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58화 (58/116)

58화. 간교한 음모 4

* * *

“그래, 오랜만이다, 연제준.”

발리안이 마지못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구림 부족의 세자 저하는 잘생긴 데다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인기가 많아. 한가지 흠이라면 바람둥이라는 거? 대장보다 겨우 두 살 많은데 딸린 후궁만 벌써 열 명이 넘는단 소문이야.」

시타의 말을 떠올린 효령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꽤 준수한 인물이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발리안과 달리 그는 선이 굵고 서글서글한 호남형이었다.

게다가 안야국 왕족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옷차림이 말쑥하고 세련되었다. 머리 모양도 공들여 손질한 것처럼 보였다.

기탄 사내 중에도 저런 멋쟁이가 있다니. 효령의 입에서 절로 경탄이 새어 나왔다. 늘 옷을 함부로 던져두는 발리안과는 천양지차였다.

「근데 대장 앞에서는 절대 그분 얘긴 꺼내지 마. 대장이 질색하니까.」

「왜요?」

「미안. 그건 절대 말 못 해. 대장 흑역사니까. 너에게 말했다는 걸 알면 대장이 날 죽일걸?」

시타가 배꼽을 잡고 혼자 킥킥거렸다.

대체 두 사람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효령이 눈을 반짝이며 상상하는 사이.

“그러고 보니 세자와 대도위. 두 사람 구면이었지, 참.”

절도 칸이 입을 열었다.

“서로 반기는 모습이 보기 좋군.”

반기기는 누가……!

순간, 발리안이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에 비해 연제준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웃는 낯이었다.

“그렇습니다, 절도 칸. 저희 둘, 꽤 역사가 깊은 사이죠. 한동안 이 녀석 소식이 궁금했는데 칸 덕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담 내 오늘 연회를 연 보람이 있군그래.”

절도 칸이 어울리지 않게 다정하게 굴었다.

“실은 내 오늘, 대도위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네.”

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대칸의 연회에서 내가 저지른 실수를 용서하게. 나잇살이나 먹고도 어른답지 못하게 굴었네. 내, 그때 일을 사과하고 싶어 자네를 청한 걸세.”

후. 절도 칸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다 지난 일로 서로 마음 상해 무엇하겠나. 기탄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우리 이제 그만 과거는 떨어 버리세.”

발리안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도를 지나친 행동으로 무례하게 굴었던 것을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어허! 이러지 말게. 사과는 내가 해야 한대도. 그런 의미에서 내 술 한 잔 받게.”

절도 칸이 손수 술병을 들어 뿔잔에 술을 따랐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수하가 그것을 받아 발리안에게 전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잔을 들어 인사를 한 발리안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자, 세자도 한 잔 받게.”

절도 칸이 이번에는 연제준에게 잔을 넘겼다.

“이런, 유주가 아니라 곡주(곡식으로 빚은 술)로군요. 이렇게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칸.”

연제준이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곡물이 귀한 기탄에서 곡주를 낸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최고의 대접이었다.

“제 술도 한 잔 받으시지요.”

연회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훈훈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과 함께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효령을 향해서도 몇 번인가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얼굴을 붉히거나 시비가 붙을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효령과 발리안을 추켜세우는 칭찬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절도 칸은 과하다 싶을 만큼 발리안 일행에게 호의적으로 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긴장과 경계로 날이 서 있던 효령과 시타의 마음도 한결 누그러졌다. 내내 뚝뚝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호독니뿐이었다.

유쾌한 음악과 춤이 이어지며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가운데. 술이 약한 시타가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효령아, 나 잠깐만…….”

“어디 가요, 시타?”

“물 좀 비우러…….”

헤벌쭉 웃은 시타가 조용히 궁려를 빠져나갔다.

맑고 청량한 밤하늘엔 소금을 뿌려놓은 듯 별이 가득했다.

“어라? 하늘이 왜 이렇게 빙빙 도냐? 촌놈 주제에 곡주를 마셨더니 속이 놀랐나?”

몇 잔 술에 머리가 띵해진 시타가 비척거리며 궁려 앞을 떠났다. 연회로 오가는 사람이 많아 한적한 곳을 찾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근처 풀숲에 다다른 그가 서둘러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취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매듭이 지독히도 안 풀렸다.

“야, 좀 풀려, 풀리라고.”

다급해진 시타가 허리띠를 붙들고 진땀을 뺐다.

“사람 미치겠…… 앗, 됐다!”

한참 용을 쓴 후에야 간신히 매듭이 풀렸다.

툭. 발아래로 바지가 떨어지기 무섭게 시타가 허공을 향해 시원하게 볼일을 보았다.

“후우. 오줌보 터져 죽는 줄 알았네. 하마터면 바지에 쌀 뻔했다.”

개운함에 몸을 떤 시타가 막 바지춤을 끌어올린 찰나.

“오라버니.”

등 뒤에서 난데없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엄마야!”

소스라치게 놀란 시타가 얼결에 머리를 감쌌다. 덕분에 애써 수습한 바지가 도로 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 으아!”

찰나의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시타가 전광석화와 같이 바지를 끌어 올렸다.

술이고 나발이고, 삽시간에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다.

“너, 봐, 봤냐?”

재빨리 허리띠를 묶은 시타가 아까보다 몇 배는 더 빨개진 얼굴로 돌아섰다.

역시나. 그의 뒤에는 예상대로 최악의 인물이 버티고 있었다.

하필, 이런 꼴을 쟤한테 들키다니……. 쪽팔려 죽을 지경이었다.

“봤냐니, 뭘?”

퉁명스럽게 되물은 사람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은 앙숙, 산시였다.

“내 어, 엉…….”

어찌나 당황했는지, 시타는 산시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녀가 절도 칸의 숙영지 안에 있다는 건 보초를 선 군사들을 지나쳐 왔다는 뜻이었다. 연이은 연회와 무림제를 앞둔 흥분으로 경계가 느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시타의 뇌리에 든 생각은 오직 산시가 자신의 엉덩이를 봤느냐, 아니냐 뿐이었다.

“오라버니 엉덩이를 말하는 거라면 봤지. 허연 박 두 개를 엎어 놓은 거 같던데?”

산시의 말에 시타의 얼굴이 귀 끝까지 달아올랐다.

“야, 너……!”

“조용히 해!”

대뜸 시타에게 달려든 산시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재빨리 주변을 살핀 그녀가 시타에게 핀잔을 놓았다.

“지금 그깟 오라버니 엉덩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럼 뭐가 중요한데?’

입이 막힌 시타가 열을 받아 앙알거렸다. 산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 왕자님께 가서 전해. 절도 칸이 야비한 수를 쓸지 모르니 조심하시라고.”

“뭐?”

겨우 그녀의 손에서 놓여 난 시타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절도 칸이 대장에게 야비한 수를 쓰다니? 그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무슨…….”

“이 바보야. 여긴 힘으로 싸우는 전쟁터가 아니야.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내 말 잘 들어. 어서 왕자님께 가서 조금 전 내가 한 말을 전하고 절대 취하지 못하시게 해.”

“술이 센 대장이 취할 리가…….”

“그딴 한가한 소리 그만하라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전하라고 했단 말이야. 절대 절도 칸이 주는 술을 받아드셔서는 안 된다고. 일일이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서 전해. 어서 전하라고!”

산시가 시타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녀에게 떠밀린 시타가 연회 중인 궁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지? 대장이 이미 몇 잔은 받아 마신 것 같은데?’

산시의 엄청난 기세에 넋이 나가 그 말 하는 것을 깜빡했다.

‘암튼, 무슨 수를 써서든 대장을 구해야 해.’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사리문 시타가 바람을 가르며 속도를 높였다.

궁려 안은 신나는 연주 소리와 술에 취한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했다. 듬성듬성 빈 자리가 보이는 것이 시타처럼 볼일이 급한 사람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무림제 때문에 일찌감치 자리를 떨고 일어선 자들도 적지 않았다.

“효, 효령아.”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자리에 돌아온 시타의 얼굴이 이내 허옇게 질렸다.

효령의 옆에 있어야 할 발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타가 다급히 물었다.

“대장, 대장 어디 갔어?”

“속이 불편해서 바람 좀 쐬고 온다고…….”

그러고 보니 절도 칸과 연제준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그럼 칸 전하는?”

“절도 칸께서는 시타가 나간 후 바로 일어나셨어요. 젊은 사람들끼리 마음 편히 즐기라면서…….”

이런 젠장!

시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장이 자릴 비운 지 얼마나 됐는데?”

“일각쯤요. 같이 가려고 했는데 됐다면서…….”

“알았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한 시타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효령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시타?”

시타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얼른 대장을 찾아야 해. 지금 당장!”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호독니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효령과 시타가 잰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절도 칸의 수하로 보이는 사람이 곁으로 다가왔다.

“혹, 대도위님과 같이 오신 분들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효령의 대답에 상대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잖아도 여러분을 찾던 참인데……. 대도위님께서는 조금 전 절도 칸의 궁려에 드셨습니다. 두 분께서 중히 의논하실 일이 있어 그러니 먼저들 돌아가라고…….”

시타가 발끈하여 외쳤다.

“거짓말. 대장이 그럴 리가……!”

효령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시타, 많이 취했어요.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니까요.”

‘그러지 말아요, 시타.’

효령의 눈짓에 시타가 꾹,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효령이 다시 상대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질까요? 저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는데…….”

“밤을 새울지도 모르겠다 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빈 궁려도 많으니 하룻밤 묵고 가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효령이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대도위님께서 물으시면 저희 먼저 돌아갔다고 전해 주세요. 내일 아침 일찍 모시러 오면 될까요?”

“그럴 것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숙영지까지 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럼 대도위님을 잘 부탁드려요. 절도 칸께도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다고 전해 주시고요. 그럼 저희는 이만…….”

상대에게 인사를 한 효령이 몸을 돌렸다.

시타를 부축한 호독니가 그녀를 따라 이내 궁려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자, 내내 지켜보고 있던 상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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