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활기찬 나날 2
* * *
“곧 땀이 비 오듯 할 테니 윗옷 벗으라고.”
발리안은 이미 옷자락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그, 그냥 입고 할래요.”
“……?”
“미안하지만 안야국에선 남 앞에 몸을 드러내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서……. 존중해줘요, 대장.”
효령이 애써 태연한 척 다부지게 말했다.
꽤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발리안은 생각보다 순순히 넘어갔다.
“존중이라……. 좋아. 그럼 이리 가까이 와.”
“가, 가까이요?”
“그럼 거기서 날 죽일 건가?”
발리안의 핀잔에 효령이 마지못해 그에게 다가갔다.
“자.”
발리안이 효령의 손에 한 자가 조금 넘는 양날 단검을 쥐여 주었다.
철로 제작된 날, 금으로 된 손잡이 부분에 소용돌이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한눈에 보기에도 잘 만들어진 검이었다.
“이거 보통 단검이 아닌데요? 어디서 났어요?”
“아무리 찾아도 네 녀석의 작은 손에 맞을 만한 게 없어서…….”
발리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어머니가 쓰시던 거다.”
놀란 효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발란주 님이요? 이 귀한 걸 내가 받아도 돼요?”
“물건은 쓰라고 있는 거야.”
“하, 하지만 그러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머니 유품이잖아요?”
발리안의 입매가 휘었다.
“유품인 게 뭐 어때서? 몇 개 되지도 않는 유품…… 그거 빼곤 이미 다 팔았다. 그렇게 해서 아굴가와 시타, 여기 있는 놈들을 살렸지. 어머니라면 틀림없이 잘했다고 좋아하실걸?”
“그래도…….”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나에게 집중해. 잘 봐.”
효령 것보다 더 긴 단검을 든 발리안이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단검을 사용해서 적을 죽일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 두 번은 없어. 그 점을 명심해.”
“…….”
“먼저 단검은 이렇게 들어. 그리고 최대한 몸에 가깝게 붙여. 상대에게 틈을 보이거나 역습을 당하지 않도록.”
효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리안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적의 공격이 들어오면 이렇게 왼손으로 막고, 기회를 봐 공격한다. 이때 공격은 간결하고 정확하게. 상대의 몸을 노리는 건 멍청한 짓이야. 반 자 이상 깊이 박지 않으면 여간해선 죽지 않는다.”
“…….”
“그러니 힘이 부족한 네가 노려야 할 곳은 적의 급소야. 여기, 여기, 여기……. 찌르지 말고 그어.”
발리안이 손의 인대, 목의 후두부, 눈을 가리켰다.
“…….”
너무도 끔찍해서 효령의 몸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이제껏 호신이나 방어를 위해 무예를 익혔던 그녀에게 발리안의 가르침은 너무도 낯설었다. 자신이 진짜 살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단 사실에 더럭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효령은 서둘러 마음을 가다듬었다.
“절대 흥분은 금물이야. 단검은 속도보다 정확도가 제일 중요해. 무엇보다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마.”
“왜요?”
“내가 말한 기술은 하루 이틀 익혀서 되는 게 아니야. 어설프게 굴었다간 칼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죽어. 그러니까…….”
“…….”
“네게 버거운 상대라 여겨지면 무조건 달아나. 너희 안야국 사람들은 질 것이 뻔한 싸움에도 후퇴하거나 도망치는 걸 불명예로 생각하는데 그런 개죽음이 무슨 소용이지? 내 말 명심해.”
“…….”
“위험에 처하면 다른 사람 챙길 생각 말고 네 몸부터 챙겨. 짐이 되지 않는 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설사 네가 무리에서 떨어져 길을 잃는다 해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내.”
“…….”
“그러니 최대한 위험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 알았어?”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단검을 쥐어 봐. 그리고…….”
그로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 * *
“후우.”
목간통에 몸을 담근 효령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몸을 씻으러 이곳 명국공부에 오기 전. 훈련 막바지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으윽!」
발리안에 의해 효령은 순식간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번번이 당하는 것에 오기가 나서 정말 죽기 살기로 덤볐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효령의 단검은 어느새 발리안의 손에 쥐어진 채 그녀의 목 앞에 있었다.
「이걸로 벌써 일흔여덟 번째 내 손에 죽었군. 더는 명복을 빌 기운도 없다. 이제 그만 나도 편히 좀 죽어보자.」
발리안이 입 끝을 올리며 이죽거렸다. 그 얼굴이 어찌나 얄미운지 효령이 반사적으로 그의 급소를 향해 무릎을 날렸다.
그런데.
「이런……!」
탁.
간발의 차이로 발리안이 효령의 무릎을 막았다. 자신의 아랫부분과 효령을 번갈아 쳐다본 그가 어울리지 않게 엄살을 부렸다.
「이런 잔수도 부릴 줄 알다니, 뜻밖이군. 후우, 위험했어.」
「피. 한 방 제대로 먹일 수 있었는데…….」
약이 오른 효령이 콧살을 찡그렸다.
「이봐.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것과 사내 구실을 못 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고. 이거, 순하게 봤더니 생각보다 뒤끝 있고 위험한 놈이로군. 너,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기냐?」
「치사하긴 누가……. 인정사정 보지 말고 덤비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요?」
「끝까지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나도 몸 제대로 풀어도 되지?」
효령의 멱살을 붙든 발리안이 그녀를 불쑥 잡아당겼다.
엄마야.
순식간에 그와 코끝을 마주하게 된 효령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봐요, 대장. 우리 지금 너무 가깝다고요.’
「자는 범의 코를 찌르다니, 후회하지 마라.」
「후, 후회는 무슨…….」
‘네, 후회막심입니다. 나도 대장의 소중한 곳을 다치게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고요.’
효령이 진짜 속마음을 감춘 채 앙알거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쏘아보며 눈싸움을 하는 사이.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두 분…… 뭐 하는 겁니까?」
「교기야.」
화들짝 놀란 효령이 발리안을 밀쳐내고 올라간 옷을 가다듬었다.
「지금 우리 공자를 상대로 무얼 하는 겁니까?」
교기가 날 선 얼굴로 물었다.
「보면 모르나? 칼 쓰는 법을 일러주고 있었는데?」
먼지를 떨고 일어선 발리안이 태연히 들고 있던 단검을 내보였다.
교기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훈련을 그렇게…….」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조금 전 훈련장에 들어선 교기가 본 것은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있는 장면이었다.
틈 없이 바짝 붙은 채 얼굴을 겹치고 있는 것이 교기의 눈엔 꼭 그렇게 보였다. 기분이 상한 교기가 그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우리 공자께서 기탄에 가신다는 소리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그런데?」
「그건 안 됩니다. 기탄은 우리 공자께서 가시기엔 너무나 위험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교기야.」
효령이 교기를 말리려 부랴부랴 일어섰다. 그러나 발리안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삐딱한 자세로 물었다.
「네가 무슨 권한으로 효령을 가라 마라 하는 거지?」
「그건…….」
「가고 말고는 효령 스스로가 결정할 일 아닌가? 내가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천만에. 말리는 데도 가겠다 나선 사람은 효령이야.」
「……!」
교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효령을 쳐다보았다.
「사실이야, 교기야. 나 꼭 기탄에 가고 싶어.」
입술을 깨문 교기가 발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하.
이제 어이없어하는 쪽은 발리안이었다.
「이봐. 기탄이 무슨 이웃 동네라도 되는 줄 아나? 가고 싶다고 말만 던지면 갈 수 있는 데냐고? 거기 가려면 사람과 말의 식량, 무기……. 챙겨야 할 것이 좀 많은 줄 알아?」
순간, 뜻밖에도 교기가 발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대장.」
「……!」
효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이었다. 교기가 발리안을 대장이라고 부른 것은.
발리안 역시 조금은 놀란 기색이었다. 그의 입매가 묘하게 움직였다 생각한 순간.
「안 돼.」
에누리 없이 그 부탁을 거절한 발리안이 들고 있던 단검을 효령에게 건넸다.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이다. 지금부터는 쉴 때나 잘 때 반드시 그 단검을 쥐고 있도록. 그래야 손에 익을 테니까. 그럼 나 먼저 간다.」
발리안이 벗어 두었던 옷을 집어 들고 훈련장을 나갔다. 교기가 재빨리 그 뒤로 따라붙었다.
「저도 데려가십시오, 대장.」
「…….」
「대장이 안 된다고 하셔도 저 절대 포기 안 합니다.」
「…….」
「우리 공자께서 가시는 곳이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갑니다. 그러니 대장…….」
효령이 그랬듯, 이번엔 교기가 강아지처럼 졸졸 발리안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떠올린 효령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교기…… 발리안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요즘 발리안을 대하는 교기의 태도에 어딘지 묘하게 변화가 느껴졌다.
태도도 뚝뚝하고 불만이 있으면 감추지 않는다는 점은 여전한데 그 눈에서 적의가 빠졌다고 해야 하나.
교기는 빈말로라도 남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 발리안을 대장이라고 부르다니. 놀랄 일이었다.
‘잘됐다. 두 사람이 잘 지내면 나야말로 안심이지. 근데 대장이 교기가 기탄에 가는 걸 허락해 주려나? 나야 교기가 같이 가면 좋겠지만. 그나저나…….’
효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까 발리안이 느닷없이 멱살을 잡아 자신을 일으켜 세울 때. 그의 팔이 가슴을 스쳐 어찌나 놀랐던지. 혹시라도 여인임을 들킬까 봐 식은땀이 났다.
‘다음엔 좀 더 가슴을 바짝 동여야겠어.’
거기 생각이 미치자 문득 지난번 만났던 요희가 떠올랐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반할 만큼 아름다웠던 그녀. 지금도 가끔 침의 차림의 그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뽀얀 속살, 터질 듯 풍만한 가슴, 사슴을 닮은 매끈한 다리. 표정이 풍부하고 수려한 이목구비. 상대가 누구든 녹여버릴 듯한 눈웃음과 교태.
그녀가 발리안 앞에서 자신을 모함하며 눈물을 보였을 때. 효령은 발리안이 그 눈물에 넘어갈까, 더럭 두려움을 느꼈다. 그걸 염려할 만큼 요희의 외모와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거기 비하면 자신은…….
“…….”
효령의 눈이 목간통에 잠긴 자신의 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