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5
* * *
발타고가 으스대며 말했다.
「천군 말이야.」
천군은 기탄을 대표하는 나라의 큰무당이었다. 현 천군은, 신력이 뛰어나고 성격이 꼿꼿하기로 유명했던 선대 천군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사실 선대 천군이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다른 제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스승의 장례를 마친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었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그대로 숨을 거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지금의 천군이 새 천군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일이 황후의 계략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천군을 바꿀 생각을 하다니. 내 어머니지만 가끔 소름이 돋는다니까.」
발타고가 히죽, 음흉하게 웃었다.
「기탄 사람이라면 대칸에서 백성들까지 누구나 천군의 말을 신뢰하지. 천군의 말은 절대적이야. 그러니 누가 감히 천군을 수하로 둔 내 어머닐 거역할 수 있겠나?」
요희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 정말 대단한 할망구네. 머리 쓰는 게 안야국 태후보다 한 수 위야. 이거 나도 함부로 나대지 말아야겠는데……. 어쩜 대칸을 해치우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영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요희에겐 황후의 상황을 살펴 알려줄 발타고가 있지 않은가.
오늘도 발타고는 여느 때처럼 시시콜콜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이봐. 이러다 곧 날이 샌다니까. 그만 화 풀라고. 내일부턴 이런 시간은 꿈도 못 꿀 테니 미리미리…….”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가 은근슬쩍 요희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내일은…… 왜 안 되는데요?”
요희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 것처럼 들리자 발타고의 얼굴에 당장 화색이 돌았다.
“그야 무림제 때문이지. 며칠 전부터 이미 칸들이며 무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니까. 동맹을 맺은 작은 부족들까지 전부. 심지어 안야국에 가 있던 발리안 놈까지……!”
무심히 말하던 발타고의 입매가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그 재수 없는 놈이 오늘 황궁에 들었다지?”
“대, 대도위가요?”
요희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맙소사. 발리안 그놈이 살아서 여길 오다니.
대현국에서 그를 처리하려던 계획은 어느 모로 보나 완벽했다. 한데 치밀하게 세운 계획의 어디에 구멍이 난 것인지.
안야국 무사들의 미숙한 일 처리에 확 짜증이 몰려왔다. 무능한 그들 탓에 요희의 일만 더 늘어난 셈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한 건 그녀보다 발타고 쪽이 더했다.
“놈이 도착했다는 소릴 듣자마자 아버지께서 불러들이셨다는군. 대체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다른 칸들보다 앞서 놈과 독대를 하신 것인지…….”
발타고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어쩌면…… 대도위를 치하하려고 부르셨을지도 몰라요.”
요희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대칸은 몰라도 발리안을 처리하는 데는 발타고만 한 사람이 없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치하?”
“지금 안야국에서 대도위의 명성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어느새 백성들은 물론 안야국의 크고 작은 상단까지 모조리 수중에 넣어서는…….”
그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안야국이 그의 천하가 되는 것은 아닌지 태후마마께서 걱정이 많으시다니까요. 만약 그가 딴마음을 먹는다면 안야국 황제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아니나 다를까. ‘황제’란 말에 발타고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뭐라? 놈이 삭주를 차지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기탄에 오는 길에 그곳에 들렸는데 대도위의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요희가 발타고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실은 나…… 그자가 무서워요. 밤늦은 시간 불쑥 내 침소에 들어와 날 훑어보던 그 눈길을 생각하면…….”
그녀가 두려움으로 진저리를 쳤다.
“만약 그때 궁녀들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두 번 다시 그자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애원하듯 발타고에게 매달렸다.
“내가 믿는 건 오직 당신뿐이에요, 발타고. 그러니 부디 당신이 날 지켜줘요. 그자가 날 해치지 못하게,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발타고의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발리안. 네놈이 다른 것도 아니고 감히 내 여자를 탐하다니……. 두고 봐라. 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니! 이런 빌어먹을 놈.”
발타고가 근래 본 적 없는 격분으로 살을 떨었다.
후훗.
시커먼 어둠 속에서 요희의 입꼬리가 요사하게 움직였다.
* * *
무림제가 보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기탄의 모든 칸과 그 가족들, 군사들, 무예 대회에 참석할 무사들이 속속 주도에 집결했다.
기탄의 추수제인 무림제는 장장 보름에 걸쳐 이어지는 대장정이었다. 청명한 가을의 첫날 새벽 이뤄지는 제사 의식을 시작으로, 3일간 전국 규모의 무예 대회가, 뒤이어 하루를 건너뛴 다음 날부터 열흘에 걸쳐 대칸과 칸들을 중심으로 하는 왕족 회의가 열렸다.
마지막 날에는 그간 왕족 회의에서 결정된 안건들이 선포되고, 내년의 무림제를 기약하는 의식이 벌어졌다.
그사이, 백성들은 무예 대회의 뒤풀이로부터 왕족 회의를 마치는 날까지 이어지는 긴 축제를 즐겼다.
거리 곳곳에서는 각종 공연과 춤, 매와 말의 묘기가 펼쳐지고 대규모의 장도 설 예정이었다. 그에 걸맞게 주도는 어마어마한 인파로 북적였다.
“이번 무예 대회, 정말 기대되지 않냐?”
따스한 볕과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은 오후. 황궁으로 가는 길에 시타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기탄은 차뉴, 하투, 절도, 구림, 막계 총 5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예 대회는 각 부족을 대표하는 무사들이 부족과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자웅을 겨루는 장이었다.
대결 종목은 활쏘기와 격투, 말타기의 세 가지. 분야별로 참가자만 이백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들 하나하나가 부족 내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쟁쟁한 실력자들이었다.
각 분야에서 우승한 자에게는 ‘눈표범’, ‘늑대’, ‘사슴’의 칭호가 주어졌다. 이 칭호는 한번 받으면 평생을 가기 때문에 무사들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영예였다.
“대장은 한 대회에서 눈표범, 늑대, 사슴의 칭호를 모두 받은 유일한 사람이야. 그래서 대장 때문에 새로운 말이 생겼어. ‘검독수리’.”
“그러니까 시타 말은 한 번에 세 분야의 우승을 다 거머쥔 사람을 ‘검독수리’라고 부른단 뜻이죠?”
“맞아.”
시타가 마치 제 일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대장은 왕자 때 그 검독수리 칭호를 네 번이나 연달아 받았대. 한 마디로 전설 같은 존재지.”
“그럼 이번 대회에도 참가해요?”
“아니, 아마 안 할걸.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해서 연습할 시간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원래 높은 사람들은 대회에 참가 안 하거든. 어릴 때라면 모르지만.”
“왜요?”
“우승할 자신이 있으면 몰라도 안 그랬다간 망신만 당하니까. 발타고 태자 전하가 그 대표적인 예지.”
시타가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렸다.
“거들먹거리며 나왔다가 완전히 쪽박 찬 신세가 됐다니까.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대장에게 번번이 졌으니 얼마나 창피했겠어? 그 꼴을 몇 번 당하고 나선 더는 안 나와.”
“아…….”
효령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시타. 우리 지금 황궁엔 왜 가는 거예요?”
“내가 말 안 했던가? 대칸이 여시는 연회에 참석하려고. 오늘부터 무림제가 끝날 때까지 황궁에선 크고 작은 연회가 끊임없이 이어져.”
오늘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모인 칸과 그 가족들, 동맹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대칸이 베푸는 첫 번째 연회였다.
무림제의 성공적 개최와 마무리를 염원하기 위해 중신들을 비롯하여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다.
기탄의 연회는 늦은 오후에 시작해서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발리안과 효령 일행이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궁 안 여기저기 그들보다 먼저 온 몇몇 부지런한 사람들이 눈에 뜨였다.
‘와!’
그들이 입은 의복의 현란함에 효령의 눈이 커졌다. 비단 산지인 안야국에 비하면 수수하리라 생각했던 건 명백한 착각이었다.
갖가지 무늬가 놓인 형형색색의 비단옷은 기본이고 몸을 장식한 각종 장신구로 눈이 번쩍거릴 지경이었다. 귀걸이와 목걸이는 물론, 옷의 허리띠와 모자, 머리 장식에 이르기까지. 황금을 비롯하여 각종 진기한 보석들로 꾸며진 것이, 안야국 황실에서도 볼 수 없는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우린 비단을 못 만드는 대신 교역이 발달해서 그래. 옷도 옷이지만, 머리에 쓴 관이나 모자, 머리 장식이 화려할수록 높은 사람이야.”
시타가 살짝 귀띔해 주었다. 효령과 교기 역시 다와가 마련해준 기탄 옷을 입었지만 아무래도 머리 모양 때문에 안야국 사람이라는 걸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연회장으로 가기 위해 건물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시타가 말한,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한 여인 일행과 마주쳤다.
황실의 일원인가 싶을 만큼 호사스러운 차림의 중년 여인 여럿이 시녀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놈을 양자로 삼으시다니…… 대칸께선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그러게 말이다. 황궁 안에서 그놈의 얼굴을 다시 봐야 하다니…….”
발리안의 미간이 비틀린다 싶은 찰나, 그를 발견한 여인들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사라졌다.
“……!”
“……!”
“너……!”
그중 한 여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금색의 테를 두른 물빛 의복에 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검은 모자를 쓴 여인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시녀들을 밀쳐내고 발리안 앞으로 다가왔다.
짝!
순식간에 발리안의 얼굴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발리안에 비하면 한참 작은 여인이 기세 좋게 그 뺨을 올려붙였다.
“이런 뻔뻔한 놈. 네놈이 무슨 낯으로 여길 와? 늘 하던 대로 전장이나 떠돌다 화살에든 칼에든 맞아 죽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