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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59화 (59/116)

59화. 간교한 음모 5

* * *

막 궁려 밖으로 빠져나온 발리안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일행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내내 괜찮은 척 버텼지만 더는 무리였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면서 사물이 흔들려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당황한 발리안의 미간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절 초대한 절도 칸의 속내가 의심스러워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발리안은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안에서 있던 일들을 더듬었다.

‘물소 뿔잔…….’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절도 칸이 술을 따라 건넨 뿔잔이었다.

기탄에서 물소 뿔잔은 칸 이상만이 소유할 수 있는 권위와 용맹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물소 뿔에는 마취와 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들어 있었다.

물소 뿔잔에 술을 담아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약 성분이 배어 나왔다. 그 점을 이용하여 일부 나라에선 미약 대신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겨우 잠깐의 환락을 위해 권위의 상징인 물소 뿔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기탄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절도 칸은 발리안이 보는 앞에서 바로 술을 부어 건넸다. 성분이 우러나올 시간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그럼 술에 문제가 있었나? 하지만…….’

역시 그렇게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절도 칸이 내린 술을 두어 차례 마시긴 했지만, 같은 잔에 같은 술을 마신 것은 자신뿐이 아니었다.

발리안이 되돌린 잔에 절도 칸이 같은 술병의 술을 부어 연제준에게 내렸다. 연제준에게서 그 뿔잔이 다시 절도 칸에게 돌아간 이후 그 역시 같은 술을 마셨다. 그런데 자신과 달리 두 사람은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잠깐. 첫 잔의 술맛이 유독 쓴 것 같았는데 그럼 혹……!’

기탄 사람들은 어지간히 독한 술이 아니면 술 취급을 하지 않았다. 평소 마시는 유주조차 밍밍하다며 일부러 증류를 하여 도수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나온 곡주는 최고였다. 목구멍에서 불이 나듯 독하고 썼다.

하지만 혀끝에서 그저 술맛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질적인 쌉쌀함이 느껴졌다.

‘젠장!’

순간,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발리안이 효령을 부르려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게 웬걸.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사방이 아득하니 거리 가늠이 되지 않는 데다 급기야 땅이 꿈틀거리며 발밑이 물컹거렸다. 극에 달한 어지럼증과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에 발리안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어이쿠, 대도위님!”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절도 칸의 수하들이 그를 부축했다. 덩치가 산만 한 사내 둘이었다.

“많이 취하신 모양입니다.”

“……!”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혀가 꼬이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쪽에 빈 궁려가 있는데 잠시만 쉬었다 오시지요. 멀지 않으니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그들이 발리안을 붙들고 걸음을 옮겼다. 말로는 ‘부축’이었지만 실상은 끌고 가는 셈이었다.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발리안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몇 개의 궁려를 돌고 돌아 드디어 저만치, 한적한 곳에 외따로이 서 있는 궁려가 나타났다. 그 앞에는 붉은 천이 묶여 있었다.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는 표시였다.

“다 왔습니다. 여깁니다.”

사내 중 하나가 묘한 미소를 띠며 궁려의 문을 열었다.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드시지요, 대도위님.”

몸을 떠밀린 발리안이 막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그 시각. 호독니와 효령, 시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방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좀처럼 발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뚝뚝한 호독니의 얼굴에조차 어느새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안 되겠다. 흩어져 찾자. 난 이리 갈 테니 너희 두 놈은……!”

순간, 그들의 눈앞으로 불쑥, 교기가 뛰어들었다.

“교, 교기야!”

시타가 놀라 외쳤다.

쉿. 교기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주변을 살폈다.

“교기야. 네가 여기 어쩐 일로…….”

양을 잡는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교기는 오늘 산시를 돕느라 연회에 오는 대신 숙영지에 남아 있었다. 그런 그가 이런 느닷없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교기가 궁금해하는 효령에게 말했다.

“다와가 대장이 위험에 처한 것 같다고 하길래……. 숲과 이어진 쪽의 경계가 느슨하기에 그리로 왔습니다.”

“그러잖아도 시타가 아까 산시를 만났다는데…….”

“예. 저희 둘이 같이 왔습니다. 지금 산시가 대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뭐? 정말 대장을 찾았어?”

시타는 물론 효령과 호독니의 얼굴에 당장 화색이 돌았다.

“쉿!”

모두에게 주의를 준 교기가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했다. 그가 앞장선 가운데 모두가 어둠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여기야, 여기!”

그들은, 연회로 떠들썩한 궁려와는 꽤 멀리 떨어진 숲에서 산시와 만날 수 있었다.

발리안은 마치 잠이 든 것처럼 풀밭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제야 겨우 효령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산시. 대장 괜찮은 거야? 다친 데는?”

“걱정 마, 무사하셔. 정신을 잃긴 하셨지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장, 어디서 찾았어?”

시타의 물음에 산시가 대답했다.

“구림의 세자 저하께서 도와주셨어.”

“연제준 저하? 저하께서 어떻…….”

효령이 다급히 시타의 말을 막았다.

“혹시 모르니……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여길 벗어나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교기에게 물었다.

“말 가져왔어?”

“예, 공자.”

숲속으로 달려간 교기가 곧 말을 끌고 나타났다.

“호독니, 도와줘요.”

“알았다.”

호독니와 교기,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발리안을 말에 태웠다. 호독니가 발리안이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사이, 교기가 그 앞에 올라탔다.

효령이 얼른 제 겉옷의 허리띠를 풀었다.

“호독니, 이걸로 대장 몸을 교기에게 묶어 줘요. 하나론 부족해요. 시타, 산시도 얼른 허리띠 풀어요.”

호독니가 효령과 시타, 산시가 내민 허리띠로 발리안의 몸을 교기에게 단단히 동여맸다.

“교기와 산시는 당장 대장과 함께 숙영지로 돌아가. 산시는 교기 뒤를 따라가면서 대장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살피도록 해. 서둘러.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알았어.”

호독니가 앞으로 나섰다.

“나도 대장과 같이 가…….”

“안 돼요.”

효령이 그를 말렸다.

“호독니는 나, 시타와 함께 따로 가야 해요. 그래야 절도 칸의 수하들이 우리가 돌아갔다고 믿을 거예요.”

“그, 그렇군.”

“가는 길에 대장 말도 챙겨야 하니까 우리도 서두르자고요. 가요, 시타.”

“알았어.”

호독니가 산시와 교기를 향해 손을 들었다.

“대장을 부탁한다.”

“걱정 마요, 호독니.”

고개를 끄덕인 산시와 교기가 그들에 앞서 먼저 출발했다. 그들이 나무들 틈으로 말을 달리는 것을 확인한 효령 일행도 재빨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효령과 호독니, 시타가 잰걸음으로 발리안의 궁려 안에 들어섰다.

“왔어?”

발리안의 곁에 앉아 있던 산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은 좀 어때?”

효령이 얼른 발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발리안은 사람이 오가는 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신없이 주무셔. 어머니 말씀이 아무래도 약을 탄 술을 드신 것 같대. 지금 어머니가 해독제를 구하러 가셨어.”

“약?”

호독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도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르겠어요. 암튼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지실 거래요.”

내내 어둡던 모두의 얼굴이 그제야 겨우 풀어졌다.

“그럼 대장 쉬게 방해 말고 얼른 나가자. 효령이 네가 오늘 밤 애 좀 써라.”

뚝뚝하게 말한 호독니가 앞장서 걸어갔다.

“그럼 우리도 가 볼게. 내일 봐, 효령아. 가자, 산시.”

시타가 산시의 옆구리를 찔렀다.

“안 돼. 어머니가 올 때까지 효령이랑 같이 있으라고…….”

“괜찮아, 산시. 오늘 여러 가지로 힘들었을 텐데 그만 가서 쉬어. 넌 새벽부터 또 음식 준비해야 하잖아.”

“그래. 대장도 효령이도 네가 없는 게 더 편할걸? 얼른 가자니까.”

효령과 시타의 재촉에 산시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되나 모르겠네. 그럼 효령아, 나 간다. 같이 가, 오라버니.”

산시가 시타의 옷자락을 붙들며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사라지고 방안엔 발리안과 효령 단둘만 남았다. 효령은 발리안의 수면에 방해가 될까 봐 등잔의 불을 껐다. 화로에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불빛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침상에 걸터앉은 효령이 물끄러미 발리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대장.’

약 기운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동안 발리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을 쓰라린 옛 기억들도 오늘만은 그를 침범하지 못할 터. 무탈한 발리안의 모습에 효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걸치고 있는 겉옷들이 불편했는지 발리안이 몸을 뒤척였다. 평소 윗옷을 다 벗고 자는 그이니 그럴 만도 했다.

효령이 그의 겉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간신히 한쪽 팔을 빼내고 다른 쪽 소매를 벗기려던 순간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

효령이 얼른 양털 이불을 들췄다.

세상에. 발리안의 한쪽 팔이 침상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아까 효령이 풀어 줬던 허리띠로. 그래서인지 자고 있던 발리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무의식중임에도 그는 답답함을 벗어나기 위해 자꾸만 손목을 움직였다.

‘왜 이렇게까지……!’

어리석게도 그제야 다른 데 생각이 미쳤다.

「약을 탄 술을 드신 것 같대.」

대체 산시가 말한 약이란 무얼까. 무슨 약이기에 사람을 침상에 묶어두기까지…….

효령이 생각에 골몰한 사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예 침상에 묶어둔 허리띠가 풀어졌다. 그와 동시에 발리안의 입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장,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효령이 발리안의 얼굴에 손을 대려는 순간. 탁. 발리안이 그 손을 낚아채며 눈을 떴다.

“대, 대장……!”

효령의 부름에도 발리안은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늘 이지적이고 예리하던 눈빛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마치 자신이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답을 찾는 것처럼.

“여긴 대장 처소예요. 전 효령이고요. 아까 절도 칸의 초대를 받아 갔다가……!”

절도 칸이라는 말에 발리안이 반응을 보였다.

“그래, 절도 칸……. 거기서…… 술을 마셨지.”

“맞아요. 저도 거기 같이 있었어요. 기억나요?”

“……!”

발리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효령을 노려보았다.

“그래, 너. 거기 나와 같이 있었어. 한데 어째서……!”

발리안이 효령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왜 말하지 않았지? 네가 여자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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