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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32화 (32/116)

32화. 악의 1

* * *

어둠이 내린 밤. 삭주 관사는 여느 때와 달리 늦도록 휘황한 불빛이 반짝였다. 장공주와 안야국 사신단을 맞느라 안에서는 연회가 한창이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발리안이 성락 장공주와 사신단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환대해주니 정말 고맙소. 호의에 감사드리오, 대도위.”

성락 장공주, 아니 요희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거, 술이 생각보다 입에 잘 맞습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요희 주변에 앉은 사신들은 겨우 몇 잔 술에 어느새 흥건하게 취해버렸다. 긴장을 푼다며 마신 술이 예상보다 더 독했기 때문이었다.

기탄 술은 입에는 순하지만 도수가 엄청난 까닭에 멋모르고 마셨다간 정신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술기운에 고양된 사신 하나가 조심성 없이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대접은 기대도 안 했는데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를 내셨습니다, 대도위.”

그의 말처럼 사신들 앞에 놓인 탁자에는 기탄과 안야국의 음식이 성의 있게 고루 차려져 있었다.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빠지지도 않았다.

“그렇습니까?”

자칫 기분을 상할 수 있는 말에도 발리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난 여기 오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에 말젖이나 얻어먹을 줄 알았는데 말이오.”

“장공주님도 계신데 그럴 수야 있소? 부족한 게 많겠지만 너그러이 보아주시오.”

발리안이 공손하게 나오자 말을 꺼낸 사신의 기세가 한껏 등등해졌다.

그는, 지난번 황궁에서 발리안이 안야국과 태후를 욕보인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태후의 먼 일가친척이며 맹유천과도 가까운 사이인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의 치욕을 떠올리니 이참에 너도 당해봐라, 하는 오기가 솟았다. 제아무리 두려울 것 없는 발리안이라도 대칸의 후궁이 될 장공주 일행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터. 거기 생각이 미친 그가 겁도 없이 주둥이를 나불댔다.

“듣자 하니 기탄은 법도 예의도 없는 나라라 들었소만. 우리 금지옥엽 장공주님께서 그 험한 곳에서 어찌 견디실지. 신하 된 자로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오.”

“…….”

“기탄에서는 나이 든 노인을 함부로 대한다면서요? 젊은 장정들이 먹다 남은 것이나 던져준다는데 그것이 사실이오?”

“…….”

순간 발리안의 입매가 묘하게 움직였다. 사신 놈이 작정하고 벌이는 도발이 빤히 눈에 보여서였다. 발리안의 침묵을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인 사신이 계속해서 신이 나 떠들어댔다.

“그것뿐이면 내 말을 안 하지.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계모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이나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한다지요? 아이고, 거참 망측하기도 하지.”

“…….”

“그렇다고 조정에는 예의범절이 있느냐, 그것도 아니질 않소? 이러니 우리로서는 기탄을 야만족에 오랑캐 취급을 할 수밖에.”

도를 넘는 사신의 말에도 그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다른 안야국 사신들은 앓던 이라도 빠진 양 후련한 표정이었다.

“저, 저놈이…….”

지나친 망발에, 발리안의 주변에 있던 호독니의 이마가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일어설 듯 열을 받은 그와 달리 아굴가나 모개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발리안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젠장.”

아굴가가 팔목을 붙든 바람에 호독니가 마지못해 분을 삼킨 순간. 드디어 발리안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백번 옳은 말이오. 겉치레와 예법을 중시하는 안야국 사람들 눈에 우리 기탄은 부족한 것투성이일 테니 말이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발리안이 느긋한 얼굴로 사신을 바라보았다.

“우리 기탄 역시 노인을 공경하고 존중하오. 어디를 가나 마을을 이끄는 원로는 대부분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노인들이오. 다만…….”

“…….”

“기탄은 전투로 해가 뜨고 지는 나라요. 해서 젊은이와 전사들을 더 우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오. 그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공경은커녕 노인들이 끼니도 때우지 못하고 배를 곯을 것이 아니요? 마치…….”

“……?”

“여기 삭주에 몰려든 안야국 피난민들처럼 말이오. 내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노인은 고사하고 장정과 여인, 아이들까지 모두 굶어 죽었을 텐데 그건 어찌 생각하시오?”

“……!”

뜨아. 할 말을 잃은 사신이 발리안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돌렸다.

“또 무얼 물었더라? 그렇지. 아비와 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 아내를 취하는 것 말인데……. 그럼 그 척박한 땅에서 홀로 된 여인과 아이들이 그저 죽어 가도록 방치하란 말이오? 아…….”

“…….”

“그래서 안야국엔 생활고를 겪다 굶어 죽는 과부와 고아들이 넘쳐나는 모양이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뒤로는 딴짓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여인들도 많고 말이오.”

“그, 그건…….”

안야국 사신들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진땀을 흘렸다.

“사내가 딸뻘, 손녀뻘 되는 여인을 첩으로 들이는 건 괜찮고, 여인이 그러면 안 된다는 건 무슨 고약한 심보인지…….”

“…….”

“듣자 하니 그렇게 예의범절을 따지는 안야국 황실에서도 조카와 외숙이, 성이 다른 사촌들끼리 혼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들었소만. 기탄이나 안야국이나 오십보백보 아니오?”

“…….”

“적어도 기탄엔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 여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가족들이 끝까지 자신을 책임져줄 것을 알기 때문이지. 설사 적에 의해 불행한 일을 당한다 해도…….”

“…….”

“우린 당신들처럼 가엾은 여인에게 죄를 물어 자결하게 하는 짓 따윈 안 하오. 사내가 무능해서 벌어진 일을 두고 왜 여인을 탓하겠소?”

“……”

“가족의 불행을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기탄의 사내들이오. 당신들처럼 옹졸하고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내들 눈엔 도저히 이해 못 할 일이겠지만.”

“…….”

“그러니 우리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며 체면치레를 하는 것이 아니오?”

발리안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기탄 조정에 예의범절이 없다, 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오. 우린 예법이네 절차네 하면서 쓸데없는 데서 시간을 버리는 짓은 안 하거든. 중요한 일은 독단으로 처리하는 대신…….”

“…….”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격의 없이 신랄한 대화를 나누고, 그래서 빠르게 최선의 결과에 도달하지요.”

“…….”

“잠시지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안야국은 상하가 충성이나 믿음 없이 예절만 따지고 드는 데다, 아름다운 옷과 건물에만 헛된 노력을 퍼붓고 있으니. 그러니 걸핏하면 아랫놈이 치고 올라와 반란이나 일으키고…….”

“…….”

“그럴듯한 건물과 아름다운 여인은 차고 넘치는데 그걸 제대로 지켜낼 힘은 없는 것이 아니오? 그러니…….”

발리안이 좌중을 훑어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말라비틀어진 예의를 따지며 남을 비웃기 전에 집안 단속이나 잘하는 것이 어떻소? 남에게 짓밟히고 나라를 잃은 후 뒤늦게 후회나 하지 말고 말이오.”

꿀꺽. 명백한 조롱에 사신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자신들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단 생각에 화들짝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사이, 요희가 입을 열었다.

“대도위. 기분이 상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시오. 다들 긴 여정에 피로가 겹친 데다 술이 과해 그런 모양이오. 그러니 오늘 연회는 이쯤에서 파하는 것이 어떨는지…….”

사신들이 기다렸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이고. 그러고 보니 제가 술이 너무 과했던 모양입니다. 어이쿠, 왜 이리 어지럽나.”

“장공주님 말씀처럼 그만 들어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먼저들 들어가 보시오. 난 조금 더 있다 갈 테니…….”

요희의 말에 사신들이 꾸뻑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럼 장공주님. 송구하지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편안히 주무십시오, 장공주님.”

그 말을 신호로 사신들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발리안과 눈을 마주칠세라,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밤이 깊었습니다. 장공주님께서도 이만 처소로 드시지요.”

“나도 그럴 생각입니다. 대도위가 내 청을 하나만 들어준다면요.”

요희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

“…….”

모두가 침소에 든 시각,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삭주 관사의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는 다름 아닌 효령이었다.

「장공주가 널 만나게 해달라 청했다.」

발리안이 전하는 말에 효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장공주님이요?」

「그래, 위주 도독에게서 호시 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전해 들은 모양이다. 그가 안이한 마음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면서 그 관련자를 만나게 해달라더군. 일단 말은 건네보겠다 했다. 내키지 않으면 거절…….」

「아뇨. 만나 볼게요.」

형부 상서 맹유천의 사람인 그녀가 자신을 만나려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너무도 뜻밖의 제안인 터라 꺼림칙하면서도 어쩜 이번이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내 뜻을 확실히 전해야겠어. 더는 형부 상서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조금 전 일을 떠올린 효령이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중문으로 다가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한 궁녀가 다가왔다.

“이쪽입니다.”

궁녀는 연못 주변을 지나 환하게 등을 밝힌 장공주의 숙소로 효령을 안내했다.

삭주 관사에 딸린 건물 중 가장 호젓한, 아름다운 정원을 끼고 있는 커다란 별채였다. 싱그러운 꽃향기와 짙푸른 신록이 달빛과 어울려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는 이곳은 원래 삭주 도독의 처와 첩들이 사용하던 곳으로 정무를 보는 정청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시각, 침의를 입은 요희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발리안이라…….’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생긴 그의 얼굴을 떠올린 요희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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