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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43화 (43/116)

43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3

* * *

안야국의 장공주로 기탄의 후궁이 된 성락, 아니 요희는 대칸의 7번째 비가 되었다. 황후와 6명의 황비, 22명에 달하는 후궁들의 뒤를 잇는 30번째 부인이었다. 일국의 장공주였던 요희의 위치를 생각하여 대칸은 커다란 궁을 하사하고 여러 후궁을 다스릴 권세까지 내주었다.

“7황비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서 말이다. 게다가 발타고 형님과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고. 어쩌면 두 사람이 이미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로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주의해서 살피겠습니다.”

궁에서 오래도록 여관 생활을 한 덕분에 다와의 인맥은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깊었다. 웬만한 관리들은 물론 각 처소의 궁녀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 황궁 분위기는 어떠냐?”

“그러잖아도 7황비마마께서 오신 후, 황궁 내의 기류가 심상치 않습니다. 7황비마마의 자색이 워낙 뛰어나신 데다 문화국으로 명성 높은 안야국 장공주 출신이시니 그럴 수밖에요.”

다와가 말을 이었다.

“대칸께서는 7황비마마가 혹 불편해하실까 하여 궁려가 아닌 건물을 처소로 내리셨습니다. 안을 꾸민 가구며 그림들이며…… 완전히 안야국 전각을 옮겨다 놓은 것 같다니까요.”

“…….”

“대칸께서 그렇게 7황비마마를 배려하고 챙기시니 다들 신경을 안 쓸 수 있나요? 게다가…….”

“…….”

“황후마마를 제외하고, 이제껏 후궁들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졌던 건 2황비마마까지였습니다. 한데 뒤늦게 끼어든 7황비마마께서 단숨에 크나큰 권력을 꿰차셨으니. 하여…….”

“…….”

“벌써부터 다른 황비마마들의 견제가 심합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혼인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안야국 사신들이 톡톡히 망신을 당했습니다.”

“망신?”

발리안이 눈을 빛냈다.

“‘안야국의 학문과 기예의 수준이 그토록 높다 하니 어디 그 실력 한번 보자’면서 칸 전하들이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들을 골라 하셨거든요. 그분들이 누구십니까?”

“…….”

“다들 황후마마나 황비마마의 친정분들이 아니십니까? 그분들이 작심하고 덤비신 바람에 사신들이 제대로 된 답은커녕 쩔쩔매며 진땀을 뺐습니다.”

“…….”

“그 일로 안야국 사신들의 콧대가 대번에 주저앉았습니다. 요즘엔 황궁에 올 때마다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라니까요.”

“그런 일이 있었군.”

“그 일도 그 일이지만 왕자님…….”

다와가 사뭇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아시겠지만 이번 무림제에는 하투 칸 전하는 물론이고 그 후궁마마들도 오실 겁니다.”

하투 칸. 다와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발리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특히 귀빈마마와 영빈마마는 누구보다 왕자님에 대한 원망이 크시니 경계하셔야 합니다. 그러잖아도 왕자님이 참석하신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하니까요.”

“…….”

“그 두 분이 어찌 나올지 모르니 매사 주의하고 또 주의하십시오.”

그녀의 시선이 호독니와 효령, 시타 등을 향했다.

“이곳엔 사방이 적이니 너희들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왕자님을 모시는 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해. 특히 호독니.”

“말씀하시오.”

“왕자님의 신변 보호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다른 군사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어라.”

“알았소.”

호독니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효령에게 꽤 껄끄러운 존재인 그도 다와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순한 양이었다.

“그럼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십시오, 왕자님. 그리고…… 남편 모개의 일로 물을 것이 있어 그러는데, 효령이를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효령아.”

고갯짓한 다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녀올게요, 대장.”

“대장, 저희도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내일 봐요, 대장.”

다와의 뒤를 이어, 효령과 남은 사람들이 발리안의 궁려를 빠져나갔다.

다와가 효령을 데리고 들어간 곳은 부엌 옆에 꾸려진 산시의 처소였다.

다와가 효령을 산시의 침상으로 이끌었다. 거기 효령이 자리를 잡기 무섭게 다와가 운을 떼었다.

“효령이 너, 여인이라면서? 어쩐지 생김새며 몸매가 유난히 여리여리하다 했더니…….”

효령 옆에 앉은 산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세상에! 효령이 네가 여자라고?”

쉿.

다와가 산시에게 핀잔을 주었다.

“조용하지 못하니? 얘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

“죄, 죄송해요.”

산시가 금세 쪼그라들었다.

“남편이 서신에 적긴 적었다만……. 정말 왕자님과 같은 침상을 쓴다는 게 사실이니?”

효령이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산시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도 여자인 걸 안 들켰어? 어떻게?”

“그보다…….”

다와가 산시의 말을 끊었다.

“대체 내 남편은 무슨 생각으로 널 이곳에 보냈다니? 그러다 네 정체가 탄로 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조심하고 있어요.”

“조심이나 마나……. 여자 몸으로 사내들만 바글바글한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니? 안야국에선 남녀 간에 서로 내외한다면서? 우리 왕자님 점잖으신 거야 내가 잘 알지만…….”

다와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보나 마나 아무 설명도 없이 덥석 침소로 끌고 들어가셨을 거 아니니? 시타도 처음엔 얼마나 놀라서 기함했는데? 이렇게 몸을 버리는구나, 싶었다잖니?”

다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동안 먹는 건 괜찮았어? 씻는 건? 달거리는?”

효령이 싹싹하게 대답했다.

“씻는 것만 빼면 다 괜찮았어요. 모개가 다와의 비법을 일러 준 덕분에 달거리도 순탄히 치렀고요.”

“그나마 다행이네. 앞으론 무슨 일이 있으면 나나 산시에게 말해. 씻고 싶으면 여기 와서 씻고.”

“그래, 내가 도와줄게.”

산시도 다와를 거들었다.

“두 분 다 정말 고마워요. 근데요, 다와.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응?”

“그게…… 아까 말씀하신 하투 칸이라는 분. 대장 아버지 맞죠?”

“그래, 맞아.”

“그분과 대장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은 들었는데……. 왜 그 부인 되시는 후궁마마들이 대장을 원망하죠?”

“그, 그게…….”

내내 명랑하고 다정하던 다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가 대답을 꺼리며 머뭇대는 사이,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다와. 나다, 발리안. 웬만하면 효령 좀 돌려주면 안 되겠나? 그 녀석이 없으니 도무지 잠이 안 와서 말이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서둘러 대꾸한 다와가 효령을 채근했다. 왠지 안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그 잠깐 사이를 못 참으시다니.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왕자님이 찾으시니 얼른 가 보려무나.”

효령은 끝내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밖으로 나왔다.

* * *

「내일 오전 중에 궁에 들라 하십니다.」

황궁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발리안이 대칸을 만나기 위해 효령과 시타를 데리고 이른 아침 처소를 나섰다.

숙영지를 빠져나와 한참을 달리니 황궁이 있는 언덕 아래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이곳에는 절대 궁려를 세우지 못하게 돼 있어.”

시타가 효령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군사들과 백성들이 집결하는 장소거든. 황궁의 누각에서 전쟁이나 비상사태를 알리는 쇠북이 울리면 군사가 아니라도 장정이란 장정은 모두 무기를 집어 들고 이리로 모여들어.”

“아…….”

“물론 다 옛날이야기야. 예전에 부족 간 다툼이 심할 때 생긴 전통이거든.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으니까.”

금으로 된 두 마리 독수리가 내려다보고 있는, 겹겹의 높은 지붕 아래 놓인 커다란 문이 황궁의 입구였다. 끝을 가늠하기 힘든 푸른 언덕 위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수도 없이 늘어선 모습이 장관이었다.

돌계단 위에 놓인 건물들은 안야국 것보다 몇 배는 규모가 큰 데다 그 꼭대기가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 주변을 호위하듯 하얀 궁려가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몹시도 이색적이었다.

하늘과 독수리를 우러르는 까닭에 궁 곳곳에서 솟대 모양의 장식이 눈에 뜨였다. 궁 주위에는 관리와 궁녀들이 사용하는 건물과 궁려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빙 둘러 있었다.

황궁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궁려는 물론이고 건물의 모양도 비슷비슷해 안내하는 이가 없다면 효령 같은 초짜는 길을 잃고 헤매기 딱이었다.

말에서 내려 대칸의 처소로 향하던 그들은 한 무리의 사람들과 부딪혔다. 기다란 수염이 인상적인 초로의 사내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는 태도, 당당한 풍채가 한눈에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

순간, 발리안과 시타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발리안이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상대가 지척으로 다가오자, 발리안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그것으로 인사를 마치고 지나려는 발리안을 향해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젠 안부를 묻는 것조차 하지 않는구나.”

“저와 마주친 것만으로 충분히 불편하실 것을 아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부를 묻다니……. 그거야말로 하투 칸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가식 아닙니까?”

발리안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강건하신 모습을 뵌 것으로 됐습니다. 더는 묻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없습니다. 그건 칸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

“대칸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일방적으로 말을 마친 발리안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

“…….”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숙이는 시타를 따라 효령도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이 발리안의 뒤를 막 따라가려는 찰나. 하투 칸이 효령과 시타에게 물었다.

“저 녀석의 수하들이냐?”

효령이, 저보다 더 긴장한 시타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전하.”

“모개는?”

“모개는 지금 안야국에 있습니다. 같이 오지 않았습니다.”

순간, 하투 칸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둔한 놈. 조정에 처음 고개를 내미는 이런 중요한 때 모개를 두고 오다니…….”

싸늘한 얼굴로 혀를 찬 그가, 발리안이 그랬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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