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악의 2
* * *
‘장공주 행세만 아니었다면 당장 침상에 쓰러뜨렸을 텐데…….’
요희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사내라면 물리도록 거쳐온 그녀에게도 발리안 같은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하얗고 맑은 도자기 같은 피부에 그린 듯 수려하고 섬세한 이목구비. 그와는 대조적으로 터질 듯 탄탄했던 가슴이며 어깨, 허벅지. 세상에 감히 그와 비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그 짓도 잘하려나? 야만족들은 야생 종마처럼 기운이 팔팔하다던데. 정말 궁금해 미치겠네. 그러고 보면 효령 장공주는 참 운도 좋아. 걸리는 사내마다 하나같이 대어이니…….’
요희가 침의를 조금 더 아래로 잡아 내렸다. 풍만하여 금세라도 터질 듯한 가슴이, 높이 달린 치마허리 밖으로 삐죽 삐져나왔다.
‘슬슬 질투가 나려고 한단 말이야. 장공주라는 신분만 빼면 효령 그 따분한 계집이 대체 무슨 매력이 있다고. 얼굴? 내 보기엔 그저 그렇던데……. 상서 어른은 어쩌자고 그런 계집에게 혼이 쏙 빠져서는…….’
하긴……. 그녀가 이내 수긍하며 흑단 같은 머리를 빗어 내렸다.
‘상서 어른은 원래 가지지 못한 것에만 미련을 두는 성미니 말이야. 한 번 품고 나면 금세 시들해지셔서는. 그렇게 갈아치운 계집이 어디 한둘인가.’
자신만 보면 짐승처럼 달려드는 맹유천을 떠올린 요희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맹유천은 거의 하루도 여인 없이 잠들지 못하는, 안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호색한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요희는 매우 특별한 상대였다.
지칠 줄 모르는 기운 하며, 뜨거운 몸 하며. 나긋하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애교와 놀라운 잠자리 기교로는 그녀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여인에게선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맹유천이 걸핏하면 그녀를 찾아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몇 년을 한결같이 다시 찾는 여인은 요희가 유일했다. 그걸 알기에 요희는 늘 맹유천 앞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원래 사내들은 효령같이 요령 없는 계집에겐 일찍 물리게 되어 있어.’
거울에 비친 요희의 입매가 사악하게 휘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는 그냥 못 넘어가지. 상서 어른이 고통받는 동안 저는 저런 미남자와 붙어 희희낙락이라니. 효령 장공주, 당신도 고생 좀 해봐야겠어.’
요희가 섬뜩하게 눈을 반짝이는 사이,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장공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훗. 비소를 머금은 요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으로 모셔라.”
“예.”
대답과 함께 스르르, 방문이 열렸다.
“……!”
방으로 들어서던 효령이 일순 놀라 멈춰 섰다.
이전에 황궁에서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요희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탄성이 나올 만큼.
하지만 아무리 같은 여자끼리라 해도, 그녀의 차림은 차마 눈 뜨고 보기 민망했다. 마치 누군가를 유혹이라도 하려는 듯 노출이 지나쳤다.
효령이 얼어붙어 있는 사이, 요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뵙는군요, 장공주님.”
“…….”
“전 요희라고 합니다. 짐작하시듯 형부 상서 어른의 수하고요.”
“……날 보자 청했다던데…….”
효령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빈말로라도 다정히 인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요희가 한 짓은 아니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죽은 자매 성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안야국을 위해 기탄에 가다니…… 정말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해요. 한데 나에게 무슨 용건이죠?”
“아시겠지만 상서 어른은 아직 장공주님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역시…… 아직도 돌아갈 생각은 없으신가요?”
“전혀요.”
효령이 단호히 대답했다.
“틀림없이 형부 상서와 연락하고 있겠죠? 그렇담 전해줘요. 내가 궁에, 아니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발리안도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으니 섣부른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협박이신가요?”
“아뇨.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형부 상서가 멋대로 굴수록 위험해지는 건 안야국 백성들이에요. 그가 부디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약속드리지요. 반드시 그리 전해드리겠습니다.”
요희가 효령을 향해 시원스레 미소를 지었다. 예상 못 한 반응에 효령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주인으로 모시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분이 다 옳다 생각하는 건 아니랍니다. 오히려 장공주님 심정이 이해되거든요. 같은 여자니까요.”
“…….”
“저도 수차례 말씀드렸지만, 그분이 별로 말이 통하는 분이 아니라서……. 그러니 앞으로도 장공주님께서 고생깨나 하실 겁니다. 그 점은 정말 송구하게 생각해요.”
그녀가 다정한 얼굴로 효령에게 다가왔다.
“제가 뵙기를 청한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말 미안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어요. 주제넘은 짓일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와서 장공주님을 뵙지 않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어차피 전 기탄에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올 몸.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장공주님.”
요희가 효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행동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효령이었다.
효령이 요희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 이러지 말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
순간, 요희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했다.
‘후훗. 드디어 걸려들었군.’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매섭게 눈을 번득인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아!”
길고 날카로운 비명이 문을 뚫고 밖으로 새어 나갔다.
효령이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한 사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큰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납게 방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장공주님?”
효령의 등 뒤에서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효령?”
‘설마……!’
당황한 효령이 커다래진 눈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에는 놀란 얼굴의 발리안과 모개가 서 있었다. 기함한 그들의 표정에서 효령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
꿀꺽. 마른침을 삼킨 효령이 다시금 요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요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것도 잔뜩 흐트러진 차림으로.
그녀의 침의는 누가 억지로 잡아 끌어내린 것처럼 반쯤 흘러내려 있었다. 그 때문에 한쪽 어깨가 훤히 드러난 것은 물론 가슴도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말려 올라간 치마 밑으로는 매끈하게 뻗은 두 다리가 보였다.
“이, 이자가…… 이자가 날…… 욕보이려 했…….”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던 요희가 다른 손으로 치마를 잡아 내리다 말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다, 당신…….’
자신이 요희에게 당했단 사실을 알아챈 효령이 얼른 몸을 돌렸다.
“아, 아니야. 대장. 그, 그런 게 아니라…….”
성큼성큼. 발리안이 무서운 얼굴로 효령을 향해 다가왔다.
모개가 그를 말리고자 손을 뻗었지만 이미 발리안은 효령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가 화난 표정으로 한 손을 치켜들었다. 너무도 억울한 효령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정말이야, 대장. 저, 절대 대장이 생각하는 그런 게……!”
순간, 뺨을 때리는 요란한 소리 대신 엄청난 힘이 효령의 팔을 붙들었다. 곧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홱, 하니 뒤로 딸려갔다.
“……!”
화들짝 놀란 효령이 눈을 떴다. 어느새 그녀의 앞을 널따란 발리안의 등이 가로막고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공주님.”
발리안이 효령을 대신하여 요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놀라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절대 장공주님께 해를 끼칠 녀석이 아닙니다.”
“오, 오해라니요? 대도위는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이오?”
요희가, 여느 사내라면 당장 애간장이 녹아내릴 것 같은 애련한 모습으로 울먹였다.
“내가 위주 도독을 대신하여 지난 일을 사과하는데 갑자기 저자가 다가오더니…….”
요희의 눈에 금세 이슬 같은 커다란 눈물이 맺혔다. 어찌나 그 모습이 애절하고 아름다운지. 그녀의 실감 나는 연기에 당사자인 효령조차 속아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발리안의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라, 효령.”
“그, 그게 그러니까…….”
효령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말씀을 하시던 도중, 장공주님께서 어지러우신지 몸을 비틀거리셔서…… 넘어지시지 않도록 부축해드린 것뿐이에요, 대장.”
“거짓말!”
소리를 높인 요희가 애원하듯 발리안을 쳐다보았다.
“거짓말이에요. 조금 전, 날 보던 저자의 눈빛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요희의 의도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분명 오해십니다, 장공주님.”
발리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장공주님께선 조금이지만 연회 도중 독한 술을 드셨습니다. 술기운에 착각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발리안이 자기 편을 들기는커녕 좀처럼 태도를 바꾸지 않자 요희가 발끈하여 몸을 일으켰다. 더는 상대를 유혹하려는 노력 따윈 하지 않았다.
“대도위는 안야국 장공주인 내 말보다 하찮은 저자의 말을 더 믿는단 말이오? 저자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들었거늘, 대도위가 저자에 대해 대체 무얼 안다고…….”
요희가 성난 눈으로 발리안을 노려보았다.
“대도위에게는 자신의 수하만이 중요하고 대칸의 후궁이 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오? 대도위가 이리 나오겠다면 나 역시 원칙대로 할 수밖에요. 대칸께 아뢰어 반드시 이 일의 시시비비를…….”
“이 녀석에 대해 무얼 얼마나 아는지 물으셨지요? 예. 장공주님 말씀처럼 저는 이 녀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난 확실히 알지요. 이 녀석의 취향…….”
거기까지 말한 발리안이 느닷없이 효령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바, 발리……!”
너무 놀란 나머지 효령의 입에서 발리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마저 곧 그녀의 입안에서 사그라졌다.
“대도위!”
“대, 대도위님!”
요희는 물론이고 뒤에 서 있던 모개의 입마저 떡하니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