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위험한 내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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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좋았을걸.
거기서 들은 이야기들로 발리안이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효령은 겨우 그 정도로 쓰러지거나 진저리를 칠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이미 안야국에서도 겪은 일이 아니던가. 태후가 배다른 오라버니들은 물론 성락까지 죽여 없애는 장면을 모두 목격한 효령이었다.
야차라고 불렸던 발리안이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 기탄에 오면서 어느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었다.
‘대장, 여기서 어떤 세월을 보낸 거야?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형제들을 죽이는 무서운 사람이 된 거야?’
효령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간 발리안이 겪었을,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신산한 삶을 떠올리니 더럭 마음이 아팠다.
하……. 효령이 쓰린 속을 달래려 술을 들이켰다. 그녀가 막 빈 잔을 내려놓는 찰나, 시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효, 효령아.”
“……!”
그제야 효령은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왜요, 시타?”
시타가 대답 대신 턱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기탄의 북서쪽 절도 땅을 다스리는 칸. 그가 모두가 듣도록 커다란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대도위가 유능한 단사관 출신 모개 대신 데려온 게 저들이란 말인가? 멋모르는 이전이라면야 안야국 출신이라면 옳다구나 하겠지만 지금 같아선 영…….”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절도 칸의 말에 좌중이 왁자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
순간, 그것이 자신과 교기의 이야기임을 깨달은 효령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표정이 바뀐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내내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요희의 표정도 어느새 빳빳하게 굳었다. 효령과 교기 곁에 앉은 시타와 호독니도 마찬가지였다.
발리안을 쳐다보며 비소를 짓고 있는 하투 칸의 후궁들을 본 순간. 효령은 지금의 이 상황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발리안을 향하는 절도 칸의 눈빛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연회에서 안야국 사신들이 톡톡히 망신을 당했습니다.」
「‘안야국의 학문과 기예의 수준이 그토록 높다 하니 어디 그 실력 한번 보자’면서 칸 전하들이 그들을 시험하셨거든요.」
「안야국 사신들이 제대로 된 답은커녕 쩔쩔매며 진땀을 뺐습니다. 그 일로 그들의 콧대가 완전히 꺾였지요.」
이전에 다와가 말했던 그 일이 다시금 재현된 것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공격 대상이 요희가 아니라 발리안이란 사실이었다.
절도 칸은 지금 효령과 교기를 빌미로 발리안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나 때문에 대장이 모욕을 당하게 둘 순 없어.’
효령이 주먹을 움켜쥐며 결의를 다지는 사이에도, 절도 칸은 한껏 목청을 올렸다.
“그동안 우리 기탄의 문화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된 모양이야. 안야국 제일이라며 뽑혀온 사신들의 수준이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걸 보면. 그런 안야국에 무에 기대할 게 있다고…….”
시비를 거는 것이 분명함에도 발리안은 대꾸가 없었다. 절도 칸이 저리 나오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후의 조카이며, 태자비의 아비인 동시에 발리안을 원수로 여기는 귀빈과 영빈의 오라비였다.
도를 넘는 절도 칸의 무례는 분명 그들과 연관이 있을 터.
겉으로 호탕하게 웃고 있지만, 절도 칸의 눈 속에 자신을 향한 증오가 가득하다는 걸 모를 발리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섣불리 그 도발에 넘어갈 수 없었다.
발리안의 침묵에 의기양양해진 절도 칸이 더욱 기세를 높였다.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효령을 향했다.
“대체 저자의 어떤 점이 대도위의 마음에 든 것인지 궁금하군. 머리 쓰는 수준이야 그렇다 쳐도 위풍당당한 기세가 있나, 아니면 무예가 유별나게 뛰어나기라도 한가. 아……!”
절도 칸이 수염 가득한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인이 모자란 탓에 간혹 군사들 중엔 묘한 취향을 가진 자들이 있다던데…….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되는구먼, 으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그의 주변에 앉은 관리와 수하들이 주인을 따라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발리안을 누구보다 믿고 총애한다는 대칸은 그저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투 칸 역시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끼어들 생각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
절도 칸의 말과 태도는 거칠고 오만방자했지만, 이 정도 일은 기탄 내에서는 꽤 흔한 축에 속했다.
“그러고 보니 꽤 곱상하게 생겼군. 이거 나라도 혹할 만한 얼굴일세그려.”
절도 칸의 망발이 정점에 달했다. 그와 동시에 한껏 호기심에 달아오른 참석자들의 눈이 일제히 효령을 향했다.
“……!”
조금 전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효령이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제 온몸을 훑어내리는 노골적인 시선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당하는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이전에 발타고가 안야국 황궁에서 한 일은 여기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다.
“…….”
그녀가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입술을 사리물었다. 자신이 어찌 반응하느냐에 발리안의 체면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효령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대장이 살아온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기운 내, 진효령.’
그녀가 용기를 쥐어 짜내 고개를 들려는 순간. 이제껏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발리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가 안야국에 갔다가 새로이 알게 된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동요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에 들썩거리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래, 어디 한번 들어보지.”
절도 칸이 자비라도 베풀 듯 거만하게 말했다.
“기탄에서 한참 떨어진 저 아래 남방의 나라엔 코끼리라는 동물이 있답니다. 커다란 귀와 긴 코, 뾰족한 상아가 있는 기이한 생김새에 엄청나게 덩치가 큰 녀석이라지요.”
“…….”
“어느 날 그 나라의 왕이 맹인을 모아 코끼리를 만지게 한 후 물었답니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더냐?’”
“……?”
“그러자 상아를 만져본 자는 ‘무’와 같다고 했고, 귀를 만진 이는 ‘키’, 머리를 만진 이는 ‘돌’, 코를 만진 이는 ‘절굿공이’. 그 밖에 다리와 배, 꼬리를 만진 자는 각각 ‘널빤지’, ‘항아리’, ‘새끼줄’과 같다 했지요.”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건가?”
“송구하지만, 지금 절도 칸께서 하신 말씀이 그들과 다를 바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제야 발리안이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깨달은 절도 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옳은 것도 아닙니다. 절도 칸께서 겪어보신 안야국 사신이 대체 몇이나 됩니까? 백입니까, 천입니까?”
“…….”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을 상대하고는 마치 안야국 전체를 다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듣기 거북해서 말입니다. 이러다 안야국 사신들도 칸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
“…….”
“기탄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에도 아는 척 나대는 데다, 손님을 앞에 두고 모욕이나 일삼는 무지한 인간들이라 생각하면 어찌합니까?”
“뭐, 뭐라? 대, 대도위 자네 지금 말 다 했나?”
절도 칸이 연회장이 떠내려가도록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발리안의 입매가 비릿하게 움직였다.
“절도 칸보다 식견도 살아온 세월도 부족한 제가 겪어본 바로는, 기탄이나 안야국이나 무지한 자도, 뛰어난 자도, 어리석은 자도, 용맹한 자도 두루 있었습니다. 한데…….”
“…….”
“겨우 다리만 만져본 것으로 코끼리를 다 안다, 어찌 그리 자신하시는지. 절도 칸의 그 호기로움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절도 칸의 얼굴이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더욱 그의 분노를 부추겼다.
“지금 그 말은…… 저기 저 비실비실한 놈의 학식이 안야국 사신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그 말인가?”
“적어도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만.”
“그렇담 좋네.”
쾅.
요란하게 탁자를 치고 일어선 절도 칸이 대칸을 향해 말했다.
“대칸. 지난번 안야국 사신들에게 했던 질문을 저자에게 다시 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
대칸이 흔쾌히 허락했다.
와아! 참석자들 사이에서 함성이 일었다. 다들 예상치 못한 재미난 구경거리를 만난 탓에 흥분한 기색이었다.
“만약 내가 내는 문제에 저자가 제대로 된 답을 내지 못한다면 그땐 어찌하겠나?”
발리안을 노려보는 절도 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칸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지요.”
“그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발에 머리를 대고 사죄한 후 저자를 내게 넘기게.”
“……!”
상상을 뛰어넘는 말에 쿵, 하니 효령의 가슴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기탄에서 누군가의 발에 머리를 대는 것은 자신이 그의 노예임을 인정하는 행위라 들었다.
기탄의 사내, 특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에게 그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
당혹스러운 것은 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치욕이든 자신이 당하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거기 효령의 운명을 거는 것은…….
효령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건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성정 고약한 절도 칸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거나 꼼수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내내 거침없었던 발리안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쉬이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순간, 그의 등에 작은 손이 닿았다.
“…….”
뒤를 돌아보는 발리안을 향해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을 터. 게다가 이건 발리안뿐 아니라, 안야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맡겨줘요, 대장.’
효령이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감추며 애써 웃어 보였다.
“…….”
얼핏 발리안의 입가에도 미소가 스쳤다.
‘그래, 널 믿는다, 효령. 이 내기에서 이기든 지든 내가 널 믿는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난 널 절대 빼앗기지 않아.’
이내 절도 칸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가 단호히 말했다.
“칸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