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위험한 내기 3
* * *
“개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효령의 대답에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란이 일었다.
“뭐, 뭐라, 개미?”
경악하는 절도 칸과 참석자들을 위해 효령이 찬찬히 경위를 설명했다.
“아까 칸께서는 이 벽옥 구슬의 안쪽이 구불구불 어지러이 휘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그 모양이 꼭 개미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효령이 또랑또랑 설명을 이었다.
“개미를 잡아 그 허리에 실을 묶고 구멍에 집어넣었습니다. 나오는 쪽 구멍에 꿀을 발라두었더니 개미가 그 냄새를 좇아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왔습니다. 하여 보시는 것처럼 무사히 실을 꿸 수 있었습니다.”
“과연!”
“세상에, 그런 방법이 있었구먼.”
“하. 참 기가 막히네.”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젠 납득이 되셨습니까?”
절도 칸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 효령이 실을 꿴 벽옥을 다시금 방석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대칸의 수하에게 전했다.
“이것을 대칸께 올리십시오.”
그녀가 다시금 절도 칸과 좌중을 향해 말했다.
“절도 칸께서는 지난번 안야국 사신들이 이 문제를 못 풀었다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분들은 이 문제를 못 푼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안 푼 것입니다.”
“뭐, 뭐라?”
절도 칸의 얼굴이 더는 못 보아줄 지경으로 구겨졌다.
“절도 칸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벽옥 구슬에 실을 꿰는 자는 여러 나라를 다스리는 크고 위대한 황제가 된다고 말입니다. 안야국 사신들이 만약 이 문제를 풀었다면…….”
“…….”
“그들은 손님이 되어 주인이 받아야 할 복을 가로채는 파렴치한이 될 것 아닙니까? 그들은 기탄 사람이 아니라 안야국 사람이니 말입니다.”
열이 오른 절도 칸이 소리를 높였다.
“네놈 말대로라면…… 안야국 사람인 네놈이 이 문제를 푼 것도 대칸께는 무례가…….”
“아뇨.”
효령이 야무지게 대답했다.
“전 안야국 출신이지만 대도위님의 수하입니다. 대도위님의 주인은 다름 아닌 대칸이시고요. 하니…… 이는 대도위님을 저 실 삼아 대칸께서 너른 세상의 주인이 되신단 뜻입니다.”
“뭐, 뭐라…….”
효령이 할 말을 잃은 절도 칸 대신 대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벽옥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
분한 얼굴로 얼어붙은 절도 칸과는 달리 좌중들 틈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옳은 말이야. 정말 대단하군.”
“이건 두말할 것 없는 대도위님의 승리야.”
기나긴 탁자의 중간쯤에 앉은 안야국 사신단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사람들의 머리통에 가려 문제를 푼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덕분에 잃었던 명예를 회복한 셈이었다.
‘후. 이제야 얼굴을 들고 다니겠구먼.’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는 달리, 귀빈 일파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아까 자신들을 노려보던 발리안의 눈빛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혹여 그가 이 승부의 대가로 자신들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그녀들의 손이 진땀으로 젖어 드는 찰나, 대칸이 입을 열었다.
“대도위이자 내 양자인 발리안이 참으로 지혜로운 수하를 얻었구나.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 내기의 승자는 바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칸.”
절도 칸이 승부를 가름하려는 대칸을 말리고 나섰다.
“아시는 것처럼 이 문제는 제가 얼마 전 안야국 사신단에게 냈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모르는 자가 없지요. 하니 저자가 그 소식을 듣고 미리 답을 준비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
“이게 저자 혼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지 어찌 확인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이것 하나만으로 승부를 결정 짓는 건 부당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처음 접한 효령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절도 칸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하면…… 어찌하자는 것이오?”
절도 칸이 기회를 만난 듯 눈을 번득였다.
“승부는 삼세판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게 두 번의 기회를 더 허락해 주십시오.”
“어찌하겠나, 대도위?”
눈으로 효령의 의사를 확인한 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좋다. 그럼 이리하지. 절도 칸이 마음대로 내기의 방법을 바꾸었으니 이는 대도위 측에 전적으로 불리하오. 하니 승부는…….”
대칸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세 번 중 두 번을 이긴 쪽의 승리로 하고, 만약 대도위 측에서 이 내기와 관련하여 요구하는 사항이 있을 시에는 똑같이 수용하겠소. 알겠소?”
“그러겠습니다, 대칸.”
절도 칸이 대칸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곧 두 번째 승부가 시작되었다.
탁, 탁, 와르르.
효령의 눈앞으로 순식간에 나무들이 쌓였다. 위아래의 폭과 두께가 일정하게 잘린 삼십여 개의 재목들은 황궁의 침상을 만들기 위해 손질된 것들이었다.
언제 당황한 적이 있었냐는 듯, 사악하게 눈을 빛낸 절도 칸이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었다.
“그것들의 위아래를 알아맞히는 것이 두 번째 문제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아니, 나무들이 꼭 찍어낸 것처럼 매끈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위아래를 구분해? 그게 말이 되나?”
“그러게 말이야. 한 번 지고 나더니 절도 칸께서 생떼를 부리는 모양이구먼.”
“쯧쯧, 내 이럴 줄 알았지. 절도 칸을 상대하는데 뒤끝이 좋을 리 없지. 그 막무가내인 성격이 어디 가겠나?”
“맞네. 억지를 부려도 정도껏 해야지, 하여튼……. 대체 무슨 재주로 저것들의 위아래를 가리겠나?”
“저자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이번엔 어려울 것 같네.”
“나도 동감일세.”
여기저기서 야유와 비난 비슷한 소리가 쏟아져나왔다.
“……!”
재목을 앞에 둔 효령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예상 밖의 난제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절도 칸의 입매가 비릿하게 휘어졌다.
‘한 번 운이 좋았다고 우쭐하지 마라, 애송이. 그동안 내가 그 잘났다는 안야국 사신들을 상대하면서 이 정도 대비도 안 했을까. 이번만은 네놈도 답을 찾기 어려울 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효령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혹 저 나무토막보다 더 큰 통을 구할 수 있을까요?”
“준비하겠네.”
“그럼…….”
효령이 대칸의 수하에게 다가가 뭐라 귓속말을 했다.
탁. 잠시 후 모두의 눈앞에 커다랗고 긴 구유가 놓였다.
수십의 말들이 한꺼번에 먹이와 물을 먹을 수 있을 만한 엄청난 크기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물동이를 든 궁녀들이 줄지어 궁려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콸콸콸콸콸, 구유 안에 가득 물이 채워졌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효령이 구유 곁에 다가섰다.
“부탁해요, 시타.”
그녀의 고갯짓에 시타가 재목 하나를 물에 던져 넣었다.
풍덩.
잠시 물에 떠 있는가 싶던 재목이 이내 꼬르륵,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효령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됐어요, 시타. 이제 건져 줘, 교기야.”
시타가 재목을 물에 던지면 교기가 그것을 건져내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효령은 교기가 건져낸 재목에 무언가 표시를 했다. 그녀의 발밑으로 차곡차곡 물에 젖은 재목들이 쌓였다. 마침내 효령이 절도 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 되었습니다. 점이 찍힌 게 윗부분 아무 표시도 없는 쪽이 아랫부분입니다.”
“……!”
뜨아. 모두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대체 이건 또 무슨 조홧속인지.
다들 어찌해야 하나 가늠조차 안 되는 문제를 이리 쉬이 해결하다니.
특히 절도 칸의 얼굴은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하게 구겨졌다.
“마, 말도 안 된다. 딱 봐도 어느 쪽이나 똑같은 나무의 위아래를 그렇게 금세 알아내다니. 네놈이 지금 나를 속이려는 것이냐?”
“제가 하는 걸 보고도 아직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효령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아실 겁니다. 나무는 뿌리 쪽이 무겁고 가지 쪽이 가볍다는 것을요. 아무리 껍질을 벗기고 밀고 다듬어 자른다 해도 그 성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여…….”
“…….”
“물에 던져 보았지요. 무거워서 먼저 가라앉는 쪽이 당연히 뿌리에 가까운 쪽, 아랫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보고 안 것입니다.”
이번 승부도 더는 볼 것이 없었다. 효령과 발리안의 승리였다.
짝짝짝!
짝짝짝짝짝!
대칸의 판결을 듣기도 전에 그들을 향해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정말 탄성이 나올 만큼 지혜롭고 기가 막힌 답이었다. 거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너나 할 것 없이 절로 입이 벌어지고 고개가 내둘러질 지경이었다.
“……!”
절도 칸과 그 누이인 귀빈, 영빈이 분을 못 이겨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들과 떨어진 곳에 앉은 황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굳은 기색만은 감출 수 없었다.
그와 반대로 시타는 한껏 웃고 있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발리안과 효령, 교기의 몫까지. 늘 험악한 인상이던 호독니의 입매마저 어느새 느슨하게 풀어졌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기를 지켜보고 있던 대칸이 이 승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이번 내기도 대도위의 승리요. 하여 아까 말한 대로 이번 승부는…….”
순간, 내내 침묵하고 있던 하투 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칸께 청이 있습니다.”
“……?”
“이 승부를 끝내기 전에…… 제가 절도 칸을 대신하여 마지막 문제를 내도 되겠습니까?”
“하투 칸.”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럽니다. 이 승부에 대한 최종 선언은 그 후에 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대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그가 발리안에게 직접 물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
발리안이 차가운 얼굴로 대꾸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아까 세 번의 승부를 겨루겠다 말한 사람은 네가 아니더냐?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두려워 피하려는 것이냐?”
“제가 언제 두렵다 했습니까? 세상엔 싫어서 피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리안.”
순간, 발리안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예. 예전부터 칸께서는 절 늘 그렇게 부르셨죠. 한데 어쩝니까? 전 더 이상 그때의 리안이 아닌 것을.”
“…….”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칸께서 저와 승부를 겨뤄 얻고 싶으신 게 대체 뭡니까?”
“내가 이기면…….”
하투 칸이 발리안을 뚫어질 듯 똑바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