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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42화 (42/116)

42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2

* * *

숙영지에 도착한 군사들이 서둘러 궁려를 펼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초원 위에 마련된 숙영지는 신분에 따라 궁려를 설치할 수 있는 장소가 정해져 있었다.

황궁과 가장 가까운 곳이 칸과 동맹국의 우두머리들, 거기서 멀어질수록 신분이 낮은 관리들의 구역이었다.

발리안의 숙영지는 그 중간쯤에 있었다. 각각의 숙영지마다 할당된 땅이 워낙 넓은 까닭에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려면 말을 타는 것이 필수였다.

무림제를 마치고 돌아가기까지 40여 일간. 이곳이 집과 집무실의 역할을 하게 될 터였다. 효령과 교기, 시타가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다들 오랜만이다. 잘들 지냈니? 그래, 우리 왕자님은?”

활기차고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목소리의 주인공이 불쑥 궁려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통통한 몸집을 한 여인이었다.

“왕자님. 접니다, 다와……!”

들뜬 얼굴로 들어서던 다와가 효령과 교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처음 보는 얼굴들이네. 우리 왕자님은 어디 가시고…….”

“다와!”

시타가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시타 아냐?”

친근하게 인사를 한 다와가 턱, 하니 시타의 두 뺨을 붙들었다.

“어쩜…… 시타는 하나도 안 변했네.”

“다와도요.”

“근데 우리 왕자님은?”

“쳇. 역시 다와는 대장밖에 모른다니까. 맨날 우리 왕자님, 왕자님…….”

시타가 삐친 척 입술을 삐죽였다.

“대장은 호독니 천장이랑 훈련장을 살펴보러 갔어요. 내일부터 무림제 준비를 해야 해서. 그나저나 다와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나야 늘 똑같지. 황궁 일만으로도 바빠서 정신없어. 근데 저 잘생긴 총각들은 누구야?”

“아, 내 정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타가 효령과 교기에게 손짓했다. 효령과 교기가 다가가자, 시타가 그들을 다와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효령과 교기. 둘 다 안야국 사람이에요. 모개 대신 대장을 수행 중이에요. 그리고 여긴 모개 부인 다와.”

효령과 교기가 다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 세상에! 기탄 말을 다 할 줄 아네. 게다가 어쩜 이렇게들 잘생겼어? 역시 안야국 사람들 인물이 좋긴 좋구나. 새로 온 후궁마마도 눈이 번쩍 뜨이게 고우시더니.”

다와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따뜻하고 푸근한지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기탄에서 제일 맛있는 저녁을 대접할 테니까. 그나저나…….”

그녀가 휘휘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도위씩이나 되셨는데 우리 왕자님 궁려가 이렇게 썰렁해서야……. 언제 손님이 찾아올지 모르는데 이럼 곤란하지. 역시 이것저것 챙겨 오기를 잘했네. 시타.”

다와가 시타에게 고갯짓했다.

“이제부터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이 두 사람을 데리고 잠깐 밖에 나가 쉬고 있어. 혹시 산시를 보거든 여기가 왕자님 처소라고 알려주고.”

“에에?”

시타의 얼굴이 금세 허옇게 질렸다.

“사, 산시도 왔어요?”

“당연하지. 널 보면 무척 기뻐할 거야. 어서 나가보렴.”

“알았어요. 참, 다와, 이거 모개가 전해 주랬어요.”

어느새 죽상이 된 시타가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어 건넸다. 그리고는 효령과 교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그곳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짐을 실은 수레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아무래도 이쯤에 궁려를 치는 게 좋겠어요.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니까 서둘러요. 거기! 그릇이 깨지지 않게 조심해요. 그 융단이랑 의자들은 왕자님 처소로 날라 줘요.”

머리를 네 갈래로 길게 땋은 소녀가 기세 좋게 짐꾼들과 여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시타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죽였다.

“야, 효령아, 교기야. 얼른 이리 와. 쟤랑 부딪치면 골치 아파. 쟤가 눈치채기 전에 빨리 여길 빠져나…….”

시타가 다와의 당부도 잊고 몰래 도망치려 몸을 낮췄다. 그러나 채 몇 발 떼기도 전, 그의 등 뒤로 쨍쨍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비실이 시타 오라버니 아냐?”

소녀가 짐꾼들 틈을 지나 시타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시타 오라버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빼빼 마른 건 여전하네. 누가 보면 내 동생인 줄 알겠어.”

목소리만큼이나 씩씩하게 생긴 소녀가 양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빼려다 들킨 시타가 민망함을 감추려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오, 오랜만이다, 산시.”

“안야국에 간다고 잔뜩 뻐기더니만, 왜 거기 음식이 입에 안 맞았어? 어째 이전보다 키가 더 줄어든 거 같네. 난 그새 한 뼘이나 자랐는데.”

산시라 불린 소녀가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약이 바짝 오른 시타가 볼멘소리를 해댔다.

“야! 이게 보자마자 키 얘기는……. 동료들 있는 데서 사람 쪽팔리게 꼭 그런 얘길 해야겠냐?”

“흥! 이 전쟁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누군데? 나보고 얼굴에 왜 보릿겨를 뿌리고 다니냐고 물은 사람이 누구더라? 맨날 ‘네 볼엔 새알이라도 들었냐? 왜 그렇게 빵빵해?’ 놀려먹은 사람이 할 소리냐고?”

“그게 도대체 언제 적 얘기야? 귀여워서 농담 삼아 한 소릴 가지고……. 이렇게 뒤끝 심하고 성질이 더러워서 어떻게 시집갈래?”

“흥, 사돈 남 말 하시네. 그러는 오라버니는 그 키와 덩치로 장가는 갈 수 있고? 그 가느다란 팔로 양은 어떻게 잡고 아내는 또 어떻게 안아주려고? 남 걱정하지 말고 본인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두 사람이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댔다. 하는 모양으로 봐선 해가 지도록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보다 못한 효령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산시? 전 효령, 이쪽은 교기라고 해요. 모개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어요. 만나서 정말 반가워…….”

효령이 운을 떼자마자, 산시가 시타를 버리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아, 안녕하세요. 전 산시라고 해요. 죄송해요, 거기 계신 줄도 모르고…… 호호.”

산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호호’라니……. 와, 닭살! 이게 키만 큰 게 아니라 연기도 늘어서는……. 그런다고 효령이랑 교기가 속아 넘어갈 것 같냐? 이 불여우야?”

“시타 오라버니. 정말 이러기야? 오라버니 자꾸 그러면 내 손에 죽는다.”

산시가 어금니를 깨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훗. 두 사람 때문에 효령과 교기 입에서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시타와 산시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꼭 사이좋은 연인처럼 보였다.

교기가 툭, 하니 시타의 옆구리를 찔렀다.

“너…… 좋아하는 여잔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쪽이었냐? 유치하긴……. 그럼 여자들, 오해한다.”

오고 가는 말은 못 알아들어도 분위기만으로 눈치채기 충분했다. 그건 시타 쪽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빨개진 시타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너 지금 이상한 소리 한 거 맞지? 웃기지 마. 쟤랑 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곁에 있던 산시도 펄쩍 뛰었다. 산시가 교기를 향해 안야국 말로 대꾸했다.

“저 이 비실비실한 오라버니랑 아무 사이 아니에요. 아! 맞다. 원수예요. 철천지원수…….”

시타가 산시 앞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너 지금 저놈한테 뭐라고 했어? 내 욕했지?”

산시도 지지 않고 이마를 들이밀었다.

“사실 그대로 원수 사이라고 했다, 왜?”

“뭐, 원수? 이게 말이면 단 줄 알아? 좋아. 아예 말 나온 김에 앞으로 우리 모른 척하고 살자.”

“누가 할 소리!”

산시와 시타 두 사람이 다시금 말로 치고받기 시작했다. 다와가 딸 산시를 찾으러 궁려를 나오기까지, 그 상황은 한동안 이어졌다.

* * *

“우와, 정말 끝내준다!”

“그러게. 도대체 이걸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거냐?”

풀밭에 둘러앉아 다와와 산시가 내온 음식들을 먹는 군사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들 덕분에 발리안 일행은 모처럼 제대로 된 기탄의 전통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아까 산시가 짐꾼들을 동원해 친 궁려 안에 새 부엌이 꾸려졌다. 다와가 일을 도우라 데려온 사람들이 분주히 그곳을 오가며 음식을 내왔다.

앞으로도 군사들이 먹을 음식과 차, 손님맞이 다과가 거기서 준비될 터였다.

“와! 근사하다! 그 잠깐 사이 어떻게 이렇게 바뀌냐?”

식사를 마치고 발리안의 처소에 들어선 시타가 신기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와의 손을 거친 그곳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궁려의 한가운데엔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로가 놓였고 정면의 상석엔 의자를 겸하는 커다란 침상이 놓였다. 바닥과 벽에는 두툼한 융단이 장식되었다.

바닥에는 길상 문양이, 벽에 걸린 것에는 독수리와 늑대, 눈표범과 사슴 무늬가 직조되어 있었다.

궁려의 좌우에는 수하들이 앉을 의자가 줄지어 놓였다. 그 앞쪽에는 낮고 기다란 탁자와 방석이 놓여 있었다.

“다와의 솜씨는 여전하군. 이제야 기탄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 난다.”

발리안의 말에 다와가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왕자님을 위해 못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제가 자주 들여다보겠지만, 일 때문에 못 나올 경우도 있으니 당분간은 산시가 이곳에 머물면서 식사와 손님치레를 거들 겁니다.”

“고맙다, 산시. 잘 부탁한다.”

발리안의 말에 산시가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왕자님도 별말씀을 다…….”

“그보다 왕자님…….”

다와가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까 시타가 남편의 서신을 전해줬는데……. 안야국 장공주님, 아니……, 7황비마마를 주의해서 살펴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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