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숨겨진 사연 2
* * *
“머리를 장식하는 머리꽂이. 그걸 본 순간, 그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해 내신 게야. 설 장군님의 어머니께서 운명하시던 날. 훗날 며늘아기에게 주라며 비슷한 것을 어린 그분 손에 쥐여 주셨다더라.”
다와의 목소리가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그분에겐 희망이 생긴 거야. 이제껏 자신이 누구인지도, 가야 할 곳도 알 수 없어 발란주 님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한데 자신에게 집과 고향이 있다는 걸 아셨으니…….”
“발란주 님과 함께 안야국으로 오실 생각을 한 거군요.”
“그래.”
다와가 북받치는 감정을 다스리려 어금니를 깨물었다.
“결국 두 분은 황궁을 빠져나와 달아나셨어. 나는 깊은 밤, 멀리서 두 분을 배웅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두 분이 안야국에 무사히 도착하시길 빌고 또 빌었어. 동이 터올 때까지.”
“…….”
“어렵게 구한 지도 한 장을 들고 두 분은 생전 처음 가 보는 험한 땅과 정면으로 마주하셔야 했다. 그것도 다른 나라의 겨울이나 다름없는 차가운 가을 날씨 속에서…….”
열일곱, 스물둘. 그때의 그들은 지금의 효령과 발리안보다 한 살 어린 나이였다.
어느새 치밀어 오른 눈물이 효령의 눈을 적셨다.
사랑을 위해 동토에 뛰어든 젊은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발리안과 비슷한 얼굴의 설규한과 언젠가 양피지의 그림 속에서 본 아름다운 발란주.
그들의 용감 또는 무모했던 여정의 끝이 행복이 아님을 알기에 자꾸만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하루가 지나 황궁이 발칵 뒤집혔지. 곧 황궁 군대가 비밀리에 추적에 나섰다. 진노한 하투 칸께서도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가셨지. 그리고 그 결과는…….”
다와가 허탈하게 웃었다.
“두 달쯤 지나서였나? 난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해. 내 생애 가장 슬펐던 날이니까.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던 발란주 님께서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하투 칸의 품에 안겨 돌아오셨지. 초점이 사라진 눈을 하고선…….”
“…….”
“그리고 설 장군님은……. 젊고 아름답고 선했던…… 강직한 얼굴에 누구보다 따뜻한 미소를 짓곤 하셨던 그분은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다.”
어느새 다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세라, 황궁에서는 서둘러 발란주 님의 혼사를 치러버렸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발란주 님은 하투 칸의 왕비가 되셨고 그분의 땅으로 떠나셨지.”
“…….”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었으니……. 죽고 싶으셨겠지. 하지만 발란주 님은 죽을 수 없으셨어. 왜냐하면…….”
“그 배 속에 대장이…… 있었으니까…….”
말을 잇지 못하는 다와를 대신하여 효령이 대답했다.
흐읍. 다와가 얼른 눈물을 훔쳤다.
“그래. 불행하셨지만 발란주 님은 최선을 다해 사셨어. 설 장군님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선물을 지키기 위해서……. 다행히 하투 칸께서는 발란주 님을 아껴 주셨단다.”
하. 숨을 고른 다와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투 칸께서는 여느 기탄 사내들과는 달리 발란주 님을 강제로 취하지도 않으셨고, 그 배 속에 든 아이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어. 하지만 발란주 님의 출산 날이 되었을 때…….”
“…….”
“우린 너무 두려웠어. 태어나는 아이가 혹 딸이면 몰라도 아들이라면 죽을 게 뻔하니까. 기탄 사내들은 적에게 몸을 버린 여인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지만…….”
“…….”
“끌려갔다 온 여인이 낳은 첫 번째 아이는 죽이는 게 보통이야. 적의 핏줄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대부분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지도층의 혈통에 대한 집착은 기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명문화된 법률이 없는 데다 부족 중심 사회인 기탄에서 정통성과 권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이 바로 혈통 그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이방인이나 외국계 포로들에게도 비교적 너그러운 사회 분위기와는 모순되는 현상이었다.
“그래서요?”
효령이 가슴을 졸이며 물었다.
“발란주 님을 기탄의 국경 근처에서 되찾았을 때. 하투 칸께서는 이미 발란주 님이 설 장군님의 여인이 되었다는 걸 아셨어. 추위로 온몸이 얼어붙은 채 죽어 가는 발란주 님을 구하기 위해…….”
“…….”
“그분의 옷을 벗기고 하루 밤낮을 직접 품으셨으니까. 발란주 님의 몸에 남은 옅은 사랑의 흔적들을 못 보셨을 리 없지.”
“…….”
“그런데도 발란주 님이 왕자님을 출산하시는 날까지 그에 대한 어떤 것도 묻지 않으셨어. 좋게 말하면 과묵하고 달리 보면 지독하리만큼 무서운 분이지.”
숨이 막히는지 다와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왕자님이 태어나시자, 발란주 님과 내 걱정은 현실이 되었어. 처소에 들어온 하투 칸께서 아무 말도 없이 왕자님을 데려가려고 하셨으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대장은 어떻게……?”
“발란주 님은 온전치 않은 몸으로 하투 칸께 매달렸어. 그 아이는 자신의 목숨이니 제발 살려달라고. 아이가 죽으면 자신도 살지 못한다고. 그때 하투 칸께서는…….”
“…….”
“마치 칼에라도 찔린 것 같은 표정을 하셨단다. 상처받은 짐승의 눈……. 우습지? 우리 왕자님은 칸의 친아드님이 아닌데…… 눈과 그 표정만은 그분을 쏙 빼닮았으니.”
다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칸 전하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해. 그분이 얼마나 절망하셨을지. 그렇게까지 참으며 인내하는 걸로 자신의 사랑을 보였는데 몰라주는 발란주 님이 야속하셨겠지.”
“…….”
“발란주 님은 적에게 납치를 당한 게 아니라 자기 발로 달아난 거였으니까. 그런 상황에 화를 내지 않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
“…….”
“아무리 하투 칸이 대단한 분이라도 그분 역시 사랑에 빠진 사내인걸. 자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발란주 님의 허물은 애써 눈감아줄 수 있다 해도, 그날의 기억을 자꾸만 상기시키는 왕자님의 존재는 받아들이기 어려우셨겠지.”
다와가 효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릇이 큰 분이셨다. 발란주 님의 눈물 어린 애원을 저버리지 않으셨으니까. 하투 칸께서는 발란주 님이 온전한 왕비가 되는 것을 조건으로 왕자님을 살려 주셨어.”
“…….”
“이후 발란주 님은 하투 칸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정성을 다해 섬기셨지.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설 장군님과 함께였을 때처럼은 될 수 없었단다.”
“…….”
“세상에 발란주 님을 웃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왕자님뿐이셨어. 발란주 님은 어린 왕자님께 안야국 말을 가르치고 끊임없이 안야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지. 하지만 그게…….”
“하투 칸께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겠군요.”
“그래, 맞아.”
다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란주 님이라고 그걸 왜 모르셨겠니. 하지만 그분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설 장군님은 발란주 님에겐 절대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마치…….”
“…….”
“한 몸처럼 죽기 전엔 절대 떼어 낼 수 없는 사이…….”
“…….”
“만약 그때 발란주 님께서 조금만 더 나이가 많으셨다면, 지혜롭게 대처하셨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에겐 자신을 추스르는 것만도 벅찰 만큼 힘든 시기였어.”
“…….”
“발란주 님은 황궁을 떠난 것으로 태후마마의 손을 벗어났다고 생각하셨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지. 그곳엔 태후마마의 종손녀인 하투 칸의 후궁 마마들이 버티고 계셨으니까.”
“귀빈, 영빈마마 말씀인가요?”
“그래. 하투 칸의 전 왕비께서 돌아가셨을 때. 태후마마는 그 자리에 귀빈마마를 앉힐 작정이셨어. 그 계획을 무너뜨린 것이 하필 오래도록 눈에 거슬렸던 발란주 님이셨던 게야.”
“어쩜…….”
효령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딜 가든 고통이 따라다니는 발란주의 운명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태후마마를 뒤에 업은 귀빈과 영빈마마는 거리낄 것이 없었지. 아예 다른 후궁들까지 끌어들여 대놓고 발란주 님을 무시하고 괴롭혔어.”
“…….”
“나이도 열 살 이상이나 많은 데다 이미 그곳 왕실을 장악한 후궁마마들과 다투기엔 발란주 님은 너무 경험이 없으셨어. 게다가 하투 칸 전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
“모든 걸 그저 참아 넘기셨지. 귀빈과 영빈마마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발란주 님을 지켜줄 수 있는 건 하투 칸뿐이셨어. 하지만…….”
다와가 안타까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 외사랑에 그분도 이미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하루가 지날수록 왕자님은 그 아버지인 설 장군님을 닮아갔어. 그러니 하투 칸께서는 자연 왕자님을 멀리하실 수밖에…….”
“…….”
“아무것도 모르는 왕자님은 하투 칸께 인정을 받으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 늘 홀로 종종거리셨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 참고 노력하는 게 버릇이 되셨어. 하지만…….”
“…….”
“그럼에도 발란주 님과 왕자님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었지. 그즈음 왕자님을 대하는 하투 칸의 태도를 수상쩍게 여긴 귀빈마마는 왕자님의 태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
“…….”
“뭔가가 있지 않고서야 하투 칸께서 그토록 뛰어난 왕자님을 꺼리실 이유가 없으니 말이야.”
“…….”
“태후마마를 통해 발란주 님이 달아났다 잡혀 왔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그분들에게 발란주 님은 더 이상 왕비마마가 아니었어.”
“…….”
“하투 칸께서 전쟁터를 전전하시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시는 사이, 후궁마마들은 발란주 님을 더럽고 추악한 여자라며 한껏 야유하고 모욕했지. 거기다 갖은 저주와 주술을 써 그분을 죽이려 들었어. 그것만으로도 괴로운데…….”
다와의 눈이 다시금 벌게졌다.
“왕자님마저 형님이신 다른 왕자님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했으니……. 특히 귀빈마마의 아들이신 둘째 왕자님은 마치 자신이 세자라도 된 양 형제들을 부추겨…….”
“…….”
“어린 왕자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험한 소릴 골라 하셨다. 어머니 발란주 님에 대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험담까지. 참다못한 왕자님이 그분을 때려눕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