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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53화 (53/116)

53화. 명승부 1

* * *

발리안이 시퉁하게 물었다.

“뭐가? 안 도망가고 돌아와서?”

“그것도 고맙고…… 그냥 다, 전부 다요.”

태어나 줘서,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줘서……. 내 앞에 나타나 줘서, 나와 함께 있어 줘서…… 모두 다, 다 고마워요, 대장.

“그만 자. 너 오늘 무리했어.”

훗. 발리안이 말을 하다 말고 웃었다.

“네가 똑똑한 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절도 칸 얼굴이 뭉개지는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저기요, 대장.”

효령이 발리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나한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고 했죠? 만약 내가 절도 칸이 낸 문제를 못 풀었으면, 그럼 어쩌려고 했어요?”

발리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어쩌긴. 데리고 튀어 버리려고 했지, 안야국으로.”

“피, 거짓말.”

“농담 아냐. 안 되겠다 싶으면 튀는 게 상책이야. 살아 있어야 대책이든 뭐든 세울 거 아냐?”

“그러다 절도 칸이 안야국까지 쫓아오면요?”

“글쎄. 정 뭐 하면 낙갈국이나 대현국쯤에서 죽여 버리지, 뭐.”

“…….”

얼어붙은 효령을 두고 발리안이 피식 웃었다.

“아까 황궁에서 들었잖아. 내가 형제들을 죽인 무자비한 놈이라는 거. 가족도 죽여 없앴는데 내가 못 죽일 상대가 있을 리가…….”

“…….”

효령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리안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어쭈. 그런 소릴 듣고도 안 도망가? 지금쯤 나에게 진저리를 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 어린애 아니에요.”

효령이 얼굴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야차란 별명이 괜히 붙었을까……. 난 그런 흑야차에게 날 책임져 달라고 한 사람이잖아요. 이런 것쯤 각오하고 있었…….”

발리안이 효령의 턱을 들어 올렸다.

“괜히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 난 그럴 만큼 가치 있는 놈이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포기해. 네가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효령을 놓아준 그가 뒤로 돌아누웠다.

“그만 자. 나 졸린다.”

“대장.”

“…….”

“내일 내기에 대해 안 물어요? 내가 답을 찾았는지 안 찾았는지 안 궁금해요?”

“…….”

“대장…….”

“…….”

효령이 물끄러미 대답 없는 발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넓고 단단한 그의 등이 오늘따라 왠지 서글퍼 보였다.

효령은 거기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침상에 홀로 누워 발리안을 기다리는 동안 효령이 깨달은 것은 단 하나였다. 젊은 시절의 발란주가 그랬듯, 자신도 발리안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

그 끝이 설사 행복이 아닌 불행뿐이라 해도 자신은 절대 발리안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작게 속삭였다.

“언젠가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무슨 이유에서건 대장이 날 피하거나 거리를 두는 건 싫다고, 화를 내도 좋으니까 같이 있어 달라고 했던 거요.”

“…….”

“그때 대장이 말했어요. 늘 같이 있어 주겠다고…….”

효령이 다시금 발리안을 끌어안았다.

“나도 약속해요. 대장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형제를 죽인 야차든, 그보다 더한 악당이든, 뭐든…… 내가 곁에 있어 줄게요.”

영원히…….

“…….”

말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맹세에 발리안이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실낱같은 한숨이 그의 잇새를 빠져나왔다. 애먼 허공을 노려본 채 그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 * *

늦은 오후. 연회가 시작되기 전임에도 사람들이 미리부터 황궁에 모여들었다.

오늘 효령이 하투 칸이 낸 문제에 답을 하겠다는 시간이 머지않아서였다.

그들이 모인 곳은 연회장이 아니라 황마장이었다. 황궁의 말 목장인 그곳을 가득 채운 것은 그 하나하나가 값을 헤아리기 어려운 명마들이었다.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하루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 흰 몸에 붉은 점이 있는 백육적로마, 큰 키에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붉은 적란마, 눈처럼 흰 설백마, 밤하늘처럼 검은 야천마, 번개만큼 빠르다는 비전마, 주인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천복마, 기탄 고유의 명마 산자, 도도라고 불리는 청마까지…….

사람들의 시선이 저만치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청마를 향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매서 털끝에 푸른 빛이 도는 것처럼 보이는 청마. 청마의 갈기 색은 검은 야천마와 같이 있어도 도드라져 보일 만큼 독특했다. 그 특별함에 걸맞게 수많은 명마 틈에 섞인 청마는 단 두 마리뿐이었다.

“대체 어느 녀석일까?”

“글쎄.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대도위님의 수하가 하투 칸이 낸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이번만은 어려울걸. 놈의 학식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말을 보는 눈은 하투 칸을 따를 수 없을 테니까.”

“하긴……. 하투 칸은 성미 급한 절도 칸과는 다른 분이지. 그분이 만만한 문제를 냈겠나?”

“맞아. 이번엔 하투 칸이 이기실 게 분명해.”

사람들이 분주히 저마다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둥둥둥.

정해진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황마장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대칸의 보좌가 있는 누대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대칸이 정좌한 가운데. 누대 바로 아래에는 승부의 당사자인 하투 칸과 발리안, 효령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제 하투 칸이 낸 문제.

그것은 한 망아지의 어미를 찾는 일이었다.

「녀석들을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발리안이 하투 칸의 제안을 수락한 후, 하투 칸의 고갯짓으로 세 번째 대결이 시작되었다. 황궁의 말치기들이 십여 마리의 말을 황마장 앞으로 끌고 왔다. 같은 마장에서 생활하는 어린 망아지들이었다.

하투 칸이 그중 한 마리를 직접 효령 앞으로 데려왔다. 칠흑을 떠올릴 만큼 완벽한 검은색 청마였다. 그가 효령을 보고 물었다.

「이 녀석은 무림제를 맞아 내가 대칸께 선물로 가져온 것이다. 이 녀석의 어미와 함께. 저기 황마장 안에 있는 말 중 어느 것이 이 망아지의 어미인지 알겠느냐?」

효령의 눈이 황마장을 여유롭게 거닐고 있는 두 마리의 청마를 향했다.

「잠시만 말들을 풀어 놔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해라.」

효령의 부탁에 말치기들이 황마장 안에 망아지들을 풀어놓았다. 너른 풀밭에 놓인 망아지들이 신이 나 폴짝폴짝 뛰었다. 경쟁하듯 달려간 망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풀을 뜯기 시작했다.

효령은 새끼 청마가 어미를 찾아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새끼 청마는 풀을 뜯고 다른 망아지들과 어울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루해진 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 새끼 말고 청마가 둘뿐이니 그중 하나를 고르면 될 것을…….」

「설마 흑마와 청마도 구분 못 하는 건 아니겠지?」

쏟아지는 야유에 효령이 난처해하는 사이, 하투 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새끼가 어미 젖을 물길 기다리는 모양인데……. 안됐다만 저 청마는 태어난 지 이미 반년이나 되었다. 어미 젖을 뗐단 말이다.」

하투 칸의 말에 효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기탄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말에 관한 한 예외였다. 손에 말고삐를 쥐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을 만큼, 기탄 사람들은 말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저 두 마리의 청마 중 대체 어느 것이 어미지?

효령이 발리안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그녀와 달리 그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발리안이 둘째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려 보였다.

‘진정하고 머리를 써.’

‘머, 머리?’

‘그래, 별로 어렵지 않은 문제야.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하면 금세 풀 수 있다.’

그가 한 손을 세워 앞을 가리켜 보였다. 앞에 복병이나 함정이 있는 것을 나타내는 수신호였다.

‘단, 이 문제에는 함정이 있을 수 있어. 눈앞의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돼.’

‘하, 함정?’

효령이 다시금 새끼 청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만, 이미 젖을 뗀 새끼라면…… 아!」

잠시 생각에 잠겼던 효령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투 칸 전하. 이 문제의 답을 내일 드려도 되겠습니까? 너무도 어려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효령의 말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그럼 그렇지. 안야국 놈이 말에 대해 무얼 알겠어?」

「암. 하투 칸은 절대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지.」

하투 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효령이 이번엔 대칸을 향해 돌아섰다.

「대칸께 청이 있습니다. 저 새끼 청마를 돌보는 말치기를 불러 주십시오.」

효령이 말치기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인 이후. 대칸은 모두에게 다시금 연회장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럼 내일 정해진 시간에 다시 모이시오.」

지금이 바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다리던 그 시간이었다.

효령은 복잡한 심정으로 힐끗, 하투 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투 칸이 왜 이 승부를 제안했는지 알 것 같았다.

‘칸께서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의 마음을 깨달으셨다면 좋았을걸. 대장이 상처받고 망가지기 전에……. 아니 그럼 우린 만나지 못했을까.’

오늘 효령 자신이 문제를 풀든 못 풀든 이 승부의 진정한 승자는 하투 칸이었다.

발리안의 안색이 엉망인 것도 이미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일 터.

효령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발리안은 하투 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고. 이 문제를 풀면……. 발리안은 하투 칸이 이 문제를 낸 진짜 이유, 그의 본심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발리안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결과였다.

‘어떡하지? 맞춰야 해, 말아야 해?’

효령이 갈등하는 사이, 대칸이 승부를 가름할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대도위의 수하는 앞에 나와 답을 말하라.”

그와 동시에 사방이 잠잠해지며 사람들의 눈이 모조리 효령을 향했다.

후.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새끼 청마의 어미는…… 저 녀석 스스로가 알려줄 겁니다.”

효령이 말치기에게 고갯짓을 했다. 말치기가 황마장의 문을 열고 새끼 청마를 풀어 주었다.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오늘도 보나 마나 동무들을 찾아갈 텐데 저게 무슨 헛짓이람.”

“그러게 말이야. 저 안야국 놈. 제법 머리가 좋다 싶더니만 말에 관한 한 아둔하기 짝이 없구먼.”

“실망이야. 역시 이번 승부는…….”

바로 그때, 다른 쪽에서 비명과도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 세상에, 이, 이럴 수가!”

“맙소사!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눈앞에서 벌어진 믿기지 않는 장면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황마장 한가운데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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