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위험한 내기 2
* * *
발리안이 살벌한 눈으로 절도 칸을 바라보았다.
“절도 칸께서 지시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 그야…….”
절도 칸의 미간이 일순 구겨졌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한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를 대신하여 보좌에 앉은 대칸이 말했다.
“내기는 공정해야 하는 법. 대도위가 절도 칸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 했으니 절도 칸도 응당 그리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대칸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대칸의 질문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입이라도 맞춘 듯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이런…….
절도 칸이 지긋이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발리안, 이 오만한 놈 같으니. 내가 무슨 문제를 낼 줄 알고……. 그건 절대 사람의 힘으론 풀 수 없는 문제야.’
그렇게 확신함에도 발리안이 보이는 지나친 자신감에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발리안이 누구던가. 남다른 지략과 교활함으로 다 진 싸움의 승패도 예사로 뒤집는 놈이었다.
그러기에 대칸이 친자식보다 더 그를 아끼는 것일 터.
괜스레 초조한 기분이 들어 절도 칸의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러나 대칸의 보좌 아래 앉은 황후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풀어졌다.
‘그래, 내 뒤엔 고모님이 계시다. 고모님이 계획한 일이 언제 잘못된 적이 있었나. 쓸데없는 걱정이야.’
속이 후련해진 그가 흔쾌히 대답했다.
“대칸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대도위. 내게 무얼 원하는가?”
절도 칸의 질문에 발리안이 힐끗 귀빈과 영빈을 쳐다보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들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건 이기고 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를 대신하여 승패의 판정은 내가 하지. 그럼 시작하시오, 절도 칸.”
“예, 대칸.”
절도 칸이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순간, 연회장은 갖은 모략과 술수가 판치는 투쟁의 장이었다.
발리안 또는 효령과 관련된 사람들이 저마다의 계산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배짱이 좋은 거야, 아님 무모한 거야? 문제가 뭔지 알고나 까부는 거냐고?’
요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도 우스웠다.
발리안과 효령이 안야국의 명예를 위해 위험한 도박을 벌이는 것도, 자신이 적인 그들을 염려하는 것도. 그들이 질 것이 너무도 뻔해서인지 이젠 연민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제발 무슨 수를 써서든 이기라고. 죽을 때 죽더라도 안야국과 내 체면은 살려 놓아야 하지 않겠어?’
수염으로 거뭇한 발타고의 입매도 비릿하게 비틀렸다.
‘역시 어머닌 못 당하겠군.’
그가 힐끗 황후를 쳐다보았다. 왁자한 소란 속에서도 그녀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조용히 유주를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가 웬일로 눈엣가시 같은 발리안 놈을 오래도록 참아준다 했더니……. 그것도 이제 끝인 모양이로군. 흐흐.’
역시. 사람을 밟아 누르는 데는 황후를 따를 자가 없었다.
안야국 사신들 일로 요희의 콧대를 꺾은 그녀가 드디어 대칸의 양자가 된 발리안을 향해 칼을 뽑아 든 모양이었다.
사실 절도 칸의 성질이 불같다고는 하지만, 그는 절대 황후와 상의 없이 홀로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었다.
‘잘하셨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적당히 밟아 놓으시면 마무리는 제가 하지요. 사실 그냥 죽이려니 재미가 없던 참인데……. 존경합니다, 어머니.’
그 멀지 않은 곳에 앉은 귀빈과 영빈도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고모이신 황후마마와 오라버니께서 나서셨으니 발리안 저놈이 당하는 건 시간문제겠지?’
‘그럼요, 언니. 황후마마야말로 이 황궁 안에서 가장 무서운 분이 아닙니까? 황후마마께서 태자에게 위협이 되는 발리안 놈을 가만두고 보실 리가요.’
그들에 더해, 표정만으로는 속을 읽을 수 없는 대칸과 하투 칸까지.
멋모르고 잔뜩 기대에 부푼 좌중들 틈으로 미묘하고 위험한 기류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
* * *
“가져오게.”
절도 칸의 고갯짓으로 드디어 발리안과 그 사이의 내기가 시작되었다.
“알겠습니다, 칸.”
정중히 대답한 대칸의 수하가 커다란 나무함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다가오는 사이. 발리안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효령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애를 써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침착함을 되찾으려 효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
탁.
그 틈에 발리안과 효령 앞 탁자 위에 오늘의 문젯거리가 놓였다.
“……!”
천천히 눈을 뜨는 효령의 시야 안으로 짙은 갈색의 나무쟁반이 들어왔다.
거기에는 붉은 비단 방석이, 그 정중앙에는 신비로운 벽옥 구슬과 명주실이 얹혀 있었다. 초록 바탕에 피 같은 붉은 점이 흩뿌려져 있는 벽옥은 한눈에 보기에도 귀해 보였다.
효령과 발리안을 비롯하여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절도 칸이 그 벽옥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대칸과 7황비마마의 혼인을 기념하여 대칸께 바치기 위해 가져왔던 벽옥이다. 저 멀리 서역에서 어렵게 구해 온 아주 귀한 것이지.”
“…….”
“서역에는 그 구슬과 관련하여 오래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구슬을 얻는 자는 한 나라의 왕이 되고 그 구슬에 실을 꿰는 자는 여러 나라를 다스리는 위대한 황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절도 칸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이 벽옥 구슬은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을 제외하고는 안쪽 구멍이 구불구불하게 휘어 있어 아무리 애를 써도 실을 통과시키기 어렵다. 하여…….”
“…….”
“많은 지혜로운 자들이 덤볐으나 이제껏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수하들은 물론 황궁의 날고 기는 중신들에게 물었지만, 누구도 그 방도를 찾지 못했다.”
“…….”
“내 마지막으로 그 학문과 식견의 수준이 남다르다는 안야국에 기대를 걸었건만. 그 사신들 역시 답을 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너 하나다.”
절도 칸의 입가에 음흉한 비소가 걸렸다.
“어떠냐? 이 문제를 풀 수 있겠느냐?”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연회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호기심 어린 이천여 개의 눈이 효령 한 사람에게 모였다.
“…….”
꿀꺽. 긴장한 효령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 곁에 앉은 발리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 갖지 마라. 그냥 모르면 모른다, 안 되면 안 되겠다, 말을 해라. 그럼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조금 전 발리안이 한 말이 효령의 귓가를 스쳤다.
‘알아요. 설사 내가 실패하더라도 대장이 날 구해줄 거라는 거. 하지만 오늘만은 안 돼요. 난 대장의 짐이 아니라, 도움이 되기 위해 곁에 있는 거니까.’
후. 효령이 긴 숨을 내뱉었다.
‘난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그러니 이번은 날 믿어요, 대장.’
마음을 다잡은 효령이 품 안의 비단 손수건을 꺼내 벽옥을 집어 들었다.
과연. 벽옥은 구멍이 일자가 아닌 탓에 맞은편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그것을 유심히 살피던 효령이 어두운 얼굴로 벽옥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럼 그렇지. 네놈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
절도 칸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려던 그때.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효령의 입에서 믿기 어려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뭐, 뭐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절도 칸의 목소리가 마치 비명 같았다. 효령이 그 대신 대칸에게 말했다.
“실을 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제게 잠시의 시간과 도울 자를 허락해 주십시오.”
“오냐, 그러마.”
대칸의 고갯짓에 그의 수하가 효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날 따라오게.”
“예.”
효령이 그를 따라 자리를 비운 후. 연회장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아니, 저기에 실을 꿸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한가?”
“말도 안 돼. 일자도 아니고 제멋대로 휘어진 구멍에 실을 꿰다니. 지금 저거…… 자리를 비우고 달아나려는 수작 아닐까?”
“저놈, 설마 너무 겁을 먹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니겠지?”
“그러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데…….”
“하지만 저자, 전혀 당황하지 않는 것이 방법을 찾았을지도…….”
“에이, 설마! 그게 사람 힘으로 가능해?”
모두가 웅성거리며 제각각 목소리를 높였다.
좌중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효령이 대칸의 수하와 함께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대칸의 질문에 효령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을 꿰어 보아라.”
“예.”
발리안 곁으로 돌아온 효령이 조심스럽게 실을 집어 들었다.
참석자들이 서로 잘 보겠다며 고개를 뺏지만, 워낙 사람이 많고 거리도 먼 탓에 쉽지 않았다. 그건 가까이 앉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크다고는 하지만 손가락 두 마디에 못 미치는 구슬이 효령의 손에 가려져 제대로 보일 리 만무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게야?”
“글쎄.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겠지.”
“나, 참. 궁금해 미치겠네.”
모두가 수군대며 떠드는 사이.
“다 되었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효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십시오, 자.”
눈을 반짝인 그녀가 모두의 눈앞에서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순간.
달랑달랑.
질기고 긴 명주실에 매달린 벽옥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벽옥이 지난 자리에 초록과 붉은색의 잔상이 아름다운 포물선이 그렸다.
그 믿기지 않는 장면에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정말 실이 통과했잖아?”
“이,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경악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마, 말도 안 돼!’
누구보다 놀란 것은 절도 칸이었다. 벽옥을 들고 잠시 꼼지락거리는가 싶더니 금세 실을 꿰다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홧속인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네놈이 무, 무슨 꼼수를 부렸기에……?”
당황한 절도 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꼼수 부린 적 없습니다. 머리를 썼을 뿐이지요.”
효령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이 벽옥을 살피고 있을 때. 주변에서 이렇게들 말씀하시더군요. ‘이건 절대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맞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요.”
“그, 그런데 무슨 수로 실을 꿰었단 말이냐?”
씨익. 효령이 절도 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