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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34화 (34/116)

34화. 악의 3

* * *

그들의 눈앞에서 차마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효령을 잡아당긴 발리안이 보란 듯 그녀와 입을 맞췄다. 그것도 사랑을 나눌 때나 할 법한 뜨겁고 격정적인 입맞춤을.

“…….”

“…….”

요희도 모개도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무참한 소리들이 가감 없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발리안은 마치 효령의 얼굴을 삼키기라도 할 듯, 탐욕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감빨고 있었다. 두 입술과 혀가 얽히며 만들어내는 미묘하고 끈적한 음성(淫聲)에 듣는 이들이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었다.

“……!”

탁탁. 어느 순간, 발리안의 품에 안겨 있던 효령이 더는 숨을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위태로웠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발리안은 한 박자 늦게 효령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하아 하아.

겨우 자유를 얻은 효령이 가쁜 숨을 토했다. 발리안이 중심을 잡지 못하여 휘청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당겨 보란 듯 효령을 품에 안았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느닷없이 이런 민망한 꼴을 보여 송구합니다만, 이 녀석은 이미 거친 저에게 길들어 여인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발리안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요희는 망연자실,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 녀석이 호의랍시고 보인 행동이 장공주님께 위협으로 느껴진 모양입니다. 하긴 이렇게 비실비실하고 곱상해 보여도 사내는 사내니까요. 데려가 단단히 벌을 주겠으니 그만 용서하시지요, 장공주님.”

발리안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서 일이 커진다면 장공주님께도 해가 될 것입니다. 사정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 옷차림으로 한밤중에 사내를 방으로 청한 장공주님의 태도를 문제 삼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요희가 미간을 찡그리며 다 늦게 몸을 가렸다.

“내내 감추고 있던 제 치부를 들여다보신 것으로 만족하시고……. 예의범절 따지기 좋아하는 사신들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지 않도록 이쯤에서 마무리하시지요.”

“대도위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 그리하지요.”

요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면 먼 길을 떠나셔야 할 테니 그만 침수 드십시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한 발리안이, 입맞춤의 여파로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는 효령을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모개가 황급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망신이람!’

요희는 분을 못 이겨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발리안이, 효령이 여인임을 눈치채지 못했단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도무지 기쁘지 않았다.

제 눈물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것, 발리안이 제게 일말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요희가 날 선 눈으로 발리안과 효령이 사라진 문을 노려보았다.

‘발리안 당신……. 사낼 밝힌다는 비난과 조롱을 감수할 만큼 효령을 아낀단 말이지. 그렇게 그 계집이 좋다면…… 부디 날 원망하지 마. 당신은 곧 그 계집 때문에 죽게 될 테니까.’

* * *

장공주가 머무는 숙소의 중문을 벗어나니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 청량함에 효령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 이젠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놔 줘요, 대장.”

발리안의 옆구리를 벗어난 효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해요, 대장. 내가 어리석었어요. 장공주님이 설마 그렇게 나올 줄은……. 나 정말 장공주님을 상대로 이상한 짓 한 적 없어요. 믿어줘요.”

“그딴 건 말 안 해도 알아.”

뒤를 따라오던 모개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장면을 보게 하려고 장공주님께서 일부러 늦은 시간 대도위님을 부르신 것 같습니다.”

발리안의 입가에 비소가 걸렸다.

“거참 재미있군. 궁에서 고이 자란 장공주가 벌인 일이라고 보기에는 꽤 천박하지 않나? 어쩜 우리 기탄이 안야국에 뒤통수를 맞은 걸지도 모르겠군.”

“……!”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효령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대도위님 말씀은…….”

모개가 날카로이 눈을 반짝였다.

“아까 연회에서 말인데……. 불평불만에 가득 찬 사신들에 비해 그 여잔 지나치게 느긋해 보였다. 제 아비뻘, 그것도 야만족에게 팔려 가는 여인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나?”

“…….”

“더구나 삭주 너머가 곧 안야국 국경인데, 고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그런 여유를 부리다니. 장공주다운 의연함이라고 보기엔 한참 지나쳤다. 너…….”

발리안이 모개와 대화하다 말고 효령을 향해 돌아섰다.

“성락 장공주에 대해 뭐 좀 아는 거 있나?”

“……어, 없어요.”

효령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긴, 알았다면 거기서 그렇게 한심하게 당하고 있진 않았겠지.”

“미안해요.”

효령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제가 생각해도 너무 어리석었다. 상대가 여자라고 방심하다니. 비열한 맹유천의 수하라면 충분히 경계했어야 마땅했다.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발리안이 입을 열었다.

“의기소침할 것 없어. 악당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악당뿐이야. 너처럼 착해빠진 녀석은 상대가 그런 짓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하는 게 당연해. 나쁜 게 아니라고. 단…….”

“……?”

“곁에 나처럼 유능한 사람이 없는 한 늘 당하고 살겠지. 그러니 나와 만난 걸 천운으로 알아. 그리고…….”

“……?”

“아까 일에 의미 두지 마라. 상대가 네가 아닌 아굴가나 모개, 시타라도 그랬을 테니까. 알았으면 들어가 봐.”

피. 괜스레 기분을 상한 효령이 슬그머니 입을 내밀었다.

‘뭐야. 꼭 그렇게 정색하며 말할 건 없잖아요. 그거…… 나에겐 첫 입맞춤이었는데.’

효령이 서운한 기색을 감추며 꾸뻑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마친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발리안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굳었다.

“오늘 밤 있었던 일은 절대 함구해라, 모개.”

모개가 놀란 얼굴로 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예? 하지만 만약 그 장공주님이 진짜가 아니라면 대칸께 아뢰는 것이…….”

“아니, 대칸께서도 안야국이 그런 잔수를 부릴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실 게다. 게다가 그 장공주를 선택한 건 발타고 형님이 아니냐? 자칫하다간 형님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수도 있다.”

“하긴, 이제 막 대도위가 되셨는데 태자 전하와 척을 지시는 건……. 하지만 혹 그 장공주님이 대도위님 앞날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닐는지.”

발리안의 입매가 비릿하게 비틀렸다.

“내가 염려하는 건 발타고 형님과 장공주, 그 두 사람이 결탁했을 때다. 어쩌면 이미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걱정 마라. 어떤 경우든 두 사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을 테니.”

“조심하십시오, 대도위님. 이전이라면 모르지만, 태자 전하께서 대도위님을 예의 주시하고 계시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늦은 밤까지 수고 많았다, 모개. 그만 들어가 쉬어라.”

“알겠습니다. 대도위님도 편히 쉬십시오.”

몇 걸음을 떼던 모개가 문득 멈춰 섰다.

“저기…… 대도위님, 아니 대장.”

그가 발리안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세월 대장을 지켜본 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제껏 대장의 선택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혹…… 스스로가 납득 못 할 당황스러운 순간이 온다 해도…….”

“……?”

“자신을 믿으십시오. 대장은 몰라도, 대장의 본능과 영혼은 그게 옳은 선택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일방적으로 말을 마친 모개가 발리안의 대꾸도 기다리지 않은 채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에서 발리안이 마치 허라도 찔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 * *

“…….”

해가 중천에 걸리고서야 효령이 부스스 겨우 눈을 떴다. 지난밤 늦게까지 잠을 설친 탓에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했다.

힐끗, 효령이 발리안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일 이후로, 그는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꼭 얼굴을 비추겠다더니, 인사도 없이 가버렸네. 하여튼 못 믿을 남자라니까. 그나저나 지금쯤 어디까지 갔으려나.’

지금 발리안은 군사들을 이끌고 장공주 일행을 호위하고 있을 터. 그들을 환송하느라 관사에 속한 사람 모두가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장공주와 껄끄러운 사이가 된 효령만 방에 갇혀 반강제로 자유 시간을 얻게 되었다.

여느 때라면 발리안의 부재에 마음이 허전했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이렇게 안도가 될 줄이야.

“후우.”

어제 일을 떠올린 효령의 뺨이 저녁노을처럼 붉어졌다. 두근두근. 또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대장…….’

발리안과의 입맞춤은 효령에게는 정신을 잃을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제껏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단순히 입술과 입술이 만나는 것 이상의 농밀한 행위.

제 입에서 그런 야릇한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온몸이 꼬일 만큼 아찔한 전율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난생처음 알았다.

숨이 막혀 발리안의 가슴을 때리면서도 정작 그의 입술이 자신에게서 떨어질까 전전긍긍했던 기억.

생의 첫 입맞춤 상대가 하필 대장, 그것도 한유의 친척 형님이라니……. 앞으로 그를 어찌 보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건, 자신이 그와의 입맞춤을 다시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 설마 내가 대장을 좋아하는 건가?’

그럴 리가.

효령이 다급히 머리를 저었다.

‘어젠 날 구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장도 그렇게 말했잖아.’

「아까 일에 의미 두지 마라. 그 상대가 네가 아닌 아굴가나 모개, 시타라도 그랬을 테니까.」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던 단호한 목소리를 떠올리니 온몸에서 쫙 힘이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었잖아. 내겐 첫 입맞춤이었는데……. 어쩌면 대장도 처음……?’

거기 생각이 미치자, 효령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아니, 잠깐만! 그런 사람이 그렇게 능숙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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