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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56화 (56/116)

56화. 간교한 음모 2

* * *

심상찮은 움직임은 황후의 처소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소란스러운 요희 쪽과는 달리 이곳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궁녀들이 모두 물러난 가운데. 탁자에 앉은 절도 칸은 황후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황후는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금으로 된 기둥 옆에 놓인 너른 탁자. 그 위에서 동물 젖에 찻잎을 넣어 끓인 수유차가 속절없이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가로이 그걸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답답함을 견디다 못한 절도 칸이 먼저 운을 떼었다.

“황후마마. 발리안 그놈을 가만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러잖아도 꼴사나운 놈이 이번 일로 기세등등 황궁을 휘젓고 다닐 것을 생각하면……. 당장 무슨 수를 써야 합니다.”

“…….”

우아하고 기품 있는 황후가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놈이 누굽니까? 제게는 조카, 마마께는 종손자가 되는 왕자들을 몰살한 놈입니다. 그런 놈을 오래 두어 봤자 마마와 저는 물론 태자에게도 하등 좋을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절도 칸이 바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참에 놈을 제거하는 것이 어떨는지……. 황후마마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그러나 말을 채 맺기도 전, 냉랭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허튼짓 말게.”

“화, 황후마마.”

뜻밖의 핀잔에 절도 칸이 당황했다.

“어찌 그러시는 겁니까, 황후마마? 마마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대칸께서 놈을 지나치게 총애하신다는 것을요. 놈이 주목을 받을수록 태자의 입지만 더욱 좁…….”

“자넨 그렇게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황후가 절도 칸을 쏘아보았다.

“일에는 적당한 때라는 것이 있네. 우린 이미 그 기회를 놓쳤네.”

“기회를 놓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시점에 놈에게 일이 생기면 대칸께서 가장 먼저 누굴 의심하실 것 같나? 승부에서 지고 앙심을 품은 자네가 아니겠나? 게다가…….”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 말마따나 놈의 뒤에는 대칸이 계시네. 일이 잘못되었다간 자네는 물론 우리 부족 전체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음을 왜 모르나? 적당히 밟는 것과 죽이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란 말일세.”

“하, 하지만…….”

황후의 질책에 절도 칸이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 발리안 그놈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심상치가 않다니요?”

“대칸께서 이번 무림제에 놈을 부르신 것을 두고 말이 많아. 대칸께서 직접 나서 놈의 짝을 찾아 주려 하신단 소문일세.”

“예에?”

“자넨 눈도 없나? 막계 칸과 구림 칸이 공주란 공주는 죄 데리고 온 걸 보지 못했냔 말일세.”

“말도 안 됩니다. 대칸의 양자라곤 하지만 발리안은 겨우 대도위일 뿐입니다. 공주를 다른 부족의 칸도 아니고 그깟 놈에게 보내는 것이 말이 됩니까?”

“왜 말이 안 되나? 하투 칸에게 남은 아들은 그 하나뿐인 것을. 더욱이 이번에 확인하지 않았나? 하투 칸이 아직 그에게 마음이 있음을……. 발리안 말고 누가 다음 하투 칸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그 내기는 대도위의 승리로…….”

쯧쯧. 황후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런다고 하투 칸이 포기할 것 같나? 애초에 그 내기란 것이…….”

말을 하다 말고 황후가 아둔한 절도 칸 때문에 진저리를 쳤다.

그 내기는 겉으로 보이는 승패에 상관없이 하투 칸이 이긴 싸움이었다.

백마와 청마가 상징하는 것……. 설사 발리안이 하투 칸의 핏줄이 아니라 해도, 하투 칸 본인은 그를 자식으로 인정하고 있단 뜻이었다.

말보다 더 효과적인 그 고백을 영리한 발리안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을 터.

발리안이 세자 자리를 마다한다고 결코 물러설 하투 칸이 아니었다.

세상에 그처럼 고집이 세고 포기를 모르는 사내도 드물었다. 친자식이 아님에도 발리안은 무서우리만큼 그를 빼닮지 않았던가.

지금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정이 그런 데다 대칸께서 이번에 그를 양자로까지 삼지 않으셨나? 그야말로 양 날개를 단 셈인데, 다른 칸들에게 그만큼 구미 당기는 사윗감이 있다고 생각하나?”

황후가 속이 탄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자넨 대도위란 자릴 우습게 보는데……. 칸이 아니고서 휘하에 군대를 거느릴 수 있는 자리가 대체 몇이나 되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만, 놈이 거느린 건 겨우 오 천…….”

“겨우라니?”

쾅. 황후가 탁자를 내리쳤다.

“대칸의 군대를 빼고, 자네와 차뉴 칸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정규군이 만오천, 막계 칸과 구림 칸이 삼만, 하투 칸의 군사가 사만일세. 발리안이 거느린 군대가 진정 적다고 보는가?”

“아, 아니 그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절도 칸이 진땀을 흘렸다.

“발리안의 휘하 군사들은 그 한 사람이 적어도 백 명 이상을 상대한다는 무시무시한 놈들일세. 가장 험하고 치열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을 겨우 숫자로 헤아려?”

“…….”

“내일 당장 자네 군대가 그들과 맞붙는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냔 말일세.”

기분이 상한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대칸께서 발리안 그놈을 달리 총애하시는 것 같나? 놈의 군대가 칸의 군대, 그 이상의 몫을 해내기 때문일세. 그래서 다들 놈을 제 편으로 못 끌어들여 안달인데 자넨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소, 송구합니다. 황후마마.”

그를 것 하나 없는 소리에 절도 칸이 바짝 꼬리를 내렸다.

“지금 발리안을 얻으면 그 군대는 물론 하투 칸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일세. 발리안에게 걸린 것이 놈 하나만이 아니란 말이네. 해서 구림 칸이 놈의 혼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야.”

하투 칸과 구림 칸, 거기 발리안의 힘이 합쳐진다면 대칸의 오만 군사를 능가할 거대 세력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세 번 연속 황후와 태자비를 냈다고 우쭐하며 자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절도 칸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하지만 황후마마. 구림 칸은 이제껏 누구보다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우릴 배신할 리가…….”

“권력 앞에 영원한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나? 구림 칸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야. 하투 칸이나 막계 칸, 차뉴 칸 같은 외골수와는 다르단 말이네. 특히 구림 칸의 아들이란 놈…….”

“……?”

“세자란 놈이 제 아비보다 몇 배는 더한 능구렁이라지 않은가. 놈이 발리안과 손을 잡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단 말일세.”

황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바짝 목소리를 낮췄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계획을 바꿔야겠네.”

“예?”

“이리 가까이…….”

절도 칸이 황후 곁으로 다가갔다. 황후가 그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순간, 절도 칸의 눈이 커다래졌다.

“화, 황후마마, 그 말씀은…….”

“세상에 열 미인 마다하는 사내는 없다 했네. 발리안 그놈과 우리 사이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데 그만한 묘수가 없을 걸세. 피차 쌓인 원한의 골이 깊은데 웬만한 방법으론 어림없지.”

절도 칸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하지만 황후마마. 허올란은 제가 가장 아끼는…….”

황후가 그를 향해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그래서? 겨우 하찮은 계집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셈인가?”

“아, 아니 그게…….”

“내 말 명심하게. 세상 그 무엇보다 얻기 힘들고, 지키기 힘든 것이 권력이야. 한번 빼앗기고 나면 되돌리기 어렵단 말일세. 가장 미약한 부족이었던 우리가 여기까지 어찌 왔는데!”

그녀가 엄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이게 다 태자와 나, 그리고 자네와 우리 부족의 영원한 영화를 위해서일세. 그걸 위해 필요한 희생이야. 아깝다 생각 말게. 알겠는가?”

“며, 명심하겠습니다. 황후마마.”

절도 칸의 입으로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 * *

“빌어먹을!”

밤늦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요희의 처소에 숨어든 발타고가 다짜고짜 욕지거리부터 쏟아 놓았다.

황궁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 무모한 행동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속이 터질 때 요희만큼 말이 통하는 상대가 없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어머니의 계획이 빗나가다니. 대체 어떻게 그 어려운 문제들을……. 이건 필시 발리안 그 약삭빠른 놈이 사전에 무슨 수를 쓴 것이 틀림없어.”

하. 어이없어진 요희가 잠시 말을 잃었다. 발타고의 주장은 생트집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굳이 지적할 만큼 어리석은 그녀가 아니었다.

“이거 마시고 진정해요, 태자.”

이내 얼굴을 바꾼 요희가 발타고를 향해 술잔을 내밀었다. 열불이 치민 그가 냉큼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대도위 교활한 것이야 세상천지에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요희가 나른한 손길로 발타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미 일어난 일을 두고 분을 내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요.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죠. 대도위 그자, 이번 일로 한껏 들떠 있을 테니 지금이야말로 일을 도모하기에 최고의 기회 아닌가요?”

그제야 발타고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역시 그쪽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겨우 이깟 일로 어머니고 절도 칸이고 다들 의기소침해서는……. 당분간 자중하라는 약해빠진 소리나 하고 있으니 원.”

“신중하신 분들이라 그렇지요. 그만한 자리에 오래 앉아 계시다 보면 생각할 게 많아 그래요.”

“그렇게 머리만 굴리다 놈을 없애버릴 기회를 영영 놓치면 어쩌려고? 내 이참에 발리안 그놈을 해치워 어머니와 절도 칸에게 내 실력을 보여주지.”

“무슨 좋은 수라도 있어요?”

“내일이라도 당장 효령인가 뭔가 하는 놈을 이용해 발리안을 밖으로 꾀어…….”

“아뇨, 안 돼요.”

요희가 고개를 저었다.

“꽤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지금 주변의 관심이 두 사람에게 쏠려 있는데 그런 위험한 방법을 썼다가는…….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그땐 태자라도 무사치 못할 거예요.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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