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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바람에 흩날리고-30화 (30/116)

30화. 드러난 비밀 6

* * *

“지금은 분노에 휩싸여 온전한 판단을 못 하시겠지만 장공주님도 곧 깨달으실 겁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요희가 느긋한 얼굴로 맹유천을 올려다보았다.

“장공주님처럼 고귀한 분이 더럽고 냄새나는 야만족 곁에서 얼마나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곧 그 포악한 놈들에게 진저리를 치실 겝니다.”

“…….”

“그러니 장공주님이 상서 어른의 손을 뿌리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실 때 나서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때야말로 장공주님 눈엔 상서 어른이 은인으로 보일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사이 발리안 그놈이 효령에게 손을 대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이냐?”

“효령 장공주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아시면서……. 장공주님이 삭주에 들어가신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일이 벌어질 거였으면 진작 벌어지고도 남았지요.”

“…….”

“하지만 아니잖습니까? 그 말은, 무슨 수를 썼든 이제껏 장공주님의 처신이 훌륭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조바심 내실 것 없습니다.”

요희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기탄으로 떠날 때, 상서 어른의 숨통을 조금 틔워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그만 노여움을 푸세요. 어차피 상서 어른이 화를 내신다고 달라질 상황도 아니잖습니까?”

“…….”

그녀가 향로로 다가가 향을 피웠다. 곧 그윽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숙면에 좋은 향이니 모든 것을 잊고 한숨 주무십시오. 그러고 나면 한결 머리가 개운해지실 겁니다. 그럼 자릴 비켜드릴 테니 편안히……!”

탁. 맹유천이 요희의 팔목을 붙들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내 이 더럽고 우중충한 기분을 풀어 줄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아이참, 상서 어른도!”

맹유천이 앙탈을 부리는 요희를 침소로 끌고 들어갔다.

다짜고짜 그녀를 침상에 쓰러뜨린 맹유천이 애써 입은 요희의 옷을 다급히 풀어 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공주 궁에서는 다시금 끈적한 교성과 된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 *

두 손 한가득 짐을 든 교기가 몇몇 군사들과 함께 삭주 관사에 들어섰다. 그들은 지금 효령의 명으로 수선을 마친 이불을 나르는 중이었다.

요즘 명국공부는 한산해졌다. 피난민들 대부분이 광산과 관련된 일을 하느라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여인들 역시 그 치다꺼리를 위해 처소를 옮겼다. 광산 주변, 비어 있는 귀족들의 저택이 그들의 새 보금자리였다.

이제 명국공부에 남은 것은 노인과 아이들뿐이었다. 노인들이 낮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는 덕분에 여인들은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호시가 끝난 후 방에서 풀려난 효령은 지금 명국공부에서 아이들에게 기탄 말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교기도 맡은 일을 해결하는 참이었다.

“……!”

관사의 중문을 지나치던 교기가 저만치 앞을 걸어가고 있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이, 이거 좀 부탁하지!”

옆의 기탄 군사에게 짐을 넘긴 교기가 황급히 마당을 가로질렀다.

“공자님!”

“아, 교기 형님!”

가신 한 사람을 거느리고 있던 한유가 교기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자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볼 일이 좀 있어서…….”

“볼 일이라니 무슨…….”

교기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별일 아니에요. 잠깐 아저씨를 뵈러…….”

“아버지를 말씀입니까? 그럼 제가 안내하…….”

“아니, 됐어요.”

어쩐 일인지 한유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요, 형님. 나도 더는 어린애처럼 굴 생각 없으니까. 다들 제 몫을 하기 바쁜데 더 이상 짐이 되는 짓은 안 해요. 그러니까 형님도 날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공자님.”

“그만 가 볼게요. 나중에 봐요, 형님.”

일방적으로 말을 마친 한유가 가신과 함께 걸음을 떼었다.

‘어제 효령 장공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신 후로 내내 안색이 좋지 않으시던데……. 대체 무슨 일이지?’

교기가 불안한 눈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한유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뜻밖에도 발리안이 있는 정청이었다. 마침 안에서 나오던 모개가 그를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한유 공자시지요? 들어가 보십시오, 대도위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한유가 가신을 남겨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엔 발리안 혼자뿐이었다. 한유가 문 앞에 멈춰 서 있자, 발리안이 두루마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왔나?”

꿀꺽. 마른침을 삼킨 한유가 간신히 입을 벌렸다.

“명국공부의 설한유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발리안이 자신이 앉은 탁자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

한유는 발리안이 시킨 대로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그 행동이며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훗. 순간 발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두려운가?”

뜻밖의 질문에 한유가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야국 안에 흑야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들 당신이 진짜 흑야차라는 걸 모르고 있어서 그렇지.”

한유는 명국공부가 자객들에게 습격을 당한 날, 이미 흑야차와 만났다. 하지만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를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흑야차를 직접 본 소감은? 내 첫인상이 어떤지 궁금하군.”

“조금 더 무서운 얼굴을 상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어요.”

그간 발리안이 잘생겼다는 소릴 수도 없이 듣기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그가 잔인한 흑야차라는 걸 몰랐다면, 남녀를 따지지 않고 혹할 만한 외모였다. 그런 인물이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한유가 외면하듯 발리안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실망스러워요. 당신이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발리안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공자를 우습게 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은 내게 가족을 죽인 원수예요. 죽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근데 그런 날 혼자 있는 방에 들여요?”

“…….”

“그거…… 난 한주먹감도 안된다, 나 따위는 위협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그 뜻이잖아요?”

“그래서 기분이 상한 거로군.”

“그럼 그런 취급을 받고도 좋을 사람이 있어요?”

한유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본 발리안이 피식, 웃었다.

“귀엽군.”

“뭐, 뭐요?”

순간, 조롱당했다 생각한 한유의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발리안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내가 왜 공자에 대해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 그 밤을 빼면 우린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근데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키, 5척 5치. 몸무게 14관. 보폭, 2척. 검 쓰는 걸 익혔지만 그다지 대단한 실력은 아니고. 어릴 때 다릴 다친 적이 있는 데다, 안에 백첩포로 만든 속옷을 입었군.”

발리안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공자가 만약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옷 본새로 봐서 감출 수 있는 무기는 2자 미만의 단검. 하지만 옷이 스치며 내는 소리가 부드럽고 걸리는 게 없는 걸로 봐서 무기는 없고.”

“……!”

“평소 서예를 즐기고, 긴장하면 오른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쥐었다 폈다…….”

“다, 당신!”

당황한 한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가?”

발리안이 약 올리듯 한유를 내려다보았다.

“공자가 이 방안에 들어선 순간, 알아낸 것들이다. 미안하지만, 난 꼬맹이라고 우습게 보지 않아. 기탄에선 공자만 한 나이의 사내는 이미 다 전사거든. 나 역시 그 나이 때 죽인 자가 수백이 넘는다.”

“…….”

“그러니 어쭙잖은 자격지심 따윈 버려. 난 지금 공자를 명국공부를 대표하는 인물로 정중히 대하는 중이니까.”

“…….”

“효령에게 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설마 내 얼굴을 감상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뭐야?”

할 말을 잃고 아랫입술을 사리물고 있던 한유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철광석을 생산하게 되면…… 그걸로 안야국을 공격할 건가요?”

“내가 왜 그걸 설명해야 하지?”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부탁이에요. 그걸 알아야 나도 마음을 정할 수 있으니까.”

“마음을 정하다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정직하게 대답해 줘요. 안야국을 멸망시킬 건가요?”

“……아니.”

뜻밖의 대답에 한유의 눈이 커졌다. 그 대답이 너무도 빠르고 간결한 것이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아, 아니라고요?”

“난 단지 안야국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애초에 여기 눌러앉을 생각 같은 거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왜요? 안야국이 탐나지 않아요? 여긴 기탄에 비하면 모든 게 풍족…….”

“그건 너희 생각일 뿐이야. 안야국은 좁고 답답해. 오나가나 산들에 가로막혀서 말들이 마음껏 달릴 수 없질 않나?”

발리안이 말을 이었다.

“기탄 입장에서 여긴 오고 가기도, 관리하기도 쉽지 않은 지역이다. 자칫하다간 고립되어 화를 당하기 십상이지. 적당히 위협해서 필요한 걸 얻어내는 정도가 최선이야.”

“…….”

“여기 오니 너도나도 금을 좋아하더군. 그딴 건 기탄에 널렸어. 겨우 용병대일 뿐인 내 수하들도 누구나 금붙이 몇 개쯤은 가지고 있다고. 철광석 광산도 마찬가지야.”

“…….”

한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썼다.

“우리에게 모자란 것은 물과 곡식, 건초와 학문뿐이야. 앞으로 교역과 통행이 활성화되면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것들이지.”

“…….”

“그러니 지금 너희보다 문화가 뒤처진다고, 너희와 다른 풍속을 가졌다고 함부로 무시하는 버릇, 버려. 내가 보기엔 이 나라도 부조리한 것투성이니까. 우린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것뿐이다.”

“…….”

“다음 질문?”

“…….”

“이봐. 난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빨리…….”

“정말…….”

한유가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당신 아버지가…… 설, 규자, 한자. 그분 맞아요?”

순간, 내내 느긋하게 굴던 발리안의 안색이 변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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