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비밀스러운 대화
* * *
“헤. 걱정 마요, 대장. 더 없어서 못 먹을 만큼 잘 먹고 있으니까. 일꾼들 틈에 끼어 자꾸 먹다 보니까 안야국 음식도 꽤 맛있더라고요.”
시타가 반죽 좋게 미소를 지었다.
모개가 그들의 대화 틈으로 끼어들었다.
“대도위님, 삭주의 경계에 모여든 안야국 백성들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다른 지역에서 군사들을 동원하여 막고 있는 것 같지만, 일부가 밤을 틈타 산을 넘어오고 있습니다. 일단 그들을 모두 잡아두라 했는데…….”
“신원이 의심스러운 자를 제외하고는 받아들이고 일감을 줘라. 시타, 광산에 일꾼들 더 필요하지?”
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생각보다 철광석 매장량이 엄청나서 지금 인원으로는 턱없이 모자라요. 창고도 몇 개 더 지어야 할 것 같고요.”
“하지만 그러다 혹 그들 중에 안야국 첩자가 끼어들 가능성도…….”
모개의 염려에도 발리안은 태연했다.
“백성들을 막는다고 첩자가 삭주에 못 들어올 것 같나? 세상에 첩자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다, 모개.”
“하면…….”
“경계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아굴가에게 일러 군사들에게 더욱 주의를 주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도위님.”
“왜?”
“효령이가 아직 방에 있다니, 무슨 일이라도……?”
“몸이 뻔히 안 좋아 보이는 데도 기어이 나오겠다는 걸 내가 말렸다. 체했는지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는…….”
“체한 게 확실합니까?”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어디가 아픈지 물어도 우물쭈물, 그냥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나 하고…….”
시타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효령이가 생각보다 몸이 약한가 보네요. 왜 지난번에도 얼굴이 창백하니 아파서 비실댔잖아요. 괜찮은지 나라도 가 봐야겠다.”
모개가 시타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 내가 갈 테니 넌 그만 볼일 봐라, 시타.”
“예? 왜요, 모개? 나 진짜 효령이 보고 싶다고요.”
“그건 아는데……. 네가 가면 효령이가 반가워서 아픈 것도 참고 네 녀석의 그 긴 수다를 죄 들어줄 것 아니냐? 그럼 언제 나아?”
“그, 그런가?”
시타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효령이에게 꼭 확인해야 할 것도 있으니 내가 가마. 넌 내일쯤 가 봐.”
모개가 발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더 시키실 일 없으면…….”
“그래라.”
고개를 숙여 보인 모개가 홀로 방을 나섰다.
* * *
으흠.
발리안의 처소에 들어선 모개가 내실의 휘장 앞에서 낮게 헛기침을 했다. 늘 이 방에 출입하긴 했지만, 침상이 있는 안쪽엔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발리안이 자는 그곳에 드나드는 건 시타와 효령뿐이었다. 그것도 요즘엔 효령 혼자다시피 했지만.
“효령아, 나다. 혹 깨어 있느냐?”
“어? 모개? 드, 들어오세요.”
뜻밖의 목소리에 놀란 효령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랫배가 당기면서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사이, 모개가 휘장을 걷고 들어왔다.
“의자가 없어서……. 여기라도 좀 앉으세요.”
효령이 침상 한쪽을 가리키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모개는 그녀가 권하는 대로 효령 곁에 걸터앉았다.
“이런, 생각보다 안색이 안 좋구나. 많이 아프냐?”
효령이 기운 없는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뇨. 아픈 거 아니에요. 그냥 몸이 좀 찌뿌둥해서……. 괜히 모개에게까지 걱정을 끼쳤네요.”
“별소릴……. 나에게까지 그럴 필요 없다, 효령아.”
안쓰러운 눈으로 효령을 내려다보던 모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이미 알고 있다. 네가 사내가 아니라는 거…….”
“……!”
효령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모, 모개…….”
효령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놀라라고 한 말이 아니니 진정해라. 그리고 이거…….”
모개가 들고 있던 것을 효령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여러 겹으로 접은 두툼한 양털 모포였다.
“달군 돌과 쑥 태운 재를 자루에 넣어 모포에 싼 것이다. 배에 대고 있어라. 고통이 한결 줄어들 테니…….”
화르륵. 효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세상에. 여인인 것은 둘째 치고 아무래도 달거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들킨 모양이었다.
“…….”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효령을 두고 모개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내가 혼인 전에 자주 쓰던 방법이다. 감기도 모르는 건강한 사람이 유독 그때만 되면……. 혼인한 후로 깨끗이 나았는데, 이번엔 딸 녀석이 제 어미를 닮아 고생이지 뭐냐? 산시라고 너랑 동갑이란다.”
“모개…….”
“걱정하지 마라. 나 말고는 네가 여인이란 사실을 아는 이가 없으니……. 시큼털털하고 둔한 사내들만 모인 탓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모개의 말에 겨우 안도한 효령이 되물었다.
“그럼 모개는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그렇게 허술하게 굴었나요?”
“아니, 그렇다기보다……. 목선이며 어깨선, 목소리의 높낮이 때문이다. 아무리 여인처럼 고운 사내라도 그것까지 흉내 낼 수는 없지.”
“아…….”
“이래 봬도 난 꽤 섬세하단 소릴 듣는단다. 아내가 맨 처음 날 보고 한 말이 ‘당신은 전혀 기탄 사내 같지가 않아요’ 였어. 그 말에 어찌나 상처를 받았던지…….”
모개가 말을 하다 말고 피식 웃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발끈한 날 보고는 그제야 ‘그거 칭찬이었는데…….’ 하지 뭐냐? 난 속도 없이 그 말에 금세 풀어졌고 말이다. 하긴, 그땐 젊었으니까.”
모개의 눈에 어느새 그리움이 가득 들어찼다.
“아이고, 내가 별소릴…….”
황급히 과거를 떨어낸 그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보다 효령아.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혹…….”
모개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효령을 내려다보았다.
“삭주 밖에 두고 온 정인이 있느냐? 너를 뒤쫓는 자들이 그와 연관이 있는 건…….”
“아, 아뇨.”
효령이 얼른 손을 저었다.
“정인도 주인도 없어요. 전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아요.”
“그럼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그제야 안도한 듯 모개의 표정이 환해졌다.
“대장…… 좋아하지?”
“그, 그게…….”
말을 잇지 못하는 효령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격렬했던 발리안과의 입맞춤을 떠올려서인지, 아니면 배에 대고 있는 뜨듯한 모포 때문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시련 한 번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대장은 유독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단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큰 상처를 받았지.”
모개의 목소리가 안타까움으로 이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효령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누군지…… 물어도 돼요?”
“아버지이신 하투 칸 전하…….”
“네? 아버지요?”
후. 모개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장이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하던 분이지. 하지만 하투 칸께선 대장을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으셨다. 그 사랑을 너무도 목말라 하다 결국 대장은 어긋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 하지만…….”
그분은 대장 친부가 아니잖아요.
효령이 턱밑까지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모개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겉보기에 대장은 여유만만하고 거칠 것이 없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대장이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목이 메는지 모개가 잠시 숨을 골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안다. 효령이 네가 그 말라비틀어진 마음에 처음 스며든 사람이라는 거. 나나 아굴가, 시타와 호독니…… 우린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설마요. 저렇게 잘생겼는데 그간 스쳐 지난 여인이라도…….”
“아니.”
모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래 봬도 대장…… 지독하다 싶을 만큼 자신에겐 엄격하게 살았다. ‘어떤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거나 허투루 살지 않겠다’ ……돌아가신 어머니 앞에 맹세했거든.”
모개가 추억을 떠올리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발란주 님의 불행을 곁에서 지켜봐서인지…… 아니면,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인지……. 대장은 여인을 가까이한 적이 없다.”
“…….”
“그래서 머리 좋은 대장이 네가 여인이란 사실을 못 알아채는지도 모른다. 대장은 여인 자체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효령은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처음 발리안과 만났을 때, 그는 기루 한가운데 있었으면서도 기녀를 방에 들이지 않았었다.
“만약 네가 여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는 여기 있을 수 없다. 이곳의 군기와 군율이 얼마나 엄한지는 너도 잘 알지?”
“…….”
효령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날 밤 성락 장공주님 방에서 있었던 일로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은 아마 대장일 게다. 내 눈엔 그게 단순히 널 구하기 위한 연기 이상이었다는 게 보이거든. 하지만…….”
“…….”
“대장에게 있어 그건 절대 있어서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 대장은 이전보다 더 자신을 질책하고 단속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대장이 이전과 다르게 굴더라도 실망하거나 지치지 말라는 얘기죠?”
“그래.”
모개가 자그마한 효령의 손을 붙들었다.
“이건 네게 부담을 주거나, 대장에게 호의적인 네 마음에 기대 강요하려는 게 아니다. 언젠가 네가 네 의지로 이곳을 떠나겠다면 난 말리지 않을 거다, 효령아. 하지만…….”
“…….”
“대장이나 나, 아니 우리 모두에게 넌 성별에 상관없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효령이 모개의 커다란 손 위에 가만히 자신의 다른 손을 얹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기뻐요, 모개. 모개만 눈감아 준다면 저도 이곳에 오래오래 있고 싶어요.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제게도 귀한 동료들인걸요.”
“효령아.”
“전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모개.”
속내를 드러내고 조금 민망해진 효령이 부러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근데 이 처방 정말 끝내주는데요? 더는 아프지 않아요.”
“역시 그렇지? 내가 누구냐?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아는 대도위님의 왼팔 모개 아니냐?”
모개가 모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오른팔은 아굴가고요?”
“두말하면 잔소리. 아무리 나라도 그 자리를 노렸다간 아굴가 주먹에 골로 갈걸?”
“하하, 모개도 참…….”
언제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냐는 듯, 두 사람이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격의 없는 웃음이 오고 가는 사이.
끼이익.
밖에서 미세한 문소리가 들렸다. 효령과 모개의 대화 중간부터 내내 휘장 밖에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