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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60화 (60/116)

60화. 간교한 음모 6

* * *

“……!”

너무도 놀란 효령이 돌처럼 굳었다.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곳에 그딴 옷을 입고 나타나다니, 너 제정신이야? 게다가 지금 이 옷차림…….”

발리안이 효령의 손목을 뿌리치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당장 여기서 나가. 내가 미친 짓을 하기 전에 얼른…….”

“대, 대장. 그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내가 여, 여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당황한 효령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충격이 너무도 큰 탓에 삽시간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어질했다.

그녀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발리안의 이마가 땀투성이라는 것, 그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효령은 발리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대장. 어, 어서 말해 봐요. 왜 내가 여자라고 생각…… 으읍!”

그러나 효령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쾅.

순식간에 그녀를 침상에 쓰러뜨린 발리안이 효령의 입술을 덮쳤다.

‘대, 대장…….’

곧 정신을 잃을 만큼 아찔한 감각이 그녀를 뒤덮었다.

발리안과 했던 첫 번째 입맞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광폭하고 격렬한 느낌이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느낀 찰나,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효령의 겉옷과 안의 저고리가 동시에 뜯겨 나갔다. 눈처럼 뽀얗고 가녀린 어깨는 물론 천으로 꽁꽁 동여맨 그녀의 가슴이 무방비로 드러났다.

“아!”

발리안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효령의 비명마저 무자비하게 삼켜버렸다. 거침없는 혀가 그녀의 입안을 멋대로 헤집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는 더 이상 효령이 아는 발리안이 아니었다.

불타는 갈증으로 미쳐버린 짐승처럼 그는 효령의 목과 어깨를 빈틈없이 물고 빨았다.

효령이 발버둥을 치며 저항했지만, 제정신이 아닌 그를 밀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발리안에게 눌린 가녀린 몸이 파드득, 겁에 질려 떨었다.

“이, 이러지 마요, 대장…….”

효령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발리안을 좋아하지만, 그를 위해선 언제고 내줄 수 있다 생각한 몸과 마음이지만 이런 식은 싫었다.

효령의 새하얀 살결 여기저기에 원치 않는 열꽃이 피었다.

‘…….’

그녀는 아랫입술을 사리물어 당장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삼켰다.

아무리 원치 않는 일이라 해도 발리안의 실수를, 자신의 비밀을 남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오늘 이 장면을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영원한 이별뿐.

‘대, 대장 제발…….’

발리안의 손이 효령의 가슴을 가린 천에 닿은 순간.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효령의 두려움을 대신하는 눈물이 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디 제가 소릴 지르지 않게 해 주세요.’

효령이 작은 두 손으로 양털 이불을 힘껏 움켜쥔 찰나.

딱, 하는 매운 소리가 궁려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털썩. 발리안의 커다란 몸이 힘없이 옆으로 널브러졌다.

“괜찮니, 효령아?”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에 효령이 번쩍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무거운 나무쟁반을 든 다와가 들어왔다.

“다, 다와……!”

효령의 눈에서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졌다. 다와가 얼른 그녀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놀랐니? 내가 조금 더 빨리 돌아왔어야 했는데…….”

다와가 떨고 있는 효령의 등을 다독였다.

“미안해, 효령아.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다와는 발리안을 대신하여 수도 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마치 그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 따뜻하고 진심 어린 사과에 어느새 효령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효령이 울먹이며 말했다.

“다와. 대장이 제가 여자란 사실을 안 것 같아요. 어떡…… 하죠?”

다와가 효령의 몸에 양털 이불을 걸쳐주며 말했다.

“아니야. 왕자님은 네가 여자란 사실을 몰라.”

“아뇨. 조금 전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

“내 짐작이 맞다면 왕자님은 지금 앵속을 드셨어. 왕자님이 보신 건 모두 환각이야.”

“네? 앵속요?”

앵속(양귀비)은 붉고 화려한 꽃이 특징인 식물이었다. 덜 익은 열매의 유액(乳液)을 굳혀 만든 약재는 환각 작용을 일으켜 사람을 몽롱하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때문에, 안야국 후궁들이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미약으로 애용하곤 했다. 그걸 쓰면 마치 천상에 있는 듯한 황홀감과 성적 절정감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쉽게 중독되는 데다 양을 조절하지 못하면 단 한 번의 복용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기탄에서도 앵속을 쓴단 말이에요?”

효령이 놀라 물었다.

“그게…….”

후우. 다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탄에도 ‘피꽃’이라 불리는 비슷한 꽃이 있긴 하지만, 그런 효능은 없어.”

일상이 곧 전쟁인 기탄에선 미약 따위가 발붙일 틈이 없었다. 약 자체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없는 데다 방심은 곧 죽음이라는 위기의식이 강해 약에 취해 비틀거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요?”

“기탄에 앵속이 알려진 건 불과 몇 달 전이야. 7황비마마께서 혼수로 가져오신 물품 중에 앵속이 있었거든.”

“7황비마마라면……!”

삽시간에 효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요희가 혼수로 다른 것도 아닌 앵속을 기탄에 들여오다니. 그녀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만약 대칸이 그에 중독되기라도 한다면 혼란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설마 기탄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부러……?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원치 않는 한 얼굴이 떠올랐다.

형부 상서 맹유천.

요희의 배후에 그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되었다.

“7황비께서 앵속을 뭐라 하며 가져오셨다던가요?”

“기침과 설사를 멈추고 통증을 없애는 약, 목과 뼈, 장이 아픈 데도 잘 듣는 귀한 약이라 했다더라. 대신 잘못 사용하면 크게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그걸 대칸께서도 드셨나요?”

“아니.”

다와가 고개를 저었다.

“기탄 사람은 약을 믿지 않아. 병은 악신이 준 것이라 생각해서 무당의 말을 더 신뢰하거든. 여간해선 약을 먹는 일이 없어. 그런 점에서 우린 한참 뒤처졌지.”

후. 그제야 효령이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앵속은 이제껏 내내 황실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어. 한데 얼마 전…….”

탈이 심하게 난 한 무사가 다급한 마음에 앵속을 먹었다가 환한 대낮에 궁녀와 낯 뜨거운 일을 벌이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하필 그들은 황후를 모시는 무사와 궁녀였고 그 일로 두 사람은 목숨을 잃었다.

“황후마마께서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신 바람에 그 일은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어. 하지만 난 잘 알고 지내는 궁녀로부터 그 이야길 전해 들었지. 황궁 안 여기저기 내 소식통들이 있거든.”

다와가 말을 이었다.

“그 일로 황후마마는 앵속이 가진 위험한 기능을 알게 되신 게지. 이후로 황실 창고에 있던 앵속을 모두 꺼내 태워 없애셨단다. 한데…….”

“…….”

“사라졌어야 할 그 앵속이 느닷없이 다시 나타났어. 오늘 낮, 황후마마 처소에서 나오던 절도 칸이 잠깐 주머니를 떨어뜨렸는데 거기서 갈색 돌덩어리가 나왔다는 게야.”

“갈색 돌덩어리요? 가루가 아니고요?”

효령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술에 타서 쓰는 미약이라기에 가루를 먼저 떠올렸건만.

“보통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하지만 난 오래전에 남편 모개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 그 사람 별의별 것에 다 관심이 많았거든.”

앵속의 유액을 굳혀 건조하면 갈색이나 검은색의 덩어리가 되었다. 멀리서 보면 그 모양이 꼭 돌처럼 보였다. 그것을 필요에 따라 부수거나 갈아서 미량만을 사용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늘 저녁…….”

“대장이 절도 칸의 초대를 받았단 거로군요.”

“그래. 그래서 더욱더 그 돌덩이가 앵속이라 확신하게 됐지. 그걸 쓸 상대는 바로 왕자님이고 말이야. 하지만 왕자님이 앵속에 대해 아실 리가 없으니 서둘러 산시를 보냈던 거야.”

하지만 다와는 산시에게 약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앵속에 대해 아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황후나 절도 칸이 어찌 나올지 몰라서였다.

“근데요, 다와.”

효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앵속이 사람을 황홀경에 취하게 한다고 듣긴 했는데, 대장처럼 심한 환각에 빠지는 경우도 있나요? 사람을 몰라볼 정도로요?”

“아마 그건 ‘웃는 덩굴’ 때문일 거야.”

기탄의 술이나 음료는 대부분이 동물의 젖으로 만든 것이었다. 곡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었다. 때문에, 곡물로 만든 술은 곧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곡물로 술을 빚으려 해도 거기 사용할 물의 수질이 좋지 않았다. 이때 물을 맑게 만들기 위해 넣는 것이 웃는 덩굴의 뿌리였다.

“남편 말이 웃는 덩굴의 뿌리가 앵속과 합쳐지면 최악이라고 했어. 그래서 서역에서는 그것을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그럼 절도 칸이 일부러…….”

“아니, 앵속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거기까지 어떻게 알겠니? 내 남편처럼 이상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왕자님께 일어난 일은 우연히 불행이 겹친 경우라고 할 밖에.”

“그렇군요. 근데요, 다와. 절도 칸이 왜 대장에게 앵속을 먹였을까요? 지금 대장 상태를 보면 목숨이 위험할 만큼 많은 양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해 봐. 안야국에서 앵속을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 조금 전 네가 겪은 일만 봐도 알잖니.”

“네? 그, 그럼?”

효령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래졌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왕자님에게 여인을 붙여주려던 것 같다. 왕자님의 흠을 잡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여인을 통해 왕자님을 붙들려는 것인지…….”

“…….”

놀란 효령이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틀림없어. 산시 말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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