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간교한 음모 7
* * *
시타를 궁려에 들여보내고 얼마 후. 교기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던 산시는 뜻밖에도 멀리서 발리안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덩치 큰 사내 둘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한데 그 모양이 꼭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와, 왕자님.」
발리안이 위험에 처했다 판단한 산시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사내들은 발리안을 외진 곳에 있는 한 궁려 앞으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사람의 출입을 막는 붉은 천이 묶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제외하고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다 왔습니다. 여깁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가 궁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쪽은 등불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겨우 보이는 것이라곤 바람에 아른거리는 희미한 화로의 불빛뿐이었다.
다른 사내가 발리안을 억지로 그곳에 밀어 넣으려는 순간. 그 뒤쪽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들, 여기 있었나? 절도 칸께서 급히 찾으시네. 어서들 가 보게. 서둘러!」
「그, 그래? 알았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사내가 그예 발리안을 궁려 안으로 떠밀었다.
「드시지요, 대도위님.」
그래놓고 그들은 황급히 몸을 돌려 어둠 속을 달려갔다.
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저절로 닫히기 시작했다.
‘아, 안 돼요, 왕자님.’
산시가 발리안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발리안의 팔을 낚아채 밖으로 끌어당겼다.
쿵. 그들의 뒤로 궁려의 문이 저 홀로 닫혔다. 그림자는 발리안을 끌고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교기 오라버니?’
산시는 서둘러 그들을 쫓아갔다. 그림자는 발리안을 둘러업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숲 쪽으로 데려갔다.
발리안의 키와 체격이 큰데도 어려움 없이 그를 옮길 만큼 단단한 몸집의 인물이었다.
숲에 다다른 그림자가 발리안을 커다란 나무 기둥에 기대어 놓았다.
「너. 나한테 빚졌다, 리안.」
목소리를 듣고서야 산시는 그가 교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잠시 후, 구름을 벗어난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얼굴은 바람둥이로 유명한 연제준, 구림의 세자였다. 팔짱을 낀 그가 비소를 머금은 채 발리안을 향해 이죽거렸다.
「그러게, 사람이 깨끗하게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니까. 적당히 여자도 품고 즐길 줄도 알아야 이런 일을 안 당하지. 혼자 고고한 척 굴더니, 꼴 좋다, 자식.」
발리안은 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댄 채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잘난 놈이 이럴 때 보면 꼭 바보 머저리 같다니까.」
「…….」
「절도 칸이 널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건 아나? 오늘 연회에 나와 다른 부족의 세자를 청했다는 건 순 개소리다. 난 초대받은 적 없어.」
연제준이 발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발리안 옆에 털썩 주저앉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이번 무림제 우승은 우리 부족에서 차지할 거거든. 그러기 위해선 다른 부족의 전력을 살려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 뭐, 다른 이유도 좀 있고. 그래서 몇 놈 풀어 놨지, 여기저기. 물론 네 쪽에도.」
「…….」
「절도 칸이 내 이름을 팔았단 소리를 들었을 때 딱 감이 왔지. 그 작자 뭔가 꿍꿍이가 있구나. 내가 또 네 일이라면 그냥 못 넘기잖냐? 그래서 지나는 길에 들렸다고 뭉개고 앉아 있었다.」
훗. 웃음을 터뜨린 그가 발리안의 뺨을 두드렸다.
「순진한 놈. 아직도 제가 무엇에 당한 줄 모르는 모양이군. 야 인마. 너 오늘 반강제로 총각 딱지 뗄 뻔했어. 아냐?」
「…….」
「물론 상대는 말 그대로 끝내주는 미인이야. 오래전부터 내가 침을 흘리고 있던 여자. 나 말고 재수 없는 발타고 태자도 한동안 몸이 달았었지. 황후마마 반대로 억지로 마음을 접었지만.」
「…….」
「절도 칸에겐 네놈 대신 내가 복수를 해 주마. 널 건드린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근데…….」
연제준이 야릇한 눈길로 발리안을 바라보았다.
「너 정말 지독하다? 반응이 일어나도 진작 일어났어야 하는데. 내가 지난번에 서역 상인들과 어울리다 멋모르고 그게 든 술을 마셔봐서 아는데…….」
「…….」
「그날 내가 하룻밤 사이 기녀를 몇 명이나 품었는지 아냐? 들으면 놀라 기절할 거다. 너 같은 놈은 아마 상상도 못 할걸?」
순간, 발리안이 입에서 짓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령.」
「령?」
「당…… 장 도, 돌아가.」
「드디어 시작이냐? 큭, 재미나네. 역시 이놈은 놀려먹는 맛이 있다니까. 그래, 나 령이다. 돌아가라니, 어딜? 어디로 돌아갈까? 네 침상?」
「어, 얼른…… 하아.」
발리안이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었다.
「이…… 이런 식으로 널 안고 싶지 않…….」
「어라? 이놈 진짠가 보네.」
연제준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말해 봐라, 령이 누구냐? 예쁘냐? 몸매는……!」
말을 하다 말고 연제준의 눈이 커다래졌다. 발리안이 그의 목을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워워, 진정해, 인마.」
미간을 찌푸린 연제준이 애써 발리안의 얼굴을 밀어냈다.
「너. 내가 어릴 적에 네 입술 좀 훔쳤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하기냐? 그러게, 누가 사람 헷갈리게 계집애처럼 예쁘게 생기래? 네놈이 내 첫사랑인 건 맞지만, 지금은 아니다. 징그럽다고!」
연제준이 목을 뒤로 뺐지만, 인사불성이 된 발리안이 막무가내로 그를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이 자식이!」
발리안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다 싶었는지, 급기야 연제준이 그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퍽. 느닷없는 공격에 발리안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재빨리 그의 몸을 받친 연제준이 발리안을 얌전히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는 산시가 숨어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어이, 거기! 빨리 나와서 이놈 챙겨.」
「예? 예.」
얼결에 놀란 산시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럼 이놈은 네게 맡기고 난 간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말이다.」
씨익, 매력적인 미소를 남기고 연제준은 순식간에 자리를 떠났다.
다와의 이야기를 들은 효령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조금 전 발리안이 자신을 상대로 한 일을 하마터면 다른 여인과 벌일 뻔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리만큼 기분이 나빴다.
“끝내주는 미인이라니…… 누구 짐작 가는 사람, 있으세요?”
“아마…… 허올란 공주님일걸. 지금 절도 칸의 숙영지에 머무는 사람 중 미인이라 할 만한 사람은 그분 한 분뿐이야.”
“공주요?”
황제의 딸만을 공주로 칭하는 안야국과 달리 기탄은 황제와 왕의 딸 모두를 공주로 칭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절도 칸이 후궁 몸에서 본 딸이야. 어머니가 기녀 출신이라 다들 무시하지만, 언젠가 귀히 써먹을 수 있을 거라며 절도 칸이 애지중지한단 소릴 들었다.”
“대장이 여기 있다는 건 절도 칸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얘긴데……. 그럼 그 공주님은 어떻게 되나요?”
“그야 나도 모르지. 그보다…… 여긴 위험하니까 나와 함께 가자, 효령아. 오늘 밤은 왕자님을 혼자 두는 게 좋겠어.”
“아뇨. 저 여기 있을래요.”
효령이 고개를 저었다.
“대장을 혼자 두고 가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안야국 앵속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다와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라, 그럼. 대신 이번엔 왕자님 두 손을 다 단단히 묶어 놓자. 섣불리 풀지 못하게……. 혹시 모르니 나무쟁반도 여기 두고 갈게. 그럼 안심이지?”
그제야 효령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마워요, 다와.”
“고맙긴……. 우리 왕자님을 이해해 줘서 내가 더 고맙구먼. 그럼…….”
침상에서 일어선 다와가 한쪽 구석에 놓인 낮은 장에 가 효령이 입을 새 옷을 꺼내왔다.
“이것만 주고 난 가 보마. 앵속을 해독하는 데는 녹두가 좋다고 하더라. 기탄엔 나지 않는 것이라 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 저기 탁자 위에 달인 물을 두었으니까 깨시거든 드시게 해.”
효령의 어깨를 다독인 다와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참! 무언가가 생각난 듯 그녀가 발을 멈췄다.
“효령이 너…… 그거 아니?”
“네?”
“환각이란 건, 평소 두려워하거나 간절히 원하던 게 나타나는 거라더라. 아무래도 우리 왕자님…… 널 많이 좋아하시나 보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그 말을 끝으로 다와는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효령의 얼굴에 발간 화로의 불빛이 아른거렸다.
* * *
“……!”
아침을 훌쩍 넘긴,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 되어서야 발리안은 겨우 눈을 떴다.
뭔가에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온몸이 찌뿌듯하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게다가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기까지.
“이게 뭐……!”
그의 시야 안으로 죄인처럼 침상에 묶여 있는 두 손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 있었던 일을 떠올린 발리안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망할 놈의 절도 칸. 뿔잔 안에 미리 가루로 된 미약을 넣어 두다니. 그러고는 내 앞에서 보란 듯 술을 따라 건넸단 말이지.’
제아무리 적이라도 손님으로 와 있을 때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초원의 법이었다.
이왕에 법을 어길 거면, 차라리 칼을 뽑아 들고 덤빌 일이지. 설마하니 절도 칸이 기탄의 사내라면 누구나 경멸할 그런 천박하고 저질스러운 방법을 쓸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다.
애초에 그런 못 믿을 작자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발리안이 미약에 당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증상이 나타난 후였다.
온몸에 후끈 열이 오르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대로 된 사고가 어려워지면서 호흡마저 가빠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문득 효령이 나타났다.
그것도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으로.
“……!”
그때를 떠올린 발리안이 숨을 멈췄다. 띄엄띄엄 떠오르는 기억 속엔 그보다 더 자극적인 것도 있었다.
언젠가 요희가 입고 있었던 것과 같이 속이 다 비쳐 보이는 침의 차림의 효령. 가느다란 팔로 가슴을 가리며 수줍게 웃던 그 모습이 어찌나 아찔하던지. 다른 것들은 다 흐릿한 중에도 그 장면만은 여전히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맙소사……!
당황한 그가 재빨리 옆자리로 눈을 돌렸다. 추운지 한껏 몸을 웅크린 효령이 저만치 아래 잠들어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이 보았던 것이 환각에 불과했음을 확인하자 안도와 동시에 왠지 모를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사내 녀석을 상대로 내가 무슨 생각을…….’
머릿속에 든 불순한 형상을 지우려 발리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