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간교한 음모 3
* * *
요희가 바짝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무림제가 끝날 때까진 가만있는 게 좋겠어요. 무림제 때 벌어지는 무예 대회에서 새 우승자가 탄생하고 그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될 때…….”
“…….”
“그를 축하하는 축제가 벌어질 때, 그 소란을 틈타 일을 벌이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흐음. 듣고 보니 그렇군.”
“대도위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봐야 대칸과 태자의 신하예요. 부리는 자의 개에 불과하다고요. 게다가 어차피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조금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요희가 발타고의 귀에 훅하니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들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음껏 즐기라고 하세요.”
“하하. 으하하하하.”
발타고에게서 호쾌한 웃음이 터졌다. 뭐라도 얹힌 것처럼 답답하던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역시! 이래서 그쪽이 마음에 든다니까!”
입이 귀에 걸린 발타고가 요희의 뺨을 꼬집었다.
“요렇게 똑똑하고 요망하니, 안 반하고 배길 수가 있나? 내 골칫거리를 말끔히 해결했으니 선물을 줘야지.”
발타고가 전광석화와 같이 요희의 허리를 낚아채 침상에 쓰러뜨렸다.
오늘은 전혀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조금 전 마신 술 때문인지 온몸에 열이 돌면서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느껴졌다.
눈앞에 드러난 요희의 허연 허벅지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그건 사내도 아니었다.
어느새 벌건 눈이 된 발타고가 거침없는 손길로 그녀의 옷 매듭을 풀어 헤쳤다.
“태, 태자. 이러면 안 돼요. 아이, 안 된다니까!”
요희가 콧소리를 내며 바둥거렸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녀의 손은 이미 발타고의 허리띠로 향하고 있었다.
발타고의 커다란 몸이 요희를 덮친 순간. 그 목을 힘껏 끌어안은 요희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석은 놈. 제가 어떤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발리안을 죽일 생각에 들떠 있다니. 너야말로 영원히…… 내 개로 살게 될 게다, 발타고.’
저 멀리 동이 터오기까지. 요희의 처소 안에서는 낯 뜨거운 신음과 침상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멈출 줄을 몰랐다.
* * *
저무는 여름의 끝.
너른 벌판에서는 활쏘기 훈련이 한창이었다. 무예 대회에 참가할 군사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막바지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탁, 탁.
과녁에 꽂히는 화살 소리가 요란한 틈으로 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활을 쏠 때는 마음을 비우고 오직 바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라. 사심 없는 화살이 가장 멀리, 정확히 날아간다. 지금 내가 활을 쏘고 있다는 의식조차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피나는 연습 외에는 방법이 없다. 거기…….”
발리안이 과녁을 향해 활을 겨누는 군사에게 다가갔다.
“활을 수직으로 세워야 화살의 흔들림을 줄일 수 있다. 그래야 바람의 영향을 덜 받고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자, 이렇게 해서 쏴 봐라.”
발리안이 군사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휘이잉, 탁.
군사의 손을 떠난 화살이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멀리 있는 과녁에 꽂혔다.
“바람이 세게 불 때는 오히려 화살의 흔들림을 이용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다. 활줄을 평소보다 더 뒤로 잡아당겨 튕기듯 놓아라. 그래야 활줄에 회전력이 생겨 바람을 뚫고 화살을 멀리 날아가게 한다.”
기탄 사람들에게 있어 말타기만큼이나 능숙한 것이 바로 활쏘기였다.
다른 나라에 비해 군사가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닌 기탄이 순식간에 주변을 위협하는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기마 궁법에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목표를 정확히 맞추는 것은 실력 있는 무사나 군사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효령의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네 차례나 무예 대회의 전 종목을 석권한 ‘검독수리’라더니.
활을 든 발리안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짙푸른 초원 한가운데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검독수리 그 자체였다.
「독수리는 기탄에서 제일 신성하게 여기는 동물이야. 천신의 사자거든. 가끔 천신께서 흰독수리로 변신하기도 하신대.」
얼마 전, 먼 하늘을 나는 검독수리 한 쌍을 보고 시타가 했던 말이었다.
왜 무예 대회 우승자를 ‘독수리’가 아닌 ‘검독수리’라 부르냐는 효령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독수리는 천신의 사자지만, 검독수리는 죽음의 제왕이거든.」
날아다니는 범이라고도 불리는 검독수리는, 사냥을 하지 않는 순한 독수리와는 차원이 다른 동물이었다.
숲이 우거지고 암벽이 많은 고산지대. 깎아지른 절벽에서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검독수리는 생존을 위해 형제마저 죽이는 비정한 새였다.
날개를 펼친 길이는 대략 6~8척. 쏘아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 갈고리처럼 휘어진 부리, 살벌한 발톱. 생김새부터가 남다른 위압감을 풍겼다.
사냥을 주로 하는 검독수리는 여느 새의 6배 이상의 엄청난 속력으로 낙하하며, 무시무시한 발톱으로 동물들의 뼈를 단숨에 부러뜨렸다.
그 파괴적인 공격력에 웬만한 동물은 심장을 꿰뚫렸다. 사슴, 늑대는 물론 그보다 큰 동물들도 그 발톱에 숱하게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검독수리는 지형을 이용하여 사냥할 만큼 영리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검독수리가 나타나면 지상의 동물들은 물론 같은 맹금류조차 순식간에 자리를 피했다.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시타의 설명을 들은 효령이 혀를 내둘렀다. 늑대를 사냥하는 새라니. 이제껏 상상조차 못 해 본 일이었다.
「맞아, 정말 무섭지. 근데 난 검독수리가 좋아. 대장을 닮았거든.」
「…….」
효령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시타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그 험난한 삶과 성장 배경, 그리고 압도적인 능력과 존재감까지. 평화로운 흰독수리가 천신의 현신이라면 발리안은 틀림없는 검독수리의 현신일 터.
「근데 이거 알아? 검독수리는 진짜 무시무시한 사냥꾼이지만…….」
형제에게도, 적에게도 자비가 없는 검독수리가 뜻밖에도 애정을 보이는 상대. 그것은 자신의 짝이었다.
검독수리는 평생 일부일처로 살며, 침입자 앞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를 헌신적으로 지켰다. 새끼들을 돌보는 일에도, 사냥에도 사이좋게 역할을 분담하며 협력하는 부부애가 강한 새였다.
「어때, 신기하지?」
「그러게요.」
효령이 파랗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나는 한 쌍의 검독수리가 마치 그림처럼 다정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때를 떠올린 효령이 발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군사들의 사이를 돌며 지도에 여념이 없었다.
‘괜찮은 거예요, 대장?’
하투 칸과의 승부 후. 발리안은 그에 대한 일은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얼핏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누가 불러도 모를 만큼 깊은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늘었다. 꼭 참석해야 하는 연회가 아니고선 황궁에 가는 것도 피했다. 아닌 척해도 아버지 하투 칸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속 시원히 뭐라 말이라도 할 것이지.
「왕자님은 어릴 때부터 혼자 참고 삭이는 게 버릇이 되셔서 그래. 다른 사람 일엔 안 그러면서 자기 일엔 입을 꽉 다무시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 수가 없다니까…….」
다와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술이라도 약하면 왕창 퍼먹이면 될 텐데. 도무지 그 속을 들여다볼 방법이 없으니…….」
‘정말 그런 방법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나로는 안 되는 거예요, 대장? 나에게만이라도 털어놓으면……!’
순간. 효령의 시야 안에 예상 밖의 인물이 들어왔다. 훈련장을 가로지르는 시타였다.
‘어? 시타가 웬일이지? 오늘은 산시를 돕느라 바쁠 거라고 하지 않았나?’
무림제가 바짝 다가오면서 산시는 군사들의 원기 보충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늘은 양을 여러 마리 잡아야 한다고 해서 시타와 교기까지 불려 갔는데…….
안야국 말을 할 줄 아는 덕분에 산시는 무뚝뚝한 교기와도 금세 친해졌다. 애교도 있고 수단도 좋아서 시타와 교기도 그녀의 말이라면 꼼짝 못 했다.
효령이 옷을 떨고 일어나 시타에게 다가가는 사이. 발리안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시타?”
“대장. 조금 전 절도 칸께서 사람을 보냈는데……. 오늘,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하시는데요?”
절도 칸이란 말에 발리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적당히 거절하지 그랬어.”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대장. 심부름 온 사람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내뺐다니까요. ‘오시는 걸로 알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러고선…….”
“알았다. 혹 거기 나 말고 또 누가 참석하는지 아나?”
“구림 부족과 막계 부족의 세자 저하도 오신다고…….”
“뭐?”
발리안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연제준이 거길 온다고? 젠장, 사람 미치겠군.”
후. 한숨을 내쉰 그가 마침 시타 뒤에 나타난 효령을 보고 말했다.
“시타와 같이 돌아가서 출타할 준비해.”
“저도요?”
“그럼 나 혼자 가서 생고생을 해야겠나? 고통 분담 차원에서 절도 칸은 너랑 시타가 상대해. 난 그 바람둥이…… 암튼 그놈만으로도 골치 아프니까.”
효령이 그 바람둥이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
휘익.
입으로 휘파람 소리를 낸 발리안이 멀리서 다른 군사들과 같이 있는 호독니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우린 먼저 가서 준비하자.”
“알았어요, 시타.”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효령과 시타의 뒤를 따라 발리안과 호독니도 걸음을 옮겼다.
* * *
짙푸른 초원 위. 저 멀리 어둠 속에 환하게 불을 밝힌 궁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이 숲과 맞닿아 있는 이곳은 절도 칸이 머무는 숙영지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도위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발리안 일행이 다다르자 절도 칸의 수하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절도 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른 왕자들께서도 오셨나?”
“막계의 세자 저하께서는 급한 용무가 있어 오지 못하셨습니다. 구림 부족의 세자 저하께서는 조금 전에 도착하셨고요.”
“그런가?”
발리안이 썩은 고기라도 씹은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얼굴을 고치고 안내하는 자의 뒤를 따라갔다.
“오! 어서 오게, 대도위!”
발리안이 들어서기 무섭게, 절도 칸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환대했다.
궁려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대부분이 절도 칸의 수하들이고 대칸의 중신들도 몇몇 섞여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탁자에는 황궁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각종 고기 요리와 술은 물론 기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채소와 과일들도 넘쳐났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칸.”
발리안이 절도 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기, 저쪽으로…….”
발리안 일행이 절도 칸이 가리키는 쪽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순간, 그 맞은편에 수하들과 같이 앉아 있던 구림 부족의 세자가 발리안을 향해 손을 들었다.
“어이! 오랜만이야, 리안. 아니 이젠 발리안이라고 불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