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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55화 (55/116)

55화. 간교한 음모 1

* * *

“내 지금까지…… 일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누구보다 내 과실이 크다 여겼기에 그대들의 천인공노할 죄과를 덮고 있었건만. 너희들의 뻔뻔함에 기가 질리는구나.”

하투 칸의 위엄 가득한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숙성 왕비가 죽은 것이 너희 때문임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카, 칸!”

귀빈과 영빈의 낯빛이 시체처럼 변했다.

숙성 왕비 걸장희. 그녀는 까마득한 옛날에 죽은 하투 칸의 첫 번째 왕비였다.

“귀빈,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네가 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는지 이제 알겠느냐?”

“카, 칸.”

“네, 왕비와 적자인 탁건의를 죽인 주제에…… 뭐라? 누굴 때려죽여? 태생도 알 수 없는 천한 놈?”

쾅. 대로한 그가 보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내 그동안 리안을 홀대했던 것은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그 아이를 아꼈다면, 일찌감치 세자로 삼았다면 흉악한 너희들이 그 아이마저 죽여 없앴을 것이 아니냐?”

“하, 하지만 칸…….”

보다 못한 영빈이 언니인 귀빈을 대신하여 나섰다.

“리안은 칸의 소생이 아니질 않습니까? 발란주 님의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는 건 온 천하가 이미 다 아는…….”

“너희같이 잔악무도한 것들이 감히 발란주의 행실을 문제 삼다니……. 내 혼인 첫날 밤, 발란주의 무구함을 확인했건만. 너희들이 발란주를 비방하는 태후마마의 말만 믿고 감히…….”

“…….”

“두 번이나 왕비를 죽이는 엄청난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카, 칸…….”

영빈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시에는 적자인 리안이 나를 대신하는 것이 당연한 일. 그가, 어미를 죽인 너희들과,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은 왕자들을 벌한 것을 따질 만큼 너희들이 그렇게 떳떳하더냐?”

그가 기어이 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내 그간 기탄의 평화를 위해 너희들이 벌인 짓을 알고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지는 와중에 내분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기에. 하나 더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

“숙성 왕비의 숙부인 막계 칸과 대칸께 이 일을 고한 후, 너희 죄를 물을 것이다.”

“아, 안 됩니다!”

당황한 귀빈이 하투 칸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이 일이 공론화되면 자신들 뿐 아니라 오라비인 절도 칸은 물론, 황후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칠 터. 더구나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막계 칸을 적으로 돌리는 건 그들에게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로 인해 절도 칸과 황후의 세력이 약화되기라도 한다면 그 원망과 분노를 어찌 다 감당할지.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칸. 부,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그 옆에서 영빈과 현빈도 눈물로 호소했다.

“칸.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남은 딸 아이들을 생각하시어 이번 하, 한 번만…….”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칸.”

하투 칸이 무서운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똑똑히 새겨두어라. 앞으로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리안이고 그의 손에 너희들의 남은 운명이 달렸다는 걸……. 설사 리안이 이 자리를 거절한다 해도, 절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옷자락을 떨어 귀빈을 밀쳐낸 하투 칸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내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 얼굴을 보이지 마라. 다들 썩 물러나라.”

“…….”

겨우 몸을 일으킨 귀빈과 영빈, 현빈이 달아나듯 궁려를 빠져나갔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당당한 기세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

그 시각. 요희의 처소 역시 안야국 사신들로 북적거렸다.

그동안 효령의 정체를 짐작도 못 하던 사신들은 마지막 내기에서 결국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채고 말았다.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 그들은 날이 밝기 무섭게 요희의 처소로 몰려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지금쯤 형부 상서의 부인이 되셨어야 할 효령 장공주님께서 다른 곳도 아닌 이 험지에 와 계시다니. 설명 좀 해 보시오.”

효령이 맹유천과의 혼인을 피해 달아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맹유천이 자신의 체면이 깎일 것을 염려하여 단단히 입막음해 둔 까닭이었다. 그러니 기탄에서 효령과 마주친 사신들이 놀라 기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상에, 장공주님이 저런 야만인 놈과 한편이 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오.”

“그러게나 말이오. 형부 상서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노여움이 크시겠소. 설마하니 효령 장공주님이 이런 식으로 안야국의 뒤통수를 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소?”

“게다가 그 차림은 뭐란 말이오? 음전하시던 장공주님께서 야만족의 옷을 걸치고 계시다니.”

“지금이라도 당장 장공주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장공주님이 야만족들 손에 험한 일을 당하기 전에 당장 안야국으로 모시고 가야…….”

여러 사신들이 한결같이 목소리를 높이며 소란을 피웠다.

‘성가신 인간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요희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참으며 부러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저 역시 여러분만큼이나 놀랐습니다. 저라고 장공주님과 이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니 당장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 아니오. 우선 장공주님부터 만나 사정을 알아보는 것이 …….”

요희가 상대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다들 놀라신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섣부르게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장공주님을 만나겠다고 수선을 피웠다가 저들이 효령 장공주님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그녀가 바짝 목소리를 낮췄다.

“그때야말로 저들이 장공주님을 가만두겠습니까? 대칸이나 대도위가 장공주님을 취하겠다 나설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

“그러다 자칫 제 정체까지 들통나는 날엔 저와 여러분은 물론이고 안야국마저 위험에 처하게 될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

“형부 상서께는 나중에 제가 사정을 설명드릴 테니 여러분들은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마시고 모르는 척하세요. 나라를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 직접 나서 안야국을 위태롭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 하지만…….”

사신단의 우두머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여기 오기 전, 이미 형부 상서께 효령 장공주님을 모시고 가겠다 전서구를 보냈단 말이오.”

“뭐라고요?”

요희의 이마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 망할 인간.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장공주님을 안야국으로 모시고 가야 하오. 상서께서 잔뜩 기대하고 계실 텐데 그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소이다.”

“나도 그리 생각하오. 모르면 몰랐을까. 장공주님을 이곳에 두고 가는 건 말이 안 되오.”

후. 요희가 아랫입술을 사리물어 간신히 분을 삭였다.

“좋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지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더욱더 신중해야 합니다. 자칫 대도위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될 일도 안 될 테니 말입니다. 모든 건 제게 맡기고 다들 자중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알았소.”

“그리하리다.”

사신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요희가 사신단의 우두머리에게 물었다.

“지난번 제가 말씀드린 건…… 어찌 되었습니까?”

“날씨를 핑계 삼아 우리의 귀국을 앞당기라 한 것 말이오?”

“예.”

“그러잖아도 단사관을 통해 대칸께 아뢰었더니 무예 대회가 끝나면 곧장 출발해도 좋다 허락하셨소.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주라 이미 명을 내리셨소.”

“정말 잘됐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요희가 바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러분은 무예 대회가 끝나는 대로 최대한 빠르게 주도를 벗어나십시오. 대신 남쪽 막계 칸의 영지에 들어서서는 속도를 늦추세요. 그러다 계명산에 다다르면…….”

그녀의 눈이 날카로이 번득였다.

“그땐 무슨 핑계든 대서든 행렬을 멈추고 거기서 절 기다리세요. 이달 스무닷새. 그때까지 효령 장공주님을 그곳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사신 중 하나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대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정말 가능하겠소? 스무닷새라니. 시간이 너무 빠듯하기에 하는 소리요. 그러다 혹 실수라도 있으면 큰일 아니오?”

그가 운을 떼기 무섭게 다들 너도나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맞소이다. 대도위가 어디 보통 영악한 사람이오? 성질은 또 어떻고.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그리 만만하겠느냔 말이오.”

“그렇게 날짜를 촉박하게 잡았다가 혹 장공주님을 모셔오는 데 실패하면 그땐 어찌할 것이오? 나중에 형부 상서를 무슨 낯으로 보라고…….”

“그럴 바엔 차라리 출발을 조금 늦추는 게…….”

사정 모르고 지껄이는 말에 요희의 미간이 사정없이 비틀렸다.

여기서 미적대다가는 귀국길에 악명 높은 기탄의 겨울 추위와 맞부딪칠 수도 있었다. 자칫 눈에 발이라도 묶이는 날엔 안야국의 문턱에도 못 미치고 이국에서 개죽음을 당할 터.

심부름꾼이면 그 역할에나 충실할 것이지. 아둔한 것들이 낄 데 못 낄 데 가리지 않고 나대는 꼴을 더는 참아줄 수 없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요희가 날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좋습니다. 그렇게 제가 못 미더우시다면 당장 대도위를 찾아가 직접 협상을 해 보시지요. 이제부터 전 빠지겠습니다.”

“뭐, 뭐요?”

“형부 상서께는 제가 따로 아뢰지요. 여러분들이 허투루 나서 설쳐대는 바람에 제 처지가 아주 곤란하게 되었다고요. 잘들 해 보십시오. 어떻게든 효령 장공주님을 모셔가면 그나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실 테니…….”

그제야 당황한 사신들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니, 우린 그쪽을 생각해서…….”

“마, 맞소이다. 그대가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야 우리가 말릴 까닭이…….”

사신단의 우두머리가 요희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달랬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댓바람부터 너무 흥분해서……. 아까 뭐라 했더라? 이달 스무닷새까지 계명산 아래서 기다리라? 그, 그게 뭐가 어렵다고……. 꼭 그리하겠소.”

그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우린 그쪽만 믿고 이만 물러가겠소. 앞으론 얌전히 있을 테니 염려 말고 일을 진행하시오. 다들 뭣들 하시오? 황비마마 쉬시게 어서들 갑시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른 아침부터 큰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린 이만…….”

사신들이 금세 꼬리를 내리며 달아나듯 요희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저런 한심한 놈들…….’

요희가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나더러 당장 효령을 구해 내라고? 미쳤어? 제 발로 죽을 자릴 찾아든 계집을 내가 왜? 이제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그 계집을 상서 어른에게서 떼어놓게 되어 속이 다 후련하구먼.’

그녀의 눈이 표독스럽게 번득였다.

‘효령을 구하겠다고 떠든 건 네놈들이니 그 책임도 네놈들이 져야지. 물론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하겠지만.’

그녀의 입가에 잔인한 비소가 스쳤다. 그 얼굴이 내뿜는 선득한 냉기에 놀란 화로의 불꽃이 이리저리 제멋대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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