고만. 약은 내가 먹었는데 왜 네놈이 미친 척이야?”

“캬.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냐?”

연제준이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그 꼴이 못마땅했는지 발리안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나한테 고맙단 말은 기대하지 마라. 날 이용해서 네놈 잇속 챙긴 걸 생각하면…….”

연제준이, 부르르 치를 떠는 발리안의 어깨에 겁도 없이 손을 얹었다.

“이거 왜 이러시나. 친구끼리 돕고 살아야지.”

“네놈이 왜 내 친구야? 게다가…… 네놈을 도와서 내게 남는 게 뭐가 있다고?”

“없긴 왜 없어? 네겐 령이 있잖아. 함부로 안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도 소중한 령. 그놈…….”

연제준이 발리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제 연회 내내 네 옆에 앉아 있던 그 야리야리한 놈이지? 내기에서 이겨 절도 칸 코를 납작하게 만든 녀석.”

“……!”

빌어먹을! 발리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역시, 어제 이 재수 없는 놈 앞에서 아무래도 말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연제준이 발리안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의 오랜 우정을 생각해 그쪽은 절대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사랑스러운 우리 허올란만큼은 아니지만, 그쪽도 꽤 봐줄 만하던데. 잘해 봐라, 리안.”

“내가 너냐? 잘해 보긴 뭘 잘해?”

“뭐야? 너 설마……!”

가느다란 눈으로 발리안을 바라보던 연제준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니까. 아이고, 이 순진한 놈.”

세상에, 그렇게 옆에 끼고 돌면서도 상대가 여자라는 걸 아직 눈치 못 채다니.

이놈, 완전 바보 아니야?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발리안. 연제준의 나이 열 살 때 처음 보고 반해 버린 첫사랑. 관심을 표현한답시고 짓궂게 굴었다가 두 살 어린 그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다.

얼굴은 묵사발에 쌍코피까지 터지고 여기저기 피멍이 들었다. 하지만 다친 몸보다 더 아팠던 건 마음이었다.

세상에, 저 예쁜 아이가 여자가 아니라 사내 녀석이라니. 발리안과 혼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좌절했던지.

연제준은 첫사랑의 상처로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다.

「왜 그렇게 느끼하게 쳐다봐? 또 얻어터져 볼래?」

그 후 발리안은 쑥쑥 자랐다. 다시 볼 때마다 몰라보게 키가 커 있었다. 한 가지 달라지지 않은 점이라면 까칠한 그 성격뿐.

그럼에도 연제준은 여전히 발리안이 좋았다. 물론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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