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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31화 (31/116)

31화. 드러난 비밀 7

* * *

한유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대답해요. 맞아요? 당신이 정말 내 친척이 맞냔……!”

“소리 낮춰.”

“대답하라고요, 빨리!”

“목소리 낮추래도!”

발리안이 버럭 성을 냈다.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디서 그딴 헛소릴…….”

“거짓말 말아요. 그럼 효령 누…… 아니, 효령 형님이 거짓말을 했다고요? 효령 형님은 나한테 거짓말 안 해. 그런 거 못 한다고요.”

“뭐? 효령?”

대번에 상황을 짐작한 발리안이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빌어먹을!”

그의 하얀 얼굴이 몰라보게 일그러졌다.

“설마하니 효령이 내 물건을 뒤지고 다닐 줄은 몰랐군.”

“그, 그런 거 아니에요. 효령 형님도 서책들을 정리하다 우연히 봤다고……. 이봐요! 말 돌리지 마요. 내 말 맞는 거죠? 당신, 내 친척 형님이 맞잖아. 근데 왜 말 안 했어요? 왜 처음부터……!”

“이봐, 너!”

발리안이 한유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꼭 설명해야 아나?”

“아니, 말 안 해도 알아요. 형님 아버지가 안야국 사람이라고 하면, 군사들이 말을 안 들을까 봐서죠? 아님, 아버지가 안야국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워……!”

“그 입 닥쳐!”

발리안이 한유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설씨 피를 이었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

“뭐, 뭐라고요?”

“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그야…….”

사납게 다그치는 발리안 때문에 한유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난 흑야차야. 온 안야국이 경멸해 마지않는 야만족이라고. 그런 내가 언젠가 여길 떠나고 나면 황실이, 백성들이 널 가만둘 것 같나? 그들이 나에 대한 분풀이를 누구에게 하겠어, 응?”

“……!”

“그러니 살고 싶으면 그 입 다물어. 어디 가서 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말고. 이제껏 그랬듯 날 원수 보듯 미워하란 말이야. 알았어?”

“……시, 싫어!”

한유가 눈물 가득한 눈으로 발리안을 쏘아보았다.

“누가 야만족 말 따윌 듣는다고. 싫어, 싫다고! 싫단 말이야.”

그가 와락 발리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기껏 어렵게 형님을 만났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해? 목숨을 구해준 것도 모르고 내내 미워했는데…… 그래서 미안해 죽겠는데 나더러 여기서 더 죄를 지으라고? 싫어.”

“너…….”

“내가 그렇게 배은망덕한 놈이 되면 제일 먼저 돌아가신 울 아버지가 실망하실 거야.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고.”

“…….”

“효령 형님이랑 난 어릴 때부터 늘 형님 아버지 이야길 듣고 자랐어. 초원의 별이 됐다는 그분이 너무나 궁금했다고. 그래서 기탄 말도 배웠단 말이야.”

“…….”

“내가 죽는 게 싫으면…… 형님이 지켜주면 되잖아. 효령 형님이 그랬어. 앞으로 두 나라가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면, 그래서 서로가 미워하지 않는 날이 오면…….”

한유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형님은 분명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한유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쏟아 놓았다.

“하.”

난감해진 발리안이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유의 흐느낌에 무거워진 공기가 제풀에 지쳐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발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 * *

“……!”

깊은 밤, 효령은 잠에서 깨어났다. 문득 옆자리가 선득하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과연, 발리안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휘장 밖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거기 있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발리안의 옷을 주워든 효령이 휘장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발리안은 지도를 펼쳐놓은 채 불빛 너머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러다 감기 걸려요.”

“……!”

효령이 어깨에 겉옷을 걸쳐주자 발리안이 몸을 흠칫했다.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그녀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급히 얼굴을 풀며 말했다.

“왜 더 자지 않고?”

“그게…….”

효령이 의자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혼날 짓을 했는데 대장이 아무 말 안 하니까 불안해서요. 화 안 낼 거예요?”

“내가 진짜 화를 내면…… 두려워해야 할걸?”

“그런가? 하긴 대장은 화를 잘 안 내더라. 근데 그게 더 무섭다는 거 알아요?”

“…….”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유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애가 안야국에선 대장과 가장 가까운 핏줄이니까.”

유교를 숭상하는 안야국에선 일찍부터 종법이라 불리는, 제사의 계승 및 종족의 결합과 관련된 친족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발리안은 한유와 같은 고조부모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혈족으로, 두 사람은 먼 친척 간이 되었다.

그에 비해 효령과는 종법이 규정한 친족의 범위를 벗어난 사이였다. 그럼에도 중간에 낀 한유 때문인지 효령은 발리안이 전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제외하고 한유에게 남은 유일한 친척인 데다, 어린 시절 내내 그의 아버지 설규한에 대해 들어왔기에 더더욱.

“넌 내가 핏줄 따위에 연연하는 약해빠진 인간이라 생각하는 건가?”

발리안이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걸핏하면 예의 운운하는 너희 안야국 사람들도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선 부모 자식, 형제도 죽이는데 야만족이라고 다를까. 나에게 그런 걸 기대했다간 크게 실망할 거다.”

“그런가요?”

효령이 두 손으로 지그시 턱을 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기대할래요.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데 미리부터 포기하다니. 그런 삶은 우울해서 싫어요.”

“현실을 외면하겠다는 거야?”

“아뇨. 원하는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에요. 처음엔 누구도 평화로운 삭주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어느새 현실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대장도 장담하지 마요.”

“…….”

“대장이나 나나 앞으로……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딴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효령이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유도 벌써 달라진걸요. 한유가, 명국공부에 있는 꼬맹이들에게 자기가 기탄 말을 가르쳐보겠대요. 그렇게 활기찬 모습 정말 오랜만이에요. 덕분에 난 여기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겠어요.”

“…….”

“걱정하지 말아요. 한유, 경솔히 행동하지 않을 테니까.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아이예요.”

말을 마친 효령이 기지개를 켰다.

“아함. 잠을 설쳤더니…… 졸린다. 대장은 더 안 잘 거예요?”

“네게 말해둘 게 있는데…….”

발리안이 효령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모개와 교염에겐 미리 일러뒀지만…… 내일 장공주 일행이 이곳에 올 거다.”

“네?”

뜻밖의 이야기에 효령의 눈이 커졌다.

“기탄에 후궁으로 가는 장공주와 안야국 사신단 말이다. 지금 위주에 머무르고 있는데, 내일 밤이면 삭주에 도착해. 그쪽에서 내게 낙갈국까지 호위를 부탁해 왔다.”

“낙갈국이라면…….”

안야국과 기탄 사이에는 커다란 산맥 외에도 두 개의 나라와 여러 중소 부족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안야국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대현국, 다른 하나는 기탄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낙갈국이었다.

두 나라와 각 부족들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키면서 안야국과 기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안야국이나 기탄 입장에서는 제후국 정도로 취급하는 약소국들이었다.

“대칸께서 보낸 중신들이 낙갈국 국경에서 장공주 일행을 맞기로 한 모양이다.”

“갔다 오는 데 얼마나 걸려요?”

“장공주 일행의 속도에 맞춰야 하니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만. 대략 한 달 정도?”

“그렇게 오래요?”

예상보다 긴 시간에 효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요?”

“안 돼.”

발리안이 에누리 없이 거절했다.

“너…… 위주 도독을 비롯해서 꽤 높은 사람들과 안면이 있는 것 같던데……. 장공주 일행 중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어?”

그가 효령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이제껏 널 생각해서 굳이 묻진 않았다만…… 대체 모시던 사람이 누구야? 누구기에 위주 도독까지 동원해 내 눈앞에서 널 납치하려는 그런 간 큰 짓을 벌여?”

“그, 그게…….”

느닷없는 질문에 놀란 효령이 마른침을 삼켰다.

“네 얼굴을 보니 역시 둘 중 하나군. 형부 상서 맹유천 아니면, 재상 추엽. 물론 형부 상서 쪽일 확률이 높지만…….”

순식간에 효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그걸 어떻게?”

“네가 처음 여기 왔을 때 했던 말을 생각하면 짐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게 위주 도독이 날 쫓던 이유예요. 내가 명국공부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

그제야 지난 기억을 떠올린 효령이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상대가 맹유천이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내내 전전긍긍했건만. 이렇게 쉽게 간파당하다니.

“겁 많은 위주 도독이 두 번이나 너와 얽히다니. 같은 이유, 같은 사람의 지시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리고 네 말대로라면 그 상대는 틀림없이 명국공부에서 일을 벌인 맹유천일 테고.”

“…….”

“그보다…… 난 도무지 이율 모르겠군. 내가 이미 삭주와 철광석을 모두 차지한 상태에서 널 잡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게 유능한 수하들을 잃어도 좋을 만큼 중요한 일인가?”

“그, 그건…….”

당황한 효령이 급히 둘러댈 말을 찾았다.

“그건 그 사람이 대장과 달리 치졸하고 못된 사람이라 그래요. 자신이 당한 건 절대 못 잊는 성미라서. 그 손으로 직접 날 죽이기 전까진 절대 포기하지 않을걸요?”

발리안의 얼굴에 비소가 떠올랐다.

“하긴, 세상엔 그렇게 물불 못 가리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있지.”

“저기요, 대장. 형부 상서에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건가요?”

효령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걸 원치 않아서 이제껏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것 아닌가? 내가 안야국이나 황실에 보복이라도 할까 봐서…….”

“…….”

“이미 위주 도독에게 단단히 경고했으니 이번은 넘어가지. 하지만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면…… 그땐 네가 무슨 소릴 해도 자비는 없어.”

후. 그제야 안도한 효령의 얼굴이 겨우 펴졌다.

“이제 그만 들어가 자고, 장공주 일행이 떠날 때까진 절대 여기서 나오지 마. 알았어?”

“낙갈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 보러 올 거죠?”

“안 그럼……?”

“그럼 안 자고 내내 옆에서 대장 얼굴 구경할 거예요. 한 달이나 못 볼 텐데 그러다 얼굴 잊어버리면 어떡해요?”

“나날이 고집과 어리광만 느는군. 어째 매번 내가 당하는 기분이 드는데?”

“누가 할 소리! 대장 장난에 번번이 당하는 게 누군데 그래요? 그래서, 어쩔 거예요?”

“약속해, 약속한다고. 이젠 됐나?”

발리안이 심술 난 어린애처럼 툴툴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효령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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