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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39화 (39/116)

39화. 여정 1

* * *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신의 몸이 불만스러웠던 적은 없었는데. 지금 보니 비쩍 마른 것이 밋밋하니 볼품없었다. 늘 빳빳한 천으로 동이고 다니니 가슴도 더 작아진 것 같고.

「네 녀석의 팔다리, 허리……. 도무지 마음에 안 든다. 이건 바람 한 번만 불면 훅 날아가게 생겼으니…….」

발리안의 말을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다.

흥. 그렇다고 내가 기죽을 줄 알고? 효령이 일부러 어깨를 쭉 폈다.

‘요희라고 했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절대 지난번처럼 당하지 않아. 당신이 맹유천을 위해 기탄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듯, 나 역시 대장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

효령이 지긋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같은 나라 사람끼리 싸우는 일은 없기를……. 하지만 만약 우리가 다투게 된다면…….’

효령의 눈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단호히 반짝였다.

‘그때 지는 것은 분명 당신이 될 거야.’

* * *

아직은 어두컴컴한 새벽. 모두가 단잠에 빠져 있을 그 시각, 기다란 행렬이 조용히 소리를 죽이며 삭주 관사를 빠져나갔다.

기탄으로 향하는 발리안 일행이었다. 발리안과 호독니를 비롯한 백여 명의 최정예 군사들과 효령, 시타, 교기를 비롯한 수행원들, 수레와 말을 돌보는 말치기까지 총 백오십 명의 사람과, 말이 끄는 수레 열일곱 대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검은 그림자가 동료에게 속삭였다.

“당장 형부 상서 어른과 위주 도독께 이 소식을 전해.”

“알았어.”

다부지게 대답한 또 다른 그림자가 전서구가 든 새장의 문을 열었다.

푸드드드득.

[드디어 그들이 움직였습니다.]

발목에 서신을 묶은 전서구들이 검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 *

“다들 멈춰라. 오늘은 여기서 쉬어간다.”

발리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던 벌판에 순식간에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커다란 궁려(활처럼 굽은 반원형의 천막)가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틀과 모전(짐승 털로 짠 두꺼운 모직물)을 사용하여 설치하는 궁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늑하고 따뜻했다.

안도 널찍한 데다 천장을 통해 공기와 빛이 순환해 건물에 있을 때보다 훨씬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거대한 궁려가 여러 채 들어서니 금세 마을 하나가 새로 생겨난 것처럼 보였다. 군사 몇이 재빨리 불 위에 솥을 걸고 고기를 삶았다.

맛있는 냄새가 주변에 퍼지자 다들 급격히 허기감을 느꼈다. 번을 서는 군사를 제외하고 일행 모두가 다 함께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 배고파 눈 돌아가는 줄 알았네.”

시타가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효령과 교기도 조용히 먹는 데 열중했다.

배가 부르자, 그제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시타, 여기는 어디쯤이에요?”

“대현국의 북쪽에 접어들었어. 이 속도라면 내일은 적북, 거기서 사흘 뒤면 낙갈국에 도착할 것 같은데?”

시타가 유주가 든 가죽 부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적북 지방은 대현국과 낙갈국 사이에 있는 초원지대로 여러 중소 부족들이 흩어져 사는 곳이었다.

“낙갈국에서 기탄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글쎄……. 저 수레들만 없으면 보통 닷새면 가뿐한데, 이번엔 조금 더 걸릴 것 같은데? 진짜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는 건 기탄에 들어갔을 때야. 땅덩이가 워낙 넓어서 주도까지 가는 데만도 한참이야.”

“그렇구나. 참, 시타. 혹시 모개의 가족들을 본 적 있어요?”

“당연하지. 이번에 가면 너도 보게 될 거야. 모개 가족은 대칸이 계시는 주도에 살고 있으니까. 그 부인이 황궁에서 일하거든.”

모개의 부인 다와는 황궁, 그중에서도 후궁에서 일하는 여관(女官, 여자 관리)이었다. 기탄은 궁녀 외에도 후궁의 재정과 행정 업무를 돌보는 여자 관리들을 따로 두고 있었다.

그들은 여느 궁녀들과는 달리 혼인과 출궁이 자유로웠다.

“모개도 가족이 보고 싶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못 온 것 같아 마음에 걸려요.”

효령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그럴 거 없어. 어차피 기탄에 가도 모개는 좋은 대접을 못 받아. 딸인 산시라면 모를까, 부인이 상대도 안 해주거든.”

“예? 왜요?”

“그게 이야기가 좀 긴데…….”

시타가 말을 하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발리안이 먼 곳에서 호독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걸 확인한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모개 부인 이름이 다와인데 말이야. 모개랑 다와 두 사람 다 대장 어머니 발란주 님을 모셨거든. 대장이 태어난 이후엔 다와가 줄곧 대장을 돌봤고. 그래서 다와는 대장을 친자식처럼 끔찍하게 생각해.”

“아…….”

“다와가 모개에게 그랬대. 대장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기 전에는 집에 코빼기도 내밀지 말라고……. 그래서인지 다와는 아직도 대장을 ‘왕자님’이라고 불러.”

“…….”

“이번에 대장이 대칸의 양자에 대도위까지 됐으니까 전보다는 나아진 셈이지만, 그렇다고 다와가 만족할지는 모를 일이지.”

모개와 다와는, 모시던 발란주가 죽고 발리안이 종적을 감추자 주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황궁에서 일하면서 발리안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발리안이 용병대를 이끌고 주도에 나타났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모개와 다와 두 사람이었다.

모개는 그날로 관직을 버리고 발리안을 따라나섰다. 그때부터 줄곧 용병대의 안살림과 행정 업무를 책임져 왔다.

“와……, 다와는 정말 대단한 분이네요.”

“그럼. 다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데. 모개도 그 앞에선 꼼짝 못 한다니까.”

큭. 효령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점잖은 모개가 부인 앞에선 맥을 못 춘다니. 애처가인 줄 알았는데 공처가였나?

“그럼 산시는요? 나랑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대장이랑 함께 자라 안야국 말도 곧잘 한다면서요?”

내내 싱글거리던 시타가 웬일인지 안면을 바꿨다.

“야, 걔 얘긴 꺼내지 마.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파. 왈가닥에 고집불통에……. 내가 살면서 걔처럼 말 안 통하는 여자앤 처음 봤다니까. 나중에 누가 데려갈지 그놈 참 안됐어.”

시타가 미리부터 미래를 걱정하며 혀를 찼다.

“있잖아. 산시 고 녀석이 얼마나 지독하냐면…….”

시타가 한도 끝도 없는 수다를 이어가려는 찰나. 발리안이 모두에게 말했다.

“배를 채웠으면 다들 들어가 자라. 내일도 새벽 일찍 출발한다.”

“예.”

“알겠습니다, 대장.”

정리를 위해 남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정해진 궁려로 들어갔다.

“아쉽지만 나머진 내일 얘기해 줄게.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시타가 엉덩이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효령과 교기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발리안의 궁려였다. 효령과 교기, 시타 외에 군사들도 여럿 여기서 잠을 잤다. 발리안까지 합하면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

효령과 교기에게는, 대도위인 발리안이 단독으로 궁려를 사용하지 않는단 사실이 놀랍고도 낯설었다.

그러나 발리안은 허세, 겉치레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짐을 덜기 위해 궁려의 수를 줄이라 명령한 사람도 다름 아닌 그였다.

“오늘 날씨를 보아하니 내일 새벽에도 꽤 춥겠다.”

시타가 양털 이불을 펼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 여름이지만 안야국을 벗어나니 밤엔 급격히 온도가 떨어졌다. 간혹 새벽에 입김이 나오는 날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기탄 사람들은 사계절 내내 양털 이불을 사용했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털 이불은 통풍이 잘돼 땀을 많이 흘려도 금세 습기를 밖으로 빼내고 체온을 유지해 주었다.

불에도 잘 타지 않고 벌레나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 것은 물론 항취 기능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벼워서 들고 다니기에도 덮기에도 편했다.

효령이 한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밑에 두툼한 모포를 깔고 있을 때 발리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다들 편히 쉬어라.”

“예, 대장. 대장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대장.”

인사를 마친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발리안의 자리는 입구 바로 앞이었다.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뛰어나가기 위해서였다. 양털 이불을 꺼낸 발리안이 그것을 양손에 잡고 펼쳤다.

“…….”

그의 고갯짓에 효령이 쪼르르 양털 이불 앞으로 다가갔다. 한쪽 끝을 잡은 그녀가 빙글빙글 돌아 이불을 몸에 말았다. 효령이 누에고치 모양으로 대기하는 사이. 다른 양털 이불을 꺼낸 발리안이 먼저 자리에 누웠다.

“들어와.”

그가 효령을 향해 이불의 앞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효령이 폭삭 그 품으로 기어들어 갔다.

처음 발리안이 남들이 다 보는 데서 그녀를 안고 자려고 들었을 때. 효령도 교기도 놀라 기함할 뻔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 며칠 사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럴 때마다 시타는 효령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깝다! 원래 대장 품은 내 차지였는데…….」

기탄은 워낙 추운 지역이라 한겨울엔 다들 몸을 붙이고 잠을 잔다나? 약해서 자주 골골대곤 했던 시타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발리안이 종종 이렇게 안고 자곤 했단다. 그러지 않아도 효령과 교기를 제외하곤 모두가 몸을 대고 바짝 붙어 자는 것에 익숙했다.

‘아, 따뜻해.’

발리안의 향취와 뜨듯한 체온에 기분이 좋아진 효령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너른 등으로 바람을 다 막아주는 발리안의 품이 너무도 포근해서 절로 잠이 쏟아졌다.

행복함으로 나른해진 그녀와 달리, 그 옆쪽에 누운 시타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가 교기의 뒤통수를 향해 불퉁거렸다.

“야, 너 오늘도 이러기냐? 그 구석에 뭐가 있다고 자꾸만 달아나냐? 이리 와. 나 춥다고. 우리도 이쯤에서 화해하고…….”

“꿈 깨라.”

이럴 때 보면 교기는 용케도 기탄 말을 잘 알아들었다.

“이런 싸가지! 위험에 처한 약자를 외면하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무사냐?”

“네놈이 뭐라고 떠들든 난 사내놈과 살 비비며 잘 생각 없다. 절대 들러붙지 마라.”

두 사람이 기탄과 안야국 말로 으르렁거렸다.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고? 그렇게 물렁하게 살았으면 난 죽어도 진작에 죽었어. 이참에 내 강인한 생존력을 보여주지.”

재빨리 교기의 등에 달라붙은 시타가 한쪽 발을 떡 하니 교기의 몸 위에 올려놓았다.

“저리 떨어져라, 이 진드기 같은 놈!”

“싫다! 나도 네놈이 징글징글하게 싫지만 얼어 죽는 것보단 낫다고!”

“이놈이……!”

티격태격하는 그들 위로 불똥이 떨어졌다.

“여기서 더 떠들면 네놈들 둘 다 쫓아낸다!”

발리안의 호통에 시타와 교기가 조용해졌다.

끄응. 교기가 마지못해 아랫입술을 사리무는 기척에 누운 사람들이 다들 킥킥거렸다.

그날 밤. 교기는 시타에게 옴짝달싹 못 하게 붙들린 채 잠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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