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바람에 흩날리고-41화 (41/116)

41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1

* * *

“뭐라, 이번에도 실패했단 말이냐?”

쾅쾅쾅.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맹유천이 인정사정없이 탁자를 내리쳤다.

“안야국 최고라고 고른 것들이 그깟 놈 하나를 못 죽여서……. 이런 등신 같은 것들을 봤나. 내 이놈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진정하십시오, 형님. 효령 장공주님을 다치지 않기 위해 방도가 없었다지 않습니까?”

위주 도독이 나서서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니 더욱 문제라는 것이 아니냐?”

맹유천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효령이 기탄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하다니. 기탄이 어디냐? 거기야말로 삭주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야만족의 본거지가 아니냐? 거기서 효령이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 어찌 장담한단 말이냐?”

“형님.”

“저희들이 다 죽는 한이 있어도 효령을 되찾아 왔어야지. 피할 곳도 없는 데서 기습을 하고도 발리안을 놓쳐? 그러고도 저희 놈들이 군사고 무사란 말이냐?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

“…….”

“이쪽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치밀하게 계획을 짜면 무얼 하느냐? 앞에 나서 일을 해결해야 하는 놈들이 하나같이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데?”

“…….”

“망할 놈들. 대현국에 미리 손을 써 두느라 내가 들인 재물이 얼만데…….”

콰당.

성질을 가누지 못한 맹유천이 옆의 의자를 걷어찼다.

“무기며 실력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기탄 놈들의 용맹함이야 이미 정평이 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딴 소리나 듣자고 모든 일을 팽개치고 여기 위주까지 온 줄 아느냐? 당장 내 눈앞에 발리안 그놈의 시체와 효령을 데려오란 말이다, 당장!”

맹유천이 미친 사람처럼 발광했다.

‘후우, 요희가 없으니 형님을 말릴 사람이 없고만.’

진땀이 난 위주 도독이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직 우리에겐 요희가 있지 않습니까, 형님? 요희라면 틀림없이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요희가 아니면 이깟 일 하나 감당할 놈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렇게 쓸 만한 놈이 없으니 기탄 놈들이 안야국을 제집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조금만 분을 삭이고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형님.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형님이나 우리 안야국이 의심받는 것을 피하고자 대현국 국경에서 일을 벌였지만, 만약 거기서 발리안이 죽었다면…….”

위주 도독이 자분자분 상황을 설명했다.

“그건 그것대로 문젭니다. 그러잖아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효령 장공주님이 만약 우리 무사들을 피해 멀리 달아나 버리면 그땐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대현국이나 적북을 일일이 다 뒤지실 겁니까? 게다가…….”

“…….”

“삭주에 남아 있는 기탄 놈들이 어찌 나올지 그것도 모를 일이잖습니까? 놈들이 저희 대장이 죽은 화풀이를 한답시고 대현국을 쳤다간…….”

위주 도독이 호들갑스럽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대현국이 무너지면 우리 안야국은 완충 지대 없이 기탄에 노출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낙갈국은 기탄의 제후국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럼 발리안이 아니라도 누구든 안야국을 쉽게 노리게 될 겁니다.”

“…….”

“형님과 우리 안야국의 장래를 생각할 때, 발리안은 기탄에서 죽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빼앗긴 삭주를 되찾는 일도 수월해질 거고요.”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맹유천의 기세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 위주 도독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사내들을 처리하는 일이라면 요희를 따를 자가 없지 않습니까?”

“…….”

“요희라면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간단히 발리안 그자를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이제껏 한가락 한다 하는 군왕이며, 장군, 관리에 도적, 상인까지…… 요희가 해결하지 못한 사내가 없지 않습니까?”

“…….”

“독을 쓰든, 미약을 쓰든, 남의 손을 빌든…… 요희라면 이번에도 틀림없이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효령 장공주님 일도 마찬가집니다.”

“…….”

“생각해 보십시오. 발리안이 죽으면 효령 장공주님이 의지가지없는 기탄에서 누굴 찾아가겠습니까? 요희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너무 초조해 마시고 조금만 여유를 가지시는 것이…….”

그제야 맹유천이 교활하게 눈을 빛냈다.

“그러잖아도 며칠 전 요희가 보내온 전갈에 의하면…… 발타고란 놈을 꾀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발타고라면 기탄의 태자 말입니까?”

“그래. 놈이 요희에게 아주 푹 빠졌다는군.”

맹유천이 대놓고 발타고를 조롱했다.

“아들이란 놈이 이제 갓 들인 아비의 후궁과 바람이 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지. 하지만 덕분에 놈의 약점을 잡았으니 이제 놈은 우리 수중에 든 것이나 다름없다.”

“요희가 그자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발리안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겠습니다.”

“물론이지. 요희가 아니라도 발타고 그놈, 진작부터 발리안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구나.”

위주 도독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둘이 사촌지간이라면서 어찌 그리 사이가 나쁠까요?”

“두 사람, 어릴 적부터 사사건건 비교를 당한 모양이다. 대칸은 물론이고 다른 칸들까지 번번이 발리안만 칭찬하고 드니, 발타고로서는 열등감에 심사가 꼬일 수밖에. 게다가…….”

“……?”

“발타고가 마음에 들어 집적대는 계집들마다 하나같이 발리안을 좋아해서는……. 그래서인지 발타고 그놈, 걸핏하면 발리안의 얼굴을 뭉개 놓겠다 장담을 하고 다녔다지 뭐냐?”

“상황이 그렇다면야…… 저희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형님.”

위주 도독이 맹유천을 향해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형님. 더는 염려할 일도 없는데 저와 함께 가 기분 전환이나 하시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안야국 미녀들은 죄 위주에 모여 있다는 말……. 제가 오늘 요희 못지않은 미인들만 모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썩 내키지 않는데…….”

맹유천이 어울리지 않게 뒤로 한 발 뺐다.

“여기 앉아 시간을 죽인다고 당장 바뀌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요희에게서 발리안이 죽었단 소식이 오려면 아직 한참입니다. 그러니 모처럼 여기까지 오신 김에 느긋이 즐기며 기다리시는 편이…….”

“글쎄다…….”

맹유천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위주 도독이 작전을 바꿨다.

“그럼 할 수 없군요. 다들 실망하겠지만 오늘 연회는 취소하는 수밖에…….”

그제야 맹유천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럴 수야 있나. 네가 그렇게까지 날 생각하는데 그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 어딘지 앞장서라.”

“이리 대범하게 나오셔야 형님답지요. 그럼 가시지요.”

언제 성질을 냈냐는 듯 입에 미소를 건 맹유천이 위주 도독과 함께 방을 나섰다.

* * *

“저기야. 저기가 대칸께서 계시는 대정(大庭, 기탄의 주도)이야.”

길게 이어진 대장정의 끝. 이제 막 산 꼭대기를 넘은 효령의 눈앞으로 온통 푸른빛으로 뒤덮인 너른 초원이 펼쳐졌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까지 이어진 풀밭 사이로 긴 강이 굽이굽이 휘돌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얀 구름과 초원 위를 점점이 수놓은 크고 작은 궁려와 건물들. 한가로이 뛰노는 말과 양, 낙타들의 모습이 감탄을 자아냈다.

“와! 정말 아름다워요, 시타.”

효령과 교기에게 기탄은 완전한 별천지였다.

세상에 이렇고 넓고 웅대한 땅이 존재하다니. 산과 건물이 많은 안야국에서는 좀처럼 지평선을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기탄에서는 어디로 눈을 돌리든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 보였다. 그곳으로 말을 달리면 당장이라도 땅끝에 걸린 구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원을 가득 채운 풀들은 또 어떤지. 실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데다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그것들은 안야국의 잡초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 싱그러운 초록 풀들을 배경 삼아 말로만 듣던 바람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얼핏 황량해 보이는 초원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그 천연의 아름다움에 절로 감동할 지경이었다.

효령은 기탄을 왜 ‘바람의 나라’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한여름 뙤약볕에 말을 달려도 덥지 않은 건 쉴 새 없이 불어오는 산곡풍 때문이었다.

쏴. 거칠 것 없는 시원한 바람 소리에 오랜 여정에 지친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가슴마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기탄에도 농사를 짓는 정주민과 고정된 거주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안야국이나 다름없는 크고 작은 집과 건물들이 눈을 끌었다.

강이 지나는 곳에는 잘 자란 조, 보리며 기장이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물론 다른 곡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오손도손 붙어 앉은 집들에서 하나둘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겹기 그지없었다.

기탄은 여러 면에서 안야국에서 들어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기탄에선 어딜 가든 제일 높은 사람을 만나려면 그 마을 한가운데 있는 궁려를 찾아가면 돼. 거기서 멀어질수록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살아.”

“그럼 황궁도 궁려로 되어 있어요?”

“궁려도 건물도 다 있어. 근데 외국 사신들을 맞을 때가 아니면, 건물은 잘 사용 안 해. 궁려 쪽이 훨씬 더 따뜻하거든. 대칸의 궁려 중엔 이천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만큼 큰 것도 있어.”

“와.”

“황궁을 지키는 건 주로 황후마마시고 대칸은 나라를 다스리느라 자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셔. 그땐 궁려째 이동하기 때문에 황궁이 좀 한산하지.”

산등성이를 내려오는 사이, 시타가 효령에게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궁려나 집들 앞에선 말의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지나가야 해. 또 말에서 내릴 때는 반드시 궁려 오른쪽에 세워야 하고. 땅에 떨어진 물건이 있으면 그 위를 건너지 말고 돌아가야 해.”

“알았어요.”

“궁려 앞에 붉은 천이 묶여 있으면 출입 금지란 뜻이니까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알았지?”

“네.”

“그리고 이건 교기에게도 꼭 알려줘. 궁려 안에 들어갈 때는 무기를 밖에 두고 들어가야 해. 전시가 아닐 때 함부로 칼을 뽑으면 무조건 참형이니까 조심하라고.”

“네. 그렇게 전할게요.”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효령아.”

“왜요, 시타?”

“그게 말이야…….”

내내 거침없이 떠들던 시타가 웬일인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황궁에 가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근데…… 그 중엔 대장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많아. 그러니까 누가 대장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어도 너무 놀라지 말라고.”

시타가 효령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대장에겐 생각보다 적이 많아. 그래서 어쩌면 우리도 곤란해질지 몰라. 그래도 우리가 꼭 대장의 힘이 돼 주자.”

“그래요, 시타.”

씩씩하게 대답한 효령의 앞에 커다란 돌기둥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칸이 머무는 곳임을 알리는 ‘하늘의 돌’이었다.

효령은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주도를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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