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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44화 (44/116)

44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4

* * *

“…….”

효령은 오도카니 하투 칸의 냉랭한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효령아. 얼른 가야 해.”

“미, 미안해요, 시타.”

시타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효령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발리안이 단사관(행정 전반을 처리하는 관리)의 안내로 대칸의 처소에 들어간 후. 밖에 남은 효령이 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시타. 아까 그분…… 대장 아버지 맞죠?”

시타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투 칸이라고 기탄 사람 모두가 존경하는 용맹한 분이야. 그분을 닮아서 대장이 그렇게 뛰어난 거야.”

“근데 왜 그렇게 두 사람 사이가 나쁘죠? 아버지와 아들인데…….”

“그, 그건…….”

당황한 시타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모개 말이 예, 예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대. 왜 그런 거 있잖아. 서로 대화가 없다 보니까 어느 순간 어긋나 버리는 거.”

“…….”

효령이 가만히 시타를 바라보았다.

“그냥 솔직히 말해 주면 안 돼요, 시타? 내가 안야국 사람이라서 안 되는 거예요?”

“아, 아냐, 그런 거……. 그게…….”

시타가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배알을 마친 발리안이 밖으로 나왔다.

“그만 가자.”

그가 큰 보폭으로 앞장서 걸었다. 아쉽지만 효령은 이번에도 대화를 접고 그의 뒤를 따랐다.

* * *

“하아, 사람 미치겠군.”

이미 밤이 깊어 새벽을 향하는 시간.

후궁 내밀한 곳에 있는 침소 안에서 흥분에 겨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젠장…… 당신 같은 여잔 정말 처음이야.”

거칠게 갈라지는 굵은 목소리의 사내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은 물론 거뭇한 수염, 가슴에 난 털까지 흥건하게 젖은 그는 태자 발타고였다. 이제야 겨우 그에게서 벗어나게 된 상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대꾸했다.

“그거……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죠?”

탁탁. 기세 좋게 타오르는 화로의 불빛 속에 터질 듯 풍만한 여인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조금 전 자신을 훑고 지나간 환락의 도가니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듯, 그녀는 한껏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흐흐.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건 발타고가 여인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 완벽한 몸이었다.

한 손에 그러쥐어질 듯 가느다란 목과 허리. 그와는 대조적으로 탐스럽게 부푼 가슴과 엉덩이. 만지면 미끄러질 것처럼 쭉 뻗은 다리.

살면서 수도 없는 여인을 안아봤지만 이렇게 눈처럼 보드라운 살결도, 자신을 압도하는 정염의 소유자도 처음이었다.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정말 내가 처음, 맞나?”

“대체 몇 번을 묻는 거예요? 직접 눈으로 확인까지 했으면서…….”

여인이 시위라도 하듯 양털 이불을 끌어당겨 가슴 아래를 가렸다.

“아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사내는 내가 처음이라는 여자가 이렇게 사람을 죽여놓을 수 있는 건가 싶어 말이지.”

여인이 화가 난 듯 발타고를 샐쭉 흘겨보았다.

“자꾸 그런 소릴 하려거든 다신 날 찾지 말아요. 그러잖아도 대칸을 배신한 것이 죄스러워 죽을 지경인데…….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덮칠 땐 언제고 이제 와 딴소리를…….”

급기야 그녀가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아, 아니 그게…….”

발타고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허둥대며 여인을 달랬다.

“왜 이러나. 농이라는 걸 알면서……. 그만 화 풀어. 내 장난이 지나쳤다. 그쪽이 너무 좋아 그런 거라니까.”

여인이 발타고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장난일지 모르지만, 그때마다 난 상처를 받는다고요.”

순간, 화하니 일어난 불꽃에 비친 얼굴.

이 믿을 수 없는 장면에 경기라도 하듯, 지붕 꼭대기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화들짝 하늘로 날아올랐다.

대칸이 있는 황궁 안에서 천인공노할 만한 경악스러운 일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은 바로 태자 발타고와 7황비 요희였다.

이미 나이 일흔에 가까운 대칸은 건강상의 문제로 몇 년 전부터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멀쩡해 보이는 겉과 달리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아픈 곳이 꽤 많았다. 그럼에도 그가 계속해서 새 부인을 들이는 건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점점 더 땅덩이가 불어나는 기탄의 안정을 위해서는 여러 나라, 크고 작은 부족들과의 동맹이 필수였다. 혼인은 그 정치적 계산의 일환이었다.

요희와의 혼인날. 대칸은 분명 그녀의 처소에서 밤을 보냈지만, 모두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안야국 장공주의 얼굴이 제법 반반하더라만…… 그 계집이 너나 내게 위협이 될 일은 전혀 없으니. 다만 앞으로 고분고분하게 굴도록 만들려면 한 번은 밟아 줘야겠지.」

어머니인 황후로부터 아버지 대칸의 사정을 전해 들은 발타고는 마음 놓고 요희의 처소에 숨어들었다. 먼 곳에 시집와 독수공방하느라 외로울 그녀를 위로한다는 구실로.

뜻밖에도 그녀는 선뜻 발타고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몇 번 반항하며 거절하긴 했지만 그건 시늉에 불과했다.

‘어라? 이거 재미있게 됐군, 흐흐.’

요희를 처음 품은 날, 발타고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녀가 자신만큼이나 몸이 뜨겁고 지칠 줄 모르는 여자라는 걸.

그래서일까. 그녀를 품고 난 후, 다른 여인들이 죄 시시해졌다. 어디서 무얼 하든 요희의 몸이 눈에 아른거렸다. 이젠 하루라도 그녀를 품지 않으면 온몸이 찌뿌둥할 지경이었다.

요희에게 푹 빠진 발타고는 급기야 이런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내가 당신을 기탄의 황후로 만들어 주지.」

그 말에 감격했는지 이후 요희는 발타고와의 잠자리에서 더욱더 적극적으로 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영리한 여자였다. 어떻게 해야 발타고가 흥분하는지, 만족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하아. 어때요? 내 말대로 하니까 훨씬 좋죠?」

「하아. 정말 죽이는군. 암만 봐도 당신은 타고난 요부야.」

「뭘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내가 진짜 끝내주게 좋은 걸 알고 있는데 우리 한번 해 볼래요?」

요희는 사랑을 나누는 데 도움이 된다며 안야국에서 가져온 약술을 권했다.

과연! 그 밤 발타고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최상의 절정감을 느꼈다. 이제껏 여자를 품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그의 인생에 다시 없을 기막힌 쾌락이었다. 역시 안야국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요희는 언제 배웠는지 기탄 말까지 능숙하게 구사했다.

「태자. 내가 기탄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당분간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이에요. 알았죠?」

「어째서?」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 미모에 질투가 났는지 다른 황비들이 면전에서 험한 말을 잔뜩 쏟아 놓더라고요. 그들이 내가 그 말을 다 알아들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쩌겠어요?」

「…….」

「날 잔뜩 경계하며 더 미워하지 않겠어요? 난 그분들과 잘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 도와줘요, 네?」

무엇보다 그녀가 매력적인 것은 마냥 고분고분하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내키지 않아요. 그러니 거기서 얌전히 자다 돌아가요. 만약 허락 없이 내 몸에 손을 댔다간……. 앞으로 영영 내 얼굴 못 볼 줄 알아요.」

입안의 혀처럼 굴다가도 어느 순간, 화살처럼 튕겨 나가는 것이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아들 하나를 낳고는 푹 퍼져버린, 뚝뚝하고 요령 없는 태자비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느새 발타고는 요희에게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녀 앞에서라면 더는 거리낄 것도 숨기는 것도 없었다.

「이 황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나?」

몇 차례나 이어진 격정과 환희 끝에, 발타고가 만족감으로 널브러지며 물었다.

「대칸 아니신가요?」

「아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바로 내 어머니야.」

「황후마마요? 내가 보기엔 인자하고 후덕하신 분 같던데…….」

천만에.

발타고가 단칼에 요희의 말을 잘랐다.

「내 어머닌 원래 황비로 궁에 들어왔어. 원래 기탄이 아닌 다른 나라 칸에게 시집갈 예정이었는데 상대가 죽었거든. 처음 내 어머니의 존재는 그야말로 보잘것없었지.」

「…….」

「하지만 어머닌 곧 사촌이었던 황후와 힘을 합쳐 눈에 거슬리는 황비들을 해치우며 순식간에 권력을 차지했지. 그리고 마지막으론……. 말 안 해도 알겠지, 내 어머니가 어떻게 황후가 되었는지?」

발타고가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원래부터 우리 외가 쪽 여자들이 생긴 것과는 다르게 좀 무시무시해. 그게 다 태후였던 우리 할머님 가르침 때문이지만……. 할머님이 그러셨다나?」

「……?」

「세상 못 믿을 게 사내들이라고. 그러니 스스로 강해지라고. 높이 올라가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려선 안 된다고. 」

「…….」

「우리 어머니가 황후가 되었을 때 누구보다 할머님이 제일 기뻐하셨지. 자신과 꼭 닮은 어머니가 황후가 되었으니 이젠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겠다면서.」

발타고가 요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머닌 황후가 되자마자 날 태자로 만들기 위해 내 위의 형님들부터 없애 버렸지. 밑에서 치고 올라오던 놈들도. 똑똑하다 싶은 놈 치고 살아남은 놈이 없어.」

「그런데도 한 번도 안 들켰단 말이에요?」

「그러니 어머니가 무섭다는 거지. 워낙 교묘한 데다 빈틈이 없거든.」

「…….」

「배 속에 든 놈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어차피 날 때 죽으나 병으로 죽으나 워낙 죽는 놈들이 많으니 다른 사람들이 알 게 뭐야?」

기탄은 다른 나라에 비해 출생률이 높은 반면,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그만큼 죽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후궁을 두고도 황실에는 늘 자손이 귀했다.

「지금 남아 있는 두 녀석도 조금만 걸리적거린다 싶으면 금세 해치워버리실걸?」

「세상에…….」

요희가 겁을 먹은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할망구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황후 당신, 나랑 동류였어? 그렇담 당분간은 멋모르는 척 얌전히 구는 수밖에…….’

요희가 속마음을 감춘 채 발타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발타고가 그 보드라운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조정 중신이고 후궁들이고 어머니 눈 밖에 났다간 살아남지 못해. 그러니 어머니와 잘 지내도록 해.」

「알았어요. 명심할게요. 근데 황후마마 친정이 대단한가 보죠? 황후마마의 권세가 그렇게 등등한 걸 보면.」

원래 뒤에서 받쳐주는 세력 없이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권력이었다.

「아니, 우리 외가는 생각보다 평범해. 대신 우리 어머니에겐 엄청난 오른팔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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