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숨겨진 사연 1
* * *
“내 뒤를 이을 세자가 돼라.”
순식간에 궁려 안이 술렁대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투 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늘 연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귀빈과 영빈, 현빈이 경기라도 하듯 소스라치게 놀라 비틀거렸다.
그러나 누구보다 경악한 사람은 발리안이었다. 말문을 잃은 그가 벌건 눈으로 하투 칸을 노려보았다.
“그 승부,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제가 이기면…… 평생 그따위 역겨운 소린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마십시오.”
어느새 승부는 모두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그러니 말해 주세요, 다와. 더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요.”
효령이 다와를 붙들고 사정했다.
지금 산시의 궁려엔 두 사람뿐이었다. 하투 칸이 낸 마지막 문제를 푸는 데 하루의 말미를 얻은 효령은 교기, 시타와 함께 조금 일찍 숙소에 돌아왔다.
발리안과 호독니는 아직 황궁의 연회에 남아 있었다.
때마침 효령은, 바쁜 발리안을 대신하여 군사들을 살피고 있던 다와와 마주쳤다.
연회가 벌어지면 바빠지는 궁녀들과 달리, 후궁의 행정과 재정을 맡고 있는 다와는 상대적으로 한가해졌다. 때문에, 일을 마치고 곧장 이곳에 들른 길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효령은 다짜고짜 다와를 산시의 처소로 이끌었다. 그리고 오늘 연회에서 벌어진 일들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대장이 왜 형제들을 죽였나요? 그리고 하투 칸께서는 왜 이제야 대장을 세자로 삼으시려는 건지……. 그럴 거면 진작 따뜻하게 대해 주시면 좋았잖아요.”
효령이 마치 제 일처럼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효령아. 웬만하면 네게 다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다와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는 참지 못한 효령이 내내 입 안을 맴돌던 말을 꺼내 놓았다.
“하투 칸께서 대장을 인정하지 않으신 건…… 대장이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인가요?”
당황한 다와의 눈썹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효, 효령이 네가 그걸 어떻게…….”
“사실 전, 대장의 친부 되시는 분의 집안과 먼 친척이에요. 대장도 알고 있어요.”
털썩. 다와가 그예 산시의 침상에 주저앉았다.
“그, 그랬구나. 그래서 네가…….”
다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바닥을 응시했다.
“앉아라. 긴 이야기니까.”
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효령은 다와가 시키는 대로 침상에 걸터앉았다.
다와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황궁에서 장공주님, 당시에는 공주셨던 발란주 님을 모시던 여관이었다. 발란주 님이 누군지 알지?”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장 어머님이시잖아요.”
“그래. 꿈처럼 아름답고 그래서 더 안타까운 분이었지.”
옛 기억을 더듬는 다와의 눈이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발란주 님의 어머닌 선대 대칸에 의해 먼 나라에서 약탈혼으로 끌려온 분이셨단다.”
마자란족 출신인 발란주의 어머니는 모두가 경탄할 만한 미인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태양을 닮은 황금빛 머리칼, 하늘을 옮겨놓은 듯 맑고 푸른 눈. 스스로 원한 일이 아님에도, 그녀는 누구도 본 적 없는 아름다움으로 선대 대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는 당시 황후였던 태후의 미움을 받아야만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모진 핍박과 마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발란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이후, 태후의 적의는 모조리 그 딸인 발란주를 향했다.
“태후마마는 발란주 님을 볼 때마다 그 창백한 피부와 파란 눈이 끔찍하다고 하셨어. 태후마마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후궁들과 배다른 자매들까지. 발란주 님은 황궁에서 철저히 외톨이가 되셨단다.”
저도 모르게 효령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명국공부에 살다 처음 황궁에 들어갔을 때, 자신도 겪은 일이었다.
엄연한 장공주임에도 그녀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효령이 궁에서 살았던 2년 남짓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걸 알기에 발란주의 고통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경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우심에도 불구하고 발란주 님은 자신의 외모를 혐오하셨지. 총명한 분이 남과 자신이 만든 껍질에 갇혀 위축된 채 사셨다. 그분에게 친구라고는 서책과 활뿐이었지.”
“…….”
“그렇게 황궁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고통받으며 사셨지만, 아무도 그분이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발란주 님이 막 열다섯 살이 되셨을 무렵부터…….”
“…….”
“주변국과 동맹국들에서 청혼이 이어졌다. 새로이 황궁에 드는 젊은 중신들과 무사들, 군사들도 모두 그분을 흠모하고 따르기 시작했지. 그러던 어느 날…….”
“…….”
“선대 대칸을 비롯하여 황실 가족과 여러 칸들이 참여한 사냥 대회에서 발란주 님이 위기에 처한 태자 전하, 지금의 대칸을 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대칸께서는 곰을 사냥하시느라…….”
“…….”
“등 뒤의 눈표범을 미처 보지 못하셨거든. 그때 대칸을 덮치려는 눈표범을 화살로 쏘아 맞춘 게 발란주 님이셨어. 대칸께서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어린 누이가 자신을 구했다며 기특해하셨지.”
“…….”
“이후 대칸께서는 발란주 님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무척이나 아끼셨단다. 하지만…….”
후. 다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태후마마는 그것마저 곱게 보지 않으셨어. 자기 아들의 목숨을 구한 발란주 님을 두고 오라비마저 홀린 불여우라고 욕하셨지. 그리고는 발란주 님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기 위해 혼처를 물색하기 시작하셨다.”
“…….”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발란주 님이니 좋은 혼처를 찾으셨을 리 없지. 일부러 멀고 험한 곳, 성정이 고약한 나이 든 상대를 고르셨단다.”
“…….”
“하지만 대칸께서 직접 나서 태후마마를 설득한 바람에 그 일은 없었던 일이 됐단다. 하지만 태후마마의 핍박은 그 뒤로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발란주 님은 또다시 크게 상처를 받으셨지.”
“…….”
“처소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누이를 위해 대칸께서 스승 겸 말동무로 보내신 게…… 당시 포로로 끌려오셨던 안야국의 젊은 장수였다. 설규한. 그게 그분의 이름이었지.”
설규한. 다시금 듣게 된 그 이름에 효령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두가 이른 나이에 아깝게 죽은 줄만 알았던 그분이 사실은 기탄에 살아 계셨다니. 절로 코가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처음 그분을 뵈었을 때,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전투 중에 머리를 크게 다치셨다 들었다.”
설규한은 대현국과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지략과 학식이 워낙 뛰어난 까닭에 그걸 주목한 부족장에 의해 당시 태자였던 기탄의 대칸에게 바쳐졌다.
설규한의 인품에 반한 대칸은 포로임에도 그를 손님으로 귀히 대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분이 발란주 님께 그러셨다더라. 하늘과 강은 무채색인데 왜 파랗게 보이는 줄 아느냐고. 그건…… 하늘은 수도 없는 사람들의 염원이 닿아 파랗게 물들었고…….”
“…….”
“강은 사람들의 눈물이 모여 푸르른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공주님의 눈이 꼭 하늘과 강을 닮았으니 그래서 존귀하고 또 그래서 슬프다고.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눈은 본 적이 없노라고.”
“…….”
“서툰 기탄 말로 하시는 그 말씀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셨대. 시를 읊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찌나 따뜻하던지. 가슴에 뭉친 응어리가 한순간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셨다나.”
다와가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분은 곧 사랑에 빠지셨어. 이후로 발란주 님은 완전히 변하셨지. 아름답지만 늘 쓸쓸해 보이던 얼굴이 미소로 환해지셨어. 같이 말을 타고 달리는 두 분은 정말 그림처럼 완벽한 한 쌍이었지. 하지만…….”
“…….”
“그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한 분은 공주님이고 한 분은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포로일 뿐이니. 두 분 다 언제 깰지 모르는 꿈을 꾸고 계셨던 게야. 그러다 결국…….”
“…….”
“발란주 님의 혼처가 정해졌단다. 태자이신 대칸께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실 수 있는 데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때 발란주 님의 나이 열일곱이셨어. 열다섯이면 혼인을 하는 다른 분들에 비하면 늦은 나이였지.”
“그 상대가 하투 칸이셨나요?”
다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투 칸께서는 전부터 발란주 님을 마음에 두고 계셨지만, 자신의 나이 이미 서른에 가까운 데다 왕비는 물론 거느린 후궁들도 있어 애써 포기하셨단다. 하지만…….”
“…….”
“그즈음, 하투 칸의 왕비께서 돌아가셔서 그 자리가 공석이 되었어. 그래서 선대 대칸께서 먼저 혼인을 제안하신 게야. 하투 칸은 선대 대칸께 있어 껄끄러운 데다 위협적인 인물이었거든.”
“…….”
“그런 하투 칸께서 발란주 님을 좋아하신다니. 선대 대칸께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지. 이제야말로 하투 칸을 온전한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급히 혼담이 추진되었다.”
“…….”
“발란주 님은 설 장군님을 부둥켜안고 내내 우셨어. 어디든 좋으니 자신을 데리고 달아나 달라고. 당신 아닌 다른 사람은 싫다고.”
“…….”
“그때마다 그분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눈으로 서글피 웃기만 하셨어. 왜 안 그렇겠니? 자신은 가진 것도 갈 곳도 없는 포로일 뿐인데. 그분이 아는 기탄은 겨우 황궁이 다였단다.”
다와가 효령을 보며 아린 미소를 지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하늘은 어쩜 그리 잔인한가……. 두 분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셨지만, 결국 자신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인정하셨어.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았는데…….”
“…….”
“하필 그때 그분의 기억이 돌아온 게야. 그것도 하투 칸께서 발란주 님께 선물로 보낸 안야국 물건을 보시고는.”
“네?”
놀란 효령의 목으로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엇이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