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6
* * *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독기가 품어져 나왔다.
“왜? 칸과 우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든?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탁. 발리안이 다시금 올라오는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귀빈마마께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 만큼 제가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착각도 정도껏 하십시오. 마마의 무례를 인사치레로 참아줄 수 있는 건 한 번뿐입니다.”
“뭐, 뭐야?”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아직도 왕비 자리에 못 오르셨습니까? 그럼 더욱더 말과 행동을 조심하셔야지요. 제가 대칸의 양자가 되었단 소식도 못 들으셨습니까?”
“이런 때려죽일 놈!”
귀빈이 분을 참지 못하고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 틈에 그들 곁으로 달려온 다른 두 명의 여인이 그녀의 역성을 들었다.
“사람이 뻔뻔한 것도 분수가 있지. 대도위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새 잊었소? 대도위가 세자가 되려는 욕심에 생떼 같은 우리 자식들을…….”
“맞소이다. 아무 죄도 없는 우리 아이들을 그리 무참히 죽이고도 여기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러고도 대도위가 사람이요? 그들이 누구요? 대도위의 형과 아우, 피를 나눈 형제들이었지 않소?”
“……!”
차마 믿을 수 없는 말.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에 효령이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발리안과 그 아버지 하투 칸의 사이가 왜 그렇게 어긋났는지. 그리고 왜 다와와 시타가 그 일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는지. 그토록 궁금해하던 이유를 이렇게 뜻밖의 장소, 뜻밖의 순간에 알게 되다니.
너무도 엄청난 일에 효령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발리안은 당황하거나 흐트러진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엔 비릿한 비소가 번졌다.
“이런! 전 이제껏 제게 형제라곤 없는 줄 알았는데요. 그들이 단 한 번이라도 제게 형제였던 적이 있었습니까?”
“뭐, 뭐요?”
“여러 왕자들을 무참히 죽인 살인자란 비난은 들어줄 수 있어도, 형제를 죽였단 말은 도저히 못 참겠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두 분이 제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영빈마마, 현빈마마?”
발리안이 영빈과 현빈, 귀빈 앞으로 한 발 다가갔다.
“영빈마마, 현빈마마, 그리고 귀빈마마. 사람을 여럿 죽이나 하날 죽이나 살인자이긴 마찬가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분도 저와 다름없는 흉악한 인간이 아닙니까?”
순간, 세 사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 뭐…….”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대도위?”
“이보시오, 대도위!”
“제 앞에서 가엾은 피해자 행세는 하지 마십시오. 역겨우니까……. 제가 할 말이 없어 세 분을 참아 드리는 줄 아십니까?”
“…….”
“절 죽이지 않고 살려두신 하투 칸 전하의 얼굴을 보아 참는 겁니다. 자식 복이라곤 없는 그분이 아내 복이 없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시는 건 싫어서 말이지요. 그리고…….”
발리안이 말을 잃은 그들을 향해 빈정거렸다.
“애초에 제게 싸움을 걸어오신 건 여러분입니다. 전 거기 응했을 뿐. 여러분의 아들들이 죄가 없다고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부터가 빈마마들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는 증겁니다. 적어도 전…….”
“…….”
“마마들이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제 죄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웬만하면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발리안의 입매가 잔인하게 휘어졌다.
“제가 왜 마마들 대신 자식들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마마들을 죽이는 건 너무 시시해서 내키지 않았거든요. 무엇보다…….”
발리안의 얼굴이 어느새 싸늘하게 굳었다.
“꼭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왕비로 사시는 동안 내 어머니께서 당신들로 인해 느끼셨을 고통과 절망, 좌절을…….”
발리안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아직 미처 다 못 느끼셨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다시금 그 나락을 맛보게 해드릴 테니…….”
“네, 네 이놈…….”
귀빈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다른 두 여인은 겁을 먹어 아예 입을 열지 못했다.
“세 분이 감추고 있는 더러운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거든, 앞으로 조용히 지내십시오.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마시고요. 제 바닥이 얼마나 얕은지, 성미가 얼마나 더러운지는…… 잘들 아시지 않습니까?”
세 사람을 구석까지 몰아붙인 발리안이 에누리 없이 돌아섰다.
“그만 가자.”
“……!”
그들의 조금 떨어진 곳에 넋을 놓고 서 있던 효령과 시타, 호독니와 교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발리안만큼이나 굳은 얼굴이 된 호독니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시타와 효령, 교기도 민망함을 감춘 채 얼른 자리를 떴다.
“내가 이대로 당하고 있을 줄 아느냐?”
그들이 사라지자, 귀빈이 다 늦게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내 기어이, 네놈이 추락하는 꼴을 지켜보고 말 테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분노로 이를 사리문 귀빈이 동생인 영빈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난 황후마마를 뵈러 갈 테니, 넌 당장 오라버니께 가, 내 말을 전해라.”
“알았어요, 언니.”
영빈이 현빈을 데리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귀빈도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 * *
발리안이 궁려에 들어서자 시중을 드는 궁관들이 자리를 안내했다.
“대도위님, 이쪽입니다.”
대연회장으로 사용되는 궁려는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안야국의 정전을 세 개쯤 합쳐 놓은 엄청난 크기였다.
커다란 네 개의 황금 기둥이 놓인 높은 곳에 대칸의 보좌가 있었다. 그 바로 아래 가로로 길게 늘어선 탁자가 황후와 후궁들의 자리였다. 그 좌우로 지위와 관직에 따른 좌석이 지정되어 있었다.
발리안은 입을 꽉 다문 채 궁관이 일러 준 곳에 앉았다. 그 바로 뒤에 자리를 잡은 호독니와 효령, 시타, 교기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무거운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 연회의 참석자들이 속속 좌석을 채웠다.
태자 발타고와 그 부인들. 발타고와는 배가 다른 두 명의 황자들. 기탄의 동서남북을 다스리는 칸들과 그 가족. 그리고 조정 중신과 중소 부족의 사신들이었다.
저 멀리 효령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쪽에 안야국 사신단도 앉아 있었다.
“……!”
거의 맨 마지막으로 하투 칸과 그 후궁인 귀빈과 영빈, 현빈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공교롭게도 발리안 일행의 맞은편, 조금 떨어진 곳이 그들의 좌석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싸한 냉기가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대칸과 황후 마마께서 드십니다.”
드디어 대칸과 황후, 여럿의 황비와 후궁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 중에는 새로이 황비가 된 요희도 섞여 있었다.
“……!”
요희를 발견한 효령이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는 수십에 달하는 대칸의 후궁들 속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날씬하게 몸에 감기는 기탄의 의복 덕분에 얼굴뿐 아니라 몸매의 아름다움까지 더욱 부각되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좌중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 틈에 대칸이 상석의 보좌에 착석했다. 황금으로 장식된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는 하얗고 긴 수염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으로 가득한 얼굴. 그 눈에선 이지적인 광채가 번득였다. 거칠고 야만적일 것이라는 효령의 선입견과는 정반대였다.
“대칸과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대칸과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예를 갖췄다.
“무림제를 맞이하여 피를 나눈 혈맹들을 한자리에 모으신 천신께 감사를! 모두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 올 한 해도 크고 작은 위기가 많았으나 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 모두의 덕분이요.”
대칸이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여 나 기탄의 대칸은 천신을 대신하여 여러 칸들과 동맹국들에 감사를 표하는 바요. 오늘의 연회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서로의 우호를 확인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요.”
대칸이 모두를 향해 술잔을 들었다.
“앞으로 무림제가 끝날 때까지 이어질 긴 축제를 마음껏 즐기고, 좋은 교류의 시간을 갖게 되길 간절히 빌겠소. 그런 의미에서 다 함께 잔을 듭시다!”
“천신과 대칸께 감사를!”
참석자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며 잔을 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여흥을 돋우기 위한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활기찬 음악에 맞춰 무사와 무희들이 흥겨운 춤을 선보였다.
“……!”
수많은 사람 사이를 분주히 살피던 요희가 드디어 목표물을 발견했다.
대도위 발리안. 그는 외사촌인 황자들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사히 대현국을 빠져나오다니 운이 좋았군, 발리안. 하지만 그 운도 이젠 끝이……!’
순간, 요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발리안이 술병을 향해 손을 뻗느라 몸을 숙인 바람에 얼핏 모습을 드러낸 사람 때문이었다.
‘맙소사. 효령 장공주? 장공주가 어떻게 여길……?’
효령이, 여인이라면 누구나 몸서리를 친다는 기탄에 제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눈으로 보고도 차마 믿기 어려웠다.
설마…….
요희가 날카로운 눈으로 효령과 발리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역시 그런 거였군. 어쩐지 그날 두 사람의 입맞춤이 심상치 않다 했더니…….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된 거야? 그렇게 붙어 있는 게 소원이라면…….’
입가에 표독스러운 미소를 건 요희가 유유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두 사람을 영원히 함께 있게 해주지. 영원히 말이야.’
흥겨운 춤과 음률로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탁자에선 수도 없이 잔이 돌고 돌았다.
기탄의 연회는 안야국에 비해 훨씬 더 느슨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모두가 유쾌하게 웃고 떠들며 격의 없이 연회를 즐겼다. 그러나 효령과 시타 등은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대장.’
효령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요희의 존재도 잊은 채 발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옆 탁자에 앉은 황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발리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효령은 도무지 웃을 수도, 가벼이 떠들 수도 없었다. 마치 무거운 돌이 짓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대도위가 세자가 되려는 욕심에 피를 나눈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지 않소?」
하투 칸의 후궁들이 했던 말이 몇 번이고 귓가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