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명승부 2
* * *
조금 전, 동무들 쪽으로 달려가는가 싶던 새끼 청마가 느닷없이 방향을 틀었다.
수많은 명마 사이를 지나친 새끼 청마가 돌연 눈처럼 하얀 설백마에게 달라붙어 젖을 빨기 시작했다.
새끼 청마가 같은 청마가 아닌 백마의 젖을 빨다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하여 말을 잃었다.
어느 수컷과 짝을 지었느냐에 따라 간혹 백마가 흑마를 낳기도 하지만, 털에 푸른 빛을 띠는 청마는 청마와 청마, 청마와 흑마 사이가 아니고선 태어나기 어려웠다. 출생의 조건이 매우 까다롭기에 그토록 그 수가 적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젖을 뗀 말이 다시금 어미 젖을 빨고 있는 모양이 너무도 충격이었다.
“……!”
대칸 역시 놀랐는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효령이 단언했다.
“새끼 청마의 어미는 바로 저 백마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하투 칸 전하?”
꿀꺽. 사람들의 입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하투 칸의 답을 기다렸다.
다정한 청마와 백마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하투 칸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어렸다.
“네 말이 옳다. 저 백마가 바로 새끼 청마의 어미다.”
“아니, 하투 칸. 이게 어찌 된……!”
그 이유를 물으려던 대칸이 문득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것이었군.”
“맞습니다, 대칸. 짐작하시는 대로, 저 새끼 청마는 태어난 순간 어미를 잃었습니다. 저 백마 역시 자식을 잃었고요. 하여…… 둘이 새로운 가족이 된 것입니다.”
새끼가 어미를, 어미가 새끼를 잃는 일은 말의 세계에서도 종종 일어났다.
그때 말치기는 박하 등 향기 나는 식물로 어미의 후각을 교란한 후, 죽은 새끼의 태반을 어미 잃은 새끼의 몸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러면 어미가 냄새에 혼란을 느껴 그 새끼를 자신의 새끼라 여기고 자식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이것은 노련한 말치기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순한 암말이라도 출산 직후에는 극도로 예민해져 사람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궁금하구나. 어떻게 저 녀석이 제 어미를 찾아가 젖을 빨게 만들었느냐?”
“그건…….”
하투 칸의 질문에 효령이 웃으며 답했다.
“저 새끼 청마를 돌보는 말치기에게 부탁을 했지요. 저 녀석에게 하루 동안 물도 먹이도 주지 말라고요.”
“그래서 내게 하루의 말미를 달라고 했던 것이로구나.”
“예. 지금 저 녀석은 몹시도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겁니다. 굶주림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이 갈증이지요. 해서 녀석은 풀을 뜯는 대신 어미를 찾아가 젖을 빤 겁니다.”
효령의 말이 이어졌다.
“말은 태어난 지 반년이 되면 젖을 떼고 어미와 떨어뜨려 놓는다면서요? 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저 녀석은 아직 어미 젖을 먹던 기억을 완전히 잊지 않았을 겁니다. 해서…….”
그녀의 설명에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래서 하루가 필요했던 거로군. 그것도 모르고 난…….”
“그러게. 정말 기가 막히네.”
“설마하니 저 청마의 어미가 눈처럼 하얀 백마일 줄이야. 상상도 못 했네.”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껏 안야국 놈들은 죄 입만 산 줄 알았더니……. 아니었구먼.”
“대도위님께서 정말 대단한 놈을 구하셨군.”
“정말. 어디서 저런 놈을 구하셨는지. 거참 기막힌 물건일세.”
“비실비실하니 계집처럼 생겼다고 얕봤다가 큰코다쳤구먼.”
효령을 뒤로 하고 하투 칸이 발리안 앞으로 다가왔다.
“완벽한 네 승리로구나.”
그가 위엄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 겉만 보고 저 젊은일 쉽게 판단했으니.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네가 나보다 한 수 위구나. 좋은 수하들을 두었으니 넌 분명 큰 뜻을 이룰 게다, 리안.”
“…….”
“언제든…… 우리 같이 술 한잔하자꾸나.”
하투 칸은 다른 말 없이 이내 대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가 졌습니다, 대칸.”
고개를 끄덕인 대칸이 모두를 향해 선포했다.
“이번 승부 역시 대도위의 승리다. 삼전삼승. 대도위가 절도 칸과 하투 칸을 모두 이겼다. 약속은 약속이니 대도위는 앞으로 나와 절도 칸과 하투 칸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
대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절도 칸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와아!
사람들의 환호 속에 발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대칸과 여러분께서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바, 발리안 네놈…….’
절도 칸이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려 이를 악물었다. 그 주변에 있던 귀빈과 영빈도 허옇게 질린 얼굴로 발리안을 노려보았다.
과연 저놈이 무슨 말을 할까.
야심이 많은 놈이니 당장 오라비 절도 칸의 자리를 내어 달라고 할까, 아니면 오래 묵은 원한을 풀겠다 나설까.
어느 쪽이든 최악이긴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가슴이 떨리고 불안하여 제대로 서 있기 어려웠다.
두려워진 그녀들이 도움을 청하듯 황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황후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절도 칸께 청합니다.”
드디어 발리안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제가 절도 부족에게 도움을 구하는 날이 오면…… 그땐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
너무도 뜻밖의 요구에 절도 칸이 말을 잃었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꿍꿍이지?’
놀란 것은 귀빈과 영빈도 마찬가지였다. 천하의 발리안이 해코지나 복수는커녕 저런 무난하고 에두른 소리를 할 줄이야.
무지막지한 데다 자비라곤 모르는 저 지독한 놈이……? 귀빈과 영빈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다인가?”
“예, 대칸.”
“절도 칸, 어찌하겠소? 대답하시오.”
대칸의 재촉에 절도 칸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겠습니다.”
“절도 칸의 약속을 나와 여기 있는 모두, 그리고 천신께서 들으셨소. 절도 칸과 그 부족은 오늘의 약속을 목숨 걸고 반드시 지켜야 하오. 이를 어긴다면 그대들은 기탄의 사내가 아니오.”
“예, 대칸.”
“대도위. 하투 칸에게 원하는 것은 없나?”
대칸이 다시금 발리안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그럼 이번엔 내가 말하지.”
대칸이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도위의 수하라 했지? 네 이름이 무엇이냐?”
효령이 당황하여 대답했다.
“효, 효령이라 합니다.”
“효령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참으로 멋진 승부였다. 나와 내 손님들이 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여 내 그 보답을 하려 한다. 아까 네가 어미를 찾아낸 새끼 청마를 네게 주마.”
“예? 하지만 그건 하투 칸께서 대칸께 선물로 바치…….”
“이미 하투 칸도 허락한 일이다. 그 청마가 다 자랐을 때면…… 너 역시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부디 나와 대도위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주기 바란다.”
너무도 놀란 효령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대칸.”
“자, 이제 그만 연회장으로 자릴 옮기지. 오늘 밤은 거나하게 취하고 싶구나.”
대칸의 명에 우르르, 사람들이 움직였다.
“거기 너. 정말 대단했다.”
“대도위님. 축하드립니다. 보기 드문 명승부였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했소이다.”
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 소란의 틈에, 야릇한 시선으로 발리안을 주목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역시나! 매번 화려하게 등장하는구나, 리안.’
금색 비단으로 귀밑 옆머리를 땋아 장식하고 한쪽 귀에는 둥근 귀걸이를 한 그는 발리안만큼이나 큰 키에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건 사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군…… 내 사랑.”
사내는, 발리안이 효령과 함께 황목장을 빠져나가기까지 뜨거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 * *
이틀간의 승부는 황궁에 파란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화제의 중심은 단연 발리안과 효령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흥밋거리로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과 달리 몇 곳의 상황은 사뭇 심각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하투 칸과 그의 후궁들의 궁려가 자리를 잡은 황궁 아래 동쪽 터였다.
이른 아침부터 떼를 지어 몰려온 귀빈과 영빈, 현빈이 날 선 얼굴로 단사관을 압박했다.
“칸께 전해 드리게. 우리가 뵙기를 청한다고. 오늘은 우리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게.”
“마마, 그게…….”
단사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하투 칸이 발리안에게 내기를 제안한 다음 날부터 단사관은 후궁들의 등쌀에 시달리느라 죽을 맛이었다.
이런 상황을 짐작해서인지 하투 칸은 계속해서 이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극성스러운 후궁들을 말릴 수 있을 것인지. 단사관이 변명할 말을 찾느라 고민하는 사이. 밖에서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칸께서 세 분 마마를 찾으십니다.”
“그래? 잘됐군. 어서들 가세.”
귀빈이 놀라운 기세로 몸을 돌이켜 밖으로 나갔다. 영빈과 현빈이 그에 뒤질세라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그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하투 칸의 궁려 안으로 들어섰다. 인사도 생략한 그들이 하투 칸이 앉은 보좌 앞으로 다가갔다.
“그간 수년 동안 저희를 가까이하지 않으신 것이…… 부족 중에서 양자를 들이란 수하들의 청을 다 물리치신 것이 리안 그놈 때문이었습니까?”
“…….”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에게 세자 자리를 제안하시다니요? 칸께서는 그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잊으신 겁니까?”
귀빈이 핏대를 높였다.
“그놈 손에 저흰 생때같은 아들을 잃었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여섯을요. 그들이 누굽니까? 칸의 아들들이 아닙니까?”
“…….”
“그 일로 저희는 목숨과도 같은 자식을 잃었고 칸께서는 뒤를 이을 후계자를 잃었습니다. 리안은 적도 아닌 제 형제를…… 아니, 아니지.”
귀빈이 얼굴 가득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감히 태생도 알 수 없는 천한 놈이 하늘 같은 왕자들을 죽…….”
순간, 하투 칸이 날카로운 눈으로 귀빈을 쏘아보았다.
“말조심하게, 귀빈.”
“칸!”
“내가…… 그대들이 저지른 죄를 몰라 이제껏 참고 있었는 줄 아나?”
죄. 하투 칸의 입에서 튀어나온 느닷없는 말에 귀빈의 얼굴이 벌게졌다.
“죄, 죄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