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숨겨진 사연 3
* * *
다와가 끝내 소매를 들어 젖은 눈을 훔쳤다.
“귀빈마마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왕자님의 뺨을 수도 없이 때렸어. 어미나 아들이나 똑같다고. 근본 없는 천한 것들의 핏줄이니 오죽하겠느냐고.”
“……!”
효령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가시에라도 찔린 듯 너무도 마음이 아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간 당장이라도 통곡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날 왕자님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늘 아버지 하투 칸처럼 되고 싶다던 왕자님이셨으니까. 하지만 왕자님은 그 일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으셨어. 그런다고 그 일이 감춰진다니?”
“…….”
“그날…… 발란주 님은 밤을 새워 우셨어. 자신은 그 옛날 설 장군님과 함께 죽었어야 했다고. 아니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랬으면 설 장군님도 왕자님도 그런 고초를 겪지 않았을 거라고.”
“…….”
“목숨과도 같은 아들이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단 사실……. 그건 발란주 님께 치명적이었지. 끝없는 자책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발란주 님은 결국 병이 드셨어.”
괴로움에 다와가 옷깃을 움켜쥐었다.
하아. 몇 차례나 고통스러운 한숨을 흘려보내고서야 그녀는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발란주 님께서 병상에 누우신 후, 왕자님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졌어. 어머니 발란주 님에게 향할 몫까지. 가엾게도…… 이 너른 세상에 그분 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게야.”
“…….”
“왕궁에서는 후궁마마와 왕자님들이, 황궁에서는 태후마마와 황후마마, 태자이신 발타고 전하가……. 거기에 차가운 아버지까지…….”
“…….”
“그럼에도 왕자님은 단 한 번도 힘들단 내색을 하신 적이 없어. 특히 어머니 발란주 님 앞에선…… 늘 그림 같은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으셨지.”
다와가 자책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우린 미처 몰랐어. 그 지옥과도 같은 몇 년 동안…… 밤마다 왕자님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가며 분노를 뼈에 새기고 있었다는 걸.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 웃는 낯만 믿고선…….”
그예 그녀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약 속에 든 독 때문에 발란주 님이 숨을 거두실 때까지…… 아무도 왕자님이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계신 줄 몰랐어. 귀빈마마께서 이제야말로 왕비 자리는 자기 차지라며 기뻐하실 때…….”
“…….”
“왕자님은 형제들의 처소를 돌며 그들을 처참히 죽이셨어. 후궁마마들이 발란주 님의 죽음을 애도하기는커녕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며 잔치를 벌이던 그때…….”
“…….”
“왕자님은 형제들의 피를 받아 어머니의 시신 앞에 뿌렸어. 이제 더는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할 자가 없으니 마음 놓고 눈을 감으시라고. 앞으로 누구든…….”
말을 하는 다와의 어깨가 한없이 흔들렸다.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은 다 이렇게 만들어 버릴 테니…… 더는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더는 이 지긋지긋한 땅은 뒤돌아보지 말고 떠나시라고. 그러고는 그제야 처음으로…….”
“…….”
“소리를 내어 우셨어.”
흐읍. 다와가 얼른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하투 칸께서는 전장에서 발란주 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셨지. 그분이 황급히 말을 달려 돌아오셨을 땐…….”
다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슬아슬……. 위태롭게 이어지던 모든 관계가 와르르 무너지던 순간을.
어느 날 느닷없이 내리쬐는 봄볕에 두꺼운 얼음장이 갈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에 어긋나 버렸다.
수하들로부터 발란주의 죽음과 발리안이 저지른 참상에 대해 전해 들은 하투 칸은 분노한 얼굴로 궁려에 들어섰다.
그 엄청난 기세에 다와가 겁을 먹은 것과는 달리 발리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리……!」
발리안은, 분개하여 내뱉는 하투 칸의 말을 동강 내 버렸다.
「듣고 오신 그대롭니다. 어머닌 돌아가셨고, 다른 놈들도 죽었습니다.」
「뭐야? 리안 너. 그걸 말이라고……!」
탁.
발리안이 하투 칸의 발 앞으로 피에 젖은 칼을 내던졌다.
「긴말 필요 없습니다. 그간 보기 싫은 절 참아주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머니도 안 계시고 이제야말로 절 눈앞에서 치울 좋은 구실이 생겼으니 어서 죽이시죠.」
「…….」
믿을 수 없는 참담한 광경에 하투 칸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발리안이 저지른 짓은, 밥 먹듯 사람을 죽인다는 기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 손으로 형제들을, 그것도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고 모조리 베어 버리다니. 그것으로 모자라 그는 어머니의 목관 앞을 그들의 피로 흥건히 적셔 놓았다.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흥분하기는커녕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빛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하투 칸조차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어찌하여 형제들을…… 죽인 것이냐?」
한참의 침묵 끝에 하투 칸의 입에서 짓이겨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리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누가 제 형제란 말입니까?」
「리안.」
「이 세상에 저와 피를 나눈 사람은 돌아가신 어머니 한 분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동안 칸께서 그토록 절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까?」
발리안은 지금 하투 칸을 아버지 대신 칸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하투 칸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 그게 무슨 말……?」
「송구합니다. 그동안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나대서. 더는 칸께서도 마음에 없는 연기,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꿈틀. 하투 칸의 가슴에 조금 전과는 다른 울분이 치밀었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네 어미가…… 네 어미가 그리 말하더냐?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어머니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제게 그걸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칸 전하시니까요.」
「리안.」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제 아버지는 칸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칸이 아니셨다면 전 살아 있지도, 이렇게 성장하지도 못했을 거라고…….」
「…….」
「생명을 주고 키운 이가 곧 부모이니 제 아버지는 분명 칸 전하가 맞다고 말입니다.」
발리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생명을 주신 것, 키워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해서 받은 대로 갚아드린 겁니다. 어머니나 저나…… 살아온 날들이 나락이었으니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맙고 사무쳐서…….」
발리안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가슴에 새기고 뼈에 새겨 두었다가…… 죽기 전에 갚은 겁니다. 이걸로 더는…….」
발리안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는……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리, 리안…….」
「그러니 날 죽여, 당장! 더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도 당신도 보기 싫으니까 죽이라고!」
내내 침착하던 발리안이 짐승처럼 포효했다.
「내가 당신 아들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 목을 그어버렸어.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다 맞고 있었지. 그놈들 눈에 가득 찬 공포와 두려움. 그걸 보며 비웃었어.」
「…….」
「겨우 이것 밖에…… 이것밖에 안 되는 놈들이 그동안 내 어머니를 조롱하고 모욕하고……. 더는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받은 대로 돌려줬지. 그 얼굴에 침을 뱉고 ‘그만 꺼져, 이 새끼야’…….」
「…….」
「이제 그 칼을 드시지. 어떻게 죽이든 당신 좋을 대로 해. 난 적어도 그놈들처럼 비굴하게 죽지는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을 지켜보는 다와의 온몸이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덜덜 떨렸다.
정말 하투 칸이 발리안을 죽일까 봐, 그래서 자신이 발리안의 최후를 보게 될까 봐. 그것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훔치며 다와는 앞으로 나섰다. 발리안이 태어날 때 발란주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하투 칸을 말릴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털썩.
하투 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옷자락에 죽은 여섯 아들의 피가 스며들었다.
두툼한 연갈색 가죽옷이 붉게 물들도록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멍하니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발리안을,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된 발란주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의 그에게선 전장을 누빌 때의 용맹함도, 정치를 논할 때의 냉정함과 침착함도, 어느 것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가라, 리안……. 가거라, 나 없는 세상으로…….」
「……!」
그 순간, 정신을 차린 다와는 하투 칸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고 서 있는 발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떠나세요, 왕자님. 어서요!」
혼절한 귀빈마마와 후궁마마들이 깨어나기 전에, 성난 중신들이 왕자님의 죄를 물으러 몰려오기 전에, 어서…….
다와에게 억지로 떠밀린 발리안은 궁려를 나가기 전, 잠시 멈춰 섰다. 그러나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발란주가 설규한과 함께 황궁을 버렸던 그때처럼. 다른 나라의 겨울과 다름없는 차가운 가을밤.
열일곱의 발리안은 그렇게 하투의 왕궁을 떠났다.
* * *
발리안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주의하며 처소에 들어왔다. 잠이 들었다면 놓칠 만큼 조용한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효령은 자고 있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발리안은 좀처럼 양털 이불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효령이 바스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발리안은 화로 곁에 앉아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대장?”
“깼어?”
발리안이 효령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거기서 뭐 해요?”
“바깥바람이 많이 차다. 그래서…….”
그는, 찬 몸으로 이불에 들어갔다가 효령을 깨우게 될까 봐 몸을 데우는 중이었다.
얼마 전, 괜한 소문이라도 날까 염려한 다와가 효령 몫의 침상을 하나 더 넣어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시용일 뿐이었다.
딱 하루, 떨어져 자보려 시도하긴 했는데, 효령도 발리안도 옆구리가 헛헛해서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이후로 두 사람은 이전처럼 한 침상을 사용했다.
“뭐 하느라 아직껏 안 자?”
“그러는 대장은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요?”
“술 좀 깨려고 말을 타고 달렸지. 아주 멀리까지……. 그대로 영영 달리고 싶었는데 네가 생각나 돌아왔다.”
“나요?”
“그래. 내가 없으면 잠을 못 이룬다면서…….”
휙 하니 겉옷을 내던진 그가 침상 안으로 들어왔다.
“그만 자자. 내일도 황궁에 가려면 이젠 자야 해.”
“…….”
대답 대신 효령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