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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40화 (40/116)

40화. 여정 2

* * *

오늘도 지루한 강행군이 이어졌다.

나라 밖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다는 것에 가슴 설레던 것도 잠시.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효령의 호기심도 어느새 시들해졌다.

안야국과 같은 말을 쓰는 대현국은 풍경마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통에 그마저도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다.

「도적과 마주치는 일이 영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 기탄 군사들을 건드릴 만큼 배짱 좋은 도적은 별로 없단다. 다들 알아서 피하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안야국을 떠나기 전, 모개가 해준 귀띔에 긴장감이 느슨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자고 일어나 달리고, 간단히 끼니만 때우고 또다시 달리고. 옆에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시타마저 없었다면 정말 따분할 뻔했다.

“시타. 저기 대장 말 말인데……. 저 이상하게 생긴 말은 뭐예요?”

피곤이 밀려온 효령이 졸음을 깨기 위해 물었다.

“아, 저거…….”

효령이 궁금해한 것은 행렬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말 무리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발리안이 평소 타고 다니는 기탄의 명마 산자와는 확연히 다르게 생겼다. 그 몸의 무늬가, 저 멀리 남쪽 지역 강가에 살고 있다는 악어와 비슷하게 생겼다.

“저건 탄해라고 하는 야생마야. 대장이 직접 잡아 길들였어. 그 바로 옆에 있는 새카만 말 있지? 그 녀석 이름은 도도라고 ‘푸르다’는 뜻이야. 청마거든. 둘 다 기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엄청 귀한 말이야.”

시타는 한때 발리안의 말을 담당한 적이 있어서 그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왜 새카만데 청마(푸른 말)라고 불러요?”

효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물을 만도 하네.”

시타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검은 말이라고 해도 자세히 보면 몸통에 갈색이 섞인 경우가 많거든. 저렇게 갈기며 몸 전체가 완전히 검은 말은 진짜 드물어. 워낙에 시커멓다 보니까 털끝에 푸른 빛이 도는 것처럼 느껴지지. 그래서 청마라고 부르는 거야.”

“아.”

“기탄에서 군사들은 보통 한 사람당 말을 다섯 마리 이상 끌고 다녀. 그래서 먼 거리도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야. 근데 말값이 워낙 비싸니까 야생마를 잡아 길들이는 거지.”

“그렇구나.”

“더구나 대장이나 아굴가는 워낙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니까 맞는 말을 찾기가 어려워. 여간한 말들은 금세 지치거든. 근데 저놈들, 대장을 따라다녀서 그런지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더 영리하다니까.”

“한눈에 봐도 좋은 말처럼 보인다.”

곁에 있던 교기가 뚝뚝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효령이 시타에게 그 말을 전했다.

“와, 네가 먼저 나서서 칭찬하고 웬일이냐? 사람이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변한다는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냐?”

시타가 대놓고 교기를 약 올렸다.

“그러고 보니 너 요즘, 입에 대장 소리가 완전히 붙었더라? 거봐. 내가 뭐랬냐? 머지않아 너도 대장에게 반하게 될 거랬지?”

시타가 신이 나서 효령에게 일러바쳤다.

“어제 이놈이 모닥불 곁에서 나한테 고백했다니까. 대장이 어주를 우물에 붓는 걸 보는 순간, 완전히 뿅 갔다고. 살면서 그렇게 가슴 벅찬 장면은 처음이었다나?”

효령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입을 가렸다. 서로 못 잡아먹어 으르릉거릴 때는 언제고. 며칠 부둥켜안고 자더니 어느새 이렇게 친해졌나.

“우리 중간에 끼어 있던 대현국 녀석이 분명 그렇게 전했어. 그놈, 과장이 좀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는 놈이거든. 그러고 보면 교기 이놈, 생긴 건 안 그런데 무지하게 헤픈가 봐.”

“……?”

“언제는 효령이 너밖에 모르는 것처럼 굴더니, 이번엔 대장이라니. 내가 오늘 대장 옆에 붙어 자겠다고 하면 질투하려나?”

큭. 시타가 신이 나서 킥킥거렸다. 멋모르는 교기가 코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만약 지금 내 욕하는 거면 너 죽는다!”

말도 안 통하는 둘이 또다시 아웅다웅하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대현국의 국경에 도달했다.

대상들만 안다는 지름길로 간다더니. 평소 사람이 잘 지나지 않는 길인지 온통 풀이 무성했다. 길게 이어진 풀밭의 끝이 적북이었다.

이 속도라면, 어느덧 기울기 시작한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바로 그때. 대열의 앞쪽에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휘익.

행렬의 선두를 달리고 있던 발리안이 입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나자마자 뒤에 있던 그의 말 탄해가 무리를 빠져나와 맨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시타와 교기가 어리둥절한 순간. 앞쪽에서 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경계 태세를 갖춰라!”

발리안이 허공으로 주먹 쥔 왼손을 들어 보였다. 좌측에 많은 수의 적이 있음을 나타내는 수신호였다. 군사들이 고삐를 당기며 재빨리 무기를 손에 들었다.

“어디, 어디?”

“……!”

놀란 효령과 교기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딱히 눈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들이 영문을 모르고 바짝 긴장한 사이. 저 멀리 언덕 위, 웃자란 풀과 나무들 틈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그와 동시에 발리안이 소리쳤다.

“기습이다, 다들 몸을 낮춰라!”

그 목소리를 마치 신호라도 삼듯 화살이 빗발쳐 날아오기 시작했다.

타닥 탁.

순식간에 하늘을 검게 물들인 화살들이 날카로이 말들의 발치에 내리꽂혔다.

“공자!”

아슬아슬, 눈앞에 떨어진 화살을 피한 교기가 효령의 안부부터 챙겼다.

“난 괘, 괜찮아, 교기야.”

효령이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급히 말을 뒤로 물렸다.

상황은 발리안 일행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주변은 몸을 피할 곳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게다가 해가 화살을 쏘는 자들의 뒤쪽에 걸려 있어 이쪽에선 그들을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어려웠다. 눈이 부셔 공격이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발리안은 당황하기는커녕 침착하고 노련하게 대처했다. 어느새 속도가 빠른 탄해로 갈아탄 그가 화살을 시위에 걸며 소리쳤다.

“전원, 착전(鑿戰) 대형으로!”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사들이 삽시간에 세 무리로 갈라졌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주저하거나 우왕좌왕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커다란 방패를 든 일련의 군사들이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두 겹으로 길게 늘어섰다.

팅, 티딩. 탁.

그들의 방패에 부딪힌 화살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그들이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동안, 발리안과 활을 든 군사들이 재빨리 그 뒤쪽에 도열했다.

순식간에 수십의 화살이 적을 향해 허공을 겨눴다. 그사이 호독니와 남은 군사들은 뒤에 오고 있는 수행원들과 말수레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찰나의 일이었다.

“적을 눈으로 찾으려 하지 말고 감을 믿고 쏴라. 술시(9시), 북두칠성 꼬리별 방향이다.”

휘이잉.

얼굴에 꽂히는 햇빛 때문에 미간을 찌푸린 발리안이 군사들에 앞서 활을 당겼다. 그를 따라 다른 군사들도 일제히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검은 선처럼 보이는 날카로운 화살이 정면의 해를 가르며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으아!

으아악!

믿기지 않게도 저쪽 언덕에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술시의 밤하늘에 뜬 북두칠성 꼬리별 방향’. 그 말만으로도 군사들의 화살은 목표를 정확히 겨눴다. 사방이 초원이며 사막인 탓에 하늘의 별을 이정표 삼아 움직이는 기탄의 군사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수십여 발의 화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방향, 같은 각도로 나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적들이 한 발을 쏠 때 두세 발을 연달아 쏘는 빠른 속도 또한 가히 따를 자가 없었다.

게다가 기탄의 활 만궁은 갑옷도 뚫는 엄청난 위력과 긴 사거리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한 무리는 날아오는 화살을 막고 다른 무리는 끊임없이 화살을 날리고. 일사불란한 기탄군들의 대응에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적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발리안과 군사들이 적을 상대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여분의 말과 말치기들, 효령과 같은 수행원들은 호독니의 인솔하에 안전하게 화살의 사정권을 벗어났다.

‘대장.’

효령이 뒤에 남은 발리안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공자!”

순간, 교기가 당혹스러운 듯 말했다.

“우리를 공격한 자들, 도적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 송구하지만…… 아무래도 안야국 사람 같습니다.”

“뭐?”

“화살이 기탄의 것과 다릅니다. 날아오는 속도며 탄력이 떨어지는 데다 사정거리가 짧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열에 아홉, 화살이 대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도적이었다면 틀림없이 수레 쪽도 같이 노렸을 겁니다.”

“뭐……?”

“이미 대장도 이 사실을 알 겁니다.”

“…….”

효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혹시나 대현국 사람이 안야국 화살을 사용한 건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대현국처럼 힘없는 나라에서 기탄의 정규군을 건드리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안야국 사람이면서 나라 밖 대현국에서 이런 일을 벌일 만한 힘과 능력을 지닌 자는 오직 맹유천뿐이었다. 끈질기고 집요한 인간.

대체 언제까지 이런 무참한 짓을 이어가려는 것인지……. 자신 때문에 무고한 발리안과 동료들이 위험에 빠졌다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자책감이 밀려왔다.

말수레와 일행의 상태를 확인한 호독니가 다시금 발리안을 돕기 위해 달려 나가려는 순간, 효령이 그를 붙들었다.

“당신은 여기 있어요, 호독니. 당신에겐 이 사람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어요. 내가 갈게요!”

“뭐?”

호독니가 대꾸도 하기 전, 효령이 대열을 벗어나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야!”

“공자!”

“효령아!”

호독니와 교기, 시타의 외침을 뒤로하고, 검을 뽑아 든 효령은 겁도 없이 빗발치는 화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자 누구보다 놀란 것은 발리안이었다.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그러나 기탄 군사들의 앞을 막고 선 효령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급히 소리쳤다. 발리안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안야국 말이었다.

“저들은 절대 날 죽이지 못해요. 그러니 내 걱정 말고 어서 피해요. 빨리요!”

과연, 그녀의 말처럼 효령이 등장한 순간부터 날아오는 화살의 수가 갑작스레 줄었다. 효령이 검을 들어 몇 차례 눈앞의 화살들을 걷어냈다.

“서둘러요, 어서요!”

그녀의 외침에 발리안이 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방패와 활을 든 군사들이 차례차례, 빠르게 태세를 바꾸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탱. 화살이 방패에 튕기는 소리가 몇 번 나는가 싶었지만, 그들은 무사히 호독니 일행과 합류했다.

“셋을 세면 우리도 다 함께 달린다! 하나, 둘, 셋!”

발리안의 호령과 함께 남은 군사들이 일제히 적북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효령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군사들을 모두 보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발리안이었다.

“대장!”

효령을 자신의 앞에 옮겨 태운 발리안이 커다란 몸으로 그녀를 완전하게 감쌌다.

“정말 하는 짓마다 마음에 안 든다니까!”

휙휙.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달린 탄해가 이내 다른 군사들을 따라잡았다.

효령의 말이 그 뒤를 부지런히 쫓아왔다. 허무하게 바닥에 꽂히는 두어 발의 화살을 뒤로하고 발리안과 효령은 무사히 대현국의 국경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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