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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37화 (37/116)

37화. 활기찬 나날 1

* * *

여름에 접어든 삭주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철광석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광산이며 마을 곳곳에 활기가 넘쳤다.

“거기 비켜요, 비켜. 수레 지나갑니다.”

음메 음메. 요란한 소 울음소리와 함께 철광석을 나르는 수레가 광산과 마을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산 중턱 장막에서는 일꾼들에게 먹일 밥을 짓느라 피난민 출신 여인들이 비지땀을 흘렸다. 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무더위도 무색하게 하는 야장들의 망치질 소리가 연신 공기를 뒤흔들었다.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사내들은 광산과 야철장으로 종일토록 물지게를 지어 날랐다.

“자네, 어깨가 아프다더니 지금은 좀 어떤가?”

“엊그제 삯을 받았더니 언제 아팠냐는 듯 싹 나았지 뭔가. 집사람에 아들딸까지 다 나서서 버니 이대로 가면 조만간 작은 집 한 칸 마련할 돈은 모을 것 같네.”

마을이며 거리마다 사람이 넘쳐나니 물건을 파는 상점과 노점들도 활기를 띠었다.

“아이고. 장사가 요즘만 같으면 정말 살맛 나겠구먼.”

야만족 군사들이 들어오고 난 후, 이전 같으면 자릿세를 뜯느라 바빴을 아전이며 무뢰배들이 종적을 감췄다.

세금도 없지, 도적도 없지. 이곳이 바로 천상이었다. 지금 마음 같아선 야만족들이 오래오래 머물러 줬으면 싶었다.

바쁜 것은 삭주 관사도 마찬가지였다. 매일매일이 광산이나 장터 못지않게 숨 가쁘게 돌아갔다. 물론 그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하, 하…….”

“하, 하…….”

훈련 시간도 아닌데 삼십여 명의 군사들이 지칠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훈련장을 돌고 돌았다. 곧 기탄에서 있을 무림제 때문이었다.

추위가 일찍 시작되는 기탄에서는 가을의 첫날에 이른 추수제가 열렸다. 하늘의 천신께 한 해를 지켜주신 데 대한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전사들이 무예를 겨루고 그 기량을 선보이는 최대 축제였다. 훈련장에 있는 군사들은 거기 참가하도록 뽑힌 이들이었다.

말을 관리하는 마방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먼 길을 가야 하는 말들의 발굽과 편자를 미리미리 점검하고 먹이도 잘 먹여 체력을 비축해둬야 하기 때문이었다.

“말들의 상태는 어떤가?”

“최상입니다.”

발리안의 물음에 말치기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앗, 대장이다!”

관사 뒷마당을 서성이던 효령이 마침 마방에서 나오는 발리안 곁으로 따라붙었다.

모개의 걱정과 달리 둘 사이는 이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끔 효령의 뒤통수가 이유 없이 따갑게 느껴진다는 점을 빼고는.

아니 하나가 더 있긴 했다. 잠을 자다 말고 발리안이 한 번씩 밖에 나가 찬 바람을 쐬고 온다는 거? 그에겐 안야국의 여름이 꽤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것 외엔 매일매일이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 점이 효령을 조금 속상하게 만들었다. 발리안과의 입맞춤을 의식하는 건 자신뿐인가 해서. 하지만 뭐……, 이런 날들도 싫지 않았다.

“대장, 제발요. 응? 제발…….”

효령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발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거기 놀러 가는 거 아니랬지.”

“놀러 가는 거 아니라는 거 나도 안다니까요.”

“기탄까지 한참이야. 남들에겐 두 달 넘게 걸리는 멀고 험한 길이라고. 우린 거길 20일 만에 주파한다. 잠자는 시간 외엔 쉬지 않을 거다. 가끔 말 위에서 자야 할 때도 있다고. 네 체력으론 못 버텨.”

발리안이 에누리 없이 효령의 입을 막았다. 그럴 줄 뻔히 알면서도 효령은 쉽사리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너무도 궁금했다. 발리안이 나고 자란 땅. 그를 비롯하여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이토록 강하게 담금질한 그 넓고 큰 세계가.

솔직히 말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기도 했다.

「기탄 사람 치고 춤 못 추는 사람은 없어. 대장 춤추는 모습이 꼭 그림 같았대.」

그걸 꼭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나 이전보다 체력 많이 좋아졌는데…….”

효령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앙알거렸다. 그렇다고 못 알아들을 발리안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꿈 깨시지.”

효령의 말을 뭉개버린 발리안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피.”

입을 대자로 내민 효령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발리안이 효령과 함께 정청에 들어서자 모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기탄에 가져가실 것들을 적은 목록입니다. 무기며 말들도 모두 준비를 마쳤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하니 되도록 짐과 수레를 줄여라.”

“이미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하지만 대도위가 되고 처음 입조하시는 것이니 아무래도 선물의 양이…….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보다는 우차를 사용하시는 것이 좋을 듯한데…….”

“소가 끄는 수레는 짐을 나르기에는 적당해도 속도를 내기는 어렵다.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도 쉽고. 그냥 말수레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처하겠습니다. 한데 말입니다, 대도위님…….”

모개가 진지한 얼굴로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전 여기 남는 게 낫지 않을까요?”

“뭐?”

“아굴가가 대도위님을 대신한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처하려면 아무래도 제가 있는 편이……. 교염 그 친구만으로는 해결 못 할 일들도 있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자네를 빼면 황궁 사정에 밝은 사람이 하나도 없질 않나?”

“기탄 황궁엔 제 안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오래된 옛 친구들도 있고요. 그들에게 부탁하면 기꺼이 대도위님을 도와줄 것입니다. 나머진…… 효령이가 잘 알아서 할 겁니다.”

“뭐? 효령이?”

“……!”

모개의 말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효령이었다.

“저, 저요?”

효령이 벙하니 넋을 놓은 사이. 모개가 발리안에게 말했다.

“사실 조정의 예법이라는 것이 나라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기탄의 것은 안야국에 비하면 훨씬 더 간단하고 차려야 할 것도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

“제가 보기에 효령은 이미 예법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문화 차이에서 오는 특이사항만 유념한다면 충분히 절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야호! 속으로 쾌재를 부른 효령과 달리 발리안은 신중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 틈에 모개가 말을 이었다.

“말이 끌든 소가 끌든 어차피 수레가 동원되는 이상, 시간은 예상보다 지체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남는다면 대장도 안심하고 출발을 앞당길 수 있으실 것 아닙니까?”

“…….”

“게다가…….”

모개가 바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에 가시는 길에 주도에서 안야국 사신단과 마주치실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무림제 때까지 기탄에 머물러 있을 거라 생각하나?”

“예. 마침 시기도 시기인 데다, 안야국 사신단에게 기탄은 처음 겪는 먼 여정이었을 겁니다. 그들이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 채 다시금 먼 길을 나설 것 같진 않습니다.”

“하긴.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으신 대칸께서 그들을 쉬이 놔주실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정말 그들과 다시 맞부딪치기라도 한다면……. 그땐 같은 안야국 사람인 효령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효령은 성락 장공주와 껄끄러운 사이인데 괜찮겠나?”

“안야국에서라면 몰라도 기탄에선 장공주님도 섣부르게 행동하진 못하실 겁니다. 그분과 사신들이 이곳 삭주에서 벌인 추태가 대칸께 알려져서 하등 좋을 게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

“장공주님께서 시집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을 견제하는 황후마마나 다른 후궁마마들에게 흠을 잡힐 만한 일을 하시겠습니까?”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흐음. 팔짱을 낀 발리안이 가는 눈으로 효령의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왜, 왜 그렇게 봐요?”

너무도 날카로운 시선에 볼이 빨개진 효령이 괜스레 가슴을 가렸다.

“도대체 매일 먹는 음식이며 고기는 어디로 갔나 해서. 그놈의 팔다리, 허리……. 도무지 마음에 안 든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요?”

효령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건 바람 한 번만 불면 훅 날아가게 생겼으니……. 모개.”

한숨을 내쉰 발리안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모개를 바라보았다.

“자넨 정말 이 녀석이 기탄까지 죽지 않고 살아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지독한 강행군을 견뎌내고?”

“무, 물론입니다.”

모개가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가다가 도적이라도 만나면?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것 같고?”

“그야…….”

대답을 못 하는 모개를 대신하여 효령이 끼어들었다.

“이래 봬도 저 무예도 조금 한다고요. 검도 쓸 줄 알…….”

흥. 발리안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지금 농담해? 내 보기엔 안야국 놈들이 하는 무예라는 건 순전히 전시용이야. 그렇게 불필요한 동작과 빈틈이 많아서야……. 안 되겠군.”

발리안이 결심한 듯 효령에게 말했다.

“너 내일 아침에 훈련장으로 나와. 칼 쓰는 법을 속성으로 일러줄 테니.”

“카, 칼요?”

“우리가 가는 길에 만나는 도적은 검 따윈 안 써. 활 아니면 도끼지. 검으로 상대하려 들었다간 금세 부러져. 보조적으로 단검 정도는 다룰 수 있어야 해.”

“…….”

“내가 너보다 덩치 큰 놈들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비법을 일러주지.”

효령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본 발리안의 입매가 얄궂게 휘어졌다.

“설마…… 그새 기탄에 갈 마음이 싹 사라진 건 아니지?”

“저, 전혀요.”

효령이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전혀 미덥진 않지만 그 말을 믿어보지.”

발리안이 씨익, 그녀를 향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 날 죽일 각오로 덤벼야 할 거다, 효령. 난 훈련장에선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으니까.”

* * *

체력 훈련이 끝나고 텅 빈 훈련장에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각오는 됐나?”

발리안의 물음에 꿀꺽, 효령이 마른침을 삼켰다. 준비가 되긴 됐는데 이렇게 긴장해서야 원. 시작도 하기 전에 진땀이 나서 손이 미끌거렸다.

“돼, 됐어요.”

효령이 마음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그럼…… 벗어.”

“……?”

효령이 어리둥절하여 눈을 깜빡였다.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그러나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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