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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35화 (35/116)

35화. 악의 4

* * *

자신의 입속을 마치 제집 안방처럼 거침없이 누비던 발리안의 혀를 생각하니 욱하니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입술을 물고 빨며 농락하는 솜씨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건 절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뭐야. 깜빡 속을 뻔했잖아.

이제껏 설렘으로 가슴 두근거렸던 자신이 어이없었다.

「난 여잘 상대로…… 그 짓 안 한다. 그렇다고 사낼 품는 취미도 없다.」

‘뭐, 뭐야?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면서? 거짓말쟁이!’

발끈한 효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발을 굴렀다.

“내가 두 번 다시 속나 봐라, 이 바람둥이, 난봉……!”

“누가 뭘 속았다고? 바람둥이라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한껏 성질 자랑을 하던 효령이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

이제 막 휘장을 걷고 들어오던 발리안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효령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뭐 하냐? 혹시 술주정?”

민망해진 효령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대, 대장. 장공주님을 따라간 거…… 아니었어요?”

“그러려고 했지. 한데 무슨 변덕인지 관두라지 뭐냐? 사신단의 우두머리가 와서 그러더군.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으니 자기들끼리 가겠다고.”

겨우 하룻밤 사이 장공주도 사신들도 발리안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번거로운 뒤치다꺼리를 피하게 된 건 발리안으로서도 기꺼운 일이었다.

“그래서요?”

“그렇다고 그냥 보낼 수도 없으니 삭주 끝에서 배웅하고 돌아왔지. 근데…… 그사이 무슨 일 있었나? 이게 무슨 난리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가 고프니 기분이 나빠져서요. 멀리 다녀와서 대장도 시장하죠? 우리 같이 밥 먹어요.”

효령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발리안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 * *

뙤약볕이 뜨거운 늦은 오후.

태후의 부름을 받은 맹유천이 급히 태후궁에 들었다. 미리 와 차를 들고 있던 재상 추엽이 그를 맞았다.

“어서 오게.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탁자에 자리를 잡기 무섭게 맹유천이 물었다. 태후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조금 전, 기탄에 간 사신단이 전서구를 보내왔다. 장공주와 대칸이 무사히 첫날밤을 치렀다는구나. 네 수하가 맡은 일을 잘 해낸 모양이다. 대칸이 무척이나 흡족해했다는 것이…….”

추엽이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서인지 다음에 보낼 공물의 양을 안야국 처지에 맞게 감해주었네.”

“다행이군요.”

“다행은 무슨……!”

태후가 발끈하여 맹유천을 쏘아보았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게 다 놈들의 작전인 것을……. 놈들은 처음부터 이럴 계산이었던 게다. 발리안 그놈이 먼저 나서 우리의 뺨을 치고 나중에 대칸이 어르는 걸로.”

“…….”

“이미 놈들도 알고 있었을 게다. 어디까지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를……. 그럼에도 우리를 옥죄어 겁먹게 만들고 후에 자비를 베풀어 인심을 얻으려는 수작이었단 말이다.”

“…….”

“멋모르는 중신과 상인 놈들은 벌써부터 대칸의 너그러움을 칭송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의 부당한 요구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인 나만 상대적으로 욕을 먹고 있으니.”

“…….”

“처음부터 이럴 수 있었던 걸 왜 그리 못 했느냐고 말이다.”

태후의 분노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깨달은 맹유천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누님.”

“그뿐이면 말을 안 한다. 삭주와 인접한 모평 지역의 태수가 전갈을 보내왔는데, 나 참, 기가 차서…….”

태후가 미간을 찡그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추엽이 태후를 대신하여 말을 이었다.

“지금 모평을 비롯하여 삭주와 인접한 지역들에는 삭주에 들어가려는 백성들이 줄을 섰다 하네. 삭주에 가면 일자리와 잠자리를 보장해주는 데다 2년 동안 세금을 면해준다고 말일세.”

“예?”

예상 밖의 소리에 맹유천의 이마가 구겨졌다.

“사실이네. 발리안 그자가 생각보다 삭주를 잘 다스리고 있는 모양일세. 약탈과 겁탈은커녕 여인과 아이, 심지어 노인들에게까지 먹을거리며 삯을 챙겨준다는 게야.”

“그 무자비한 야만족들이 피난민의 뒤를 봐주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소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해서 오랜 전란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제 발로 야만족 소굴로 몰려들고 있다네. 그 무지렁이들이 감히, 무능한 나라님보다 야만족 대장이 더 낫다는 겁 없는 소릴…….”

으흠. 추엽이 차마 이야길 끝맺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들뿐이 아니네. 안야국의 이름 있는 상단들마저 모조리 그 야만족 편에 붙었네.”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발리안 그자가, 지난번 교역으로 엄청난 피해를 본 상인들에게 삭주에서 채굴한 철광석을 낮은 가격에 최우선으로 넘기겠다는 약조를 했다는군.”

“…….”

“그 약아빠진 자는 철광석을 캐기도 전에 이미 판로까지 다 확보한 셈일세. 그 검은 속도 모르고 상인들은 발리안 그자를 마치 은인 보듯 하고 있으니, 원…….”

“…….”

“이참에 지난번 타격을 만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상단들에서, 먼저 나서 광산 기술자며 야철장을 찾아 삭주에 대주고 있는 지경이네.”

추엽의 입에서 불만과 한탄이 이어졌다.

“암튼 여러 가지로 상황이 최악일세. 지금 모평과 위주 등지에선 삭주로 넘어가려는 백성들과 그걸 말리려는 우리 쪽 군사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지고 있네. 해서 백성들이 반발하고 있다는데…….”

“…….”

“만약 삭주에서 그들을 받아주지 않으면, 다시금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단 소리가 나오고 있는 형편일세.”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여기서 발리안 그놈의 세력이 더 커진다면 우리로서는 정말 큰 문제가 아니냔 말이다. 그러다 또다시 반란이라도 일어나는 날엔…….”

태후가 분을 못 이겨 몸을 떨었다.

“천하에 몹쓸 야만족이라며 욕을 해댈 때는 언제고 다들 그 빌어먹을 놈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으니…….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이냐?”

“진정하십시오, 누님.”

“진정하라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느냐? 놈이 뒤에서 나와 황실을 비웃고 있을 걸 생각하면 열불이 나 죽겠는데,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오느냔 말이다.”

맹유천이 태후를 향해 몸을 숙였다.

“놈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누님을 괴롭힌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방법?”

태후가 죽다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화근이 될 싹은 아예 잘라버리는 수밖에요. 아무래도 발리안 그자를 죽여야겠습니다, 누님.”

“뭐라, 발리안을 죽여? 그게 가능하겠느냐? 그놈이 얼마나 교활한지 너도 잘 알지 않으냐? 게다가 기탄의 대칸이 가만있겠느냐?”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다 방법이 있게 마련입니다, 누님. 발리안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안 그랬다간…….”

맹유천이 바짝 소리를 낮췄다.

“누님과 황제 폐하는 물론 우리 안야국에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언제나 그랬듯……. 절대 누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단언하듯 말하는 맹유천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 * *

탁. 문을 닫고 처소에 들어선 맹유천이 찌를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 태후가 한 말이 다시금 귓전을 스쳤다.

「오냐, 널 믿고 모든 걸 맡기마. 단, 이 일에 실패했을 경우. 그 책임은 오롯이 네 몫이다. 절대 그 해가 나와 황상에게 미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느냐?」

‘실패라니…….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누님. 이렇게 된 이상, 기필코 끝장을 보고 말 테니까요.’

탁자로 다가간 맹유천이 서랍에서 서신을 꺼냈다. 안야국을 벗어나기 전, 요희가 마지막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효령 장공주님의 일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장공주님은 무탈하시고 앞으로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다만, 발리안 그자가 이미, 위주 도독의 배후에 상서 어른이 계심을 알고 있으니 당분간 조심하셔야 합니다.

기탄으로 떠나는 길에, 데려온 수하 둘을 은밀히 삭주에 남겨 두었습니다. 앞으로 그들이 상서 어른께 삭주의 상황을 살펴 아뢸 것입니다.

그리고…… 발리안은 생각보다 훨씬 더 머리가 좋은 잡니다. 그를 죽이지 않고는 효령 장공주님을 되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하지만 그자가 삭주에서 죽는다면 기탄이 가만있지 않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하시는 것이…….]

영리한 요희는 궁녀로 위장하여 데리고 간 여인 둘을 첩자로 삭주에 심어 두었다. 피난민 여인들 틈에 끼어 움직이면 운신도 편하고 사내들보다 의심을 피하기 쉬워서였다.

또 요희는, 발리안과 효령이 생각보다 더 끈끈한 사이라는 말은 부러 전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맹유천의 성격상 성급하게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맹유천은 요희의 서신에 크게 안심했다.

‘두고 보아라, 발리안. 네놈이 물색없이 설치고 다닐 날도 머지않았으니…….’

맹유천의 입가에 저열한 웃음이 걸렸다.

요희가 발리안을 없앨 방법이라며 세운 계획이 너무도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만 시행한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을 터. 마음이 바빠진 그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누구 있느냐?”

“예. 상서 어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가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당장 가서 주도 한경의 수비를 담당하는 상직군(上直軍) 중 무예가 가장 출중한 자들로 백 명을 추려라. 그리고…….”

맹유천이 수하의 귀에 대고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맹유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를 숙여 보인 수하가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모개와 시타가 발리안이 있는 정청으로 들어섰다.

“……!”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시타가 얼핏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여간한 일이 없는 한 발리안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효령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모개가 탁자에 두루마리를 내려놓는 사이, 시타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효령인 또 명국공부에 갔어요? 그 재수 없는 교기 놈이랑?”

“아니, 내 방…….”

“예? 설마 아직껏 잠을 자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요? 광산에서 지내느라 며칠 못 봤더니 효령이 생각이 나서 온 건데…….”

“내 생각은 안 나고?”

화들짝 놀란 시타가 정색하며 손을 저었다.

“그, 그럴 리가. 제일 보고 싶었던 건 대장이고 효령인 그다음…….”

흥, 발리안이 코웃음을 쳤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릴 해라. 어떻게 된 게 다들 밖에만 나갔다 오면, 효령이부터 찾는지……. 그놈이랑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하나같이 효령이 타령이야?”

“아니 그게 그러니까…….”

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시타 대신 모개가 대답했다.

“효령이 성품이 워낙 세심하고 다정해서 그럽니다. 녀석이 바쁜 대장을 대신해 군사들의 자잘한 불편을 살펴주니 너도나도 찾을 수밖에요.”

“맞아요, 대장. 이건 효령일 대장보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만만해서 그런 거라고요. 나의 영원한 일 순위가 대장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함없다니까요.”

시타의 넉살에 결국 발리안도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으니 핏대 그만 세워라. 그보다 끼니는 잘 챙기고 있나? 어째 뺨이 쏙 꺼진 것이 마음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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