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드러난 비밀 4
* * *
“그게…….”
시타가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을이면 대칸께서 머무시는 주도에서 무림제(戊林祭)라는 추수제가 열려. 오월에 열리는 천제(天祭)와 더불어 가장 큰 행사지. 대칸과 칸 전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로라하는 기탄의 전사들이 모두 모여 실력을 겨뤄.”
“…….”
“이제 대장은 대도위잖아. 대칸의 부하인데 당연히 빠질 수가 없지. 왕자만은 못 하지만 그거 엄청 높은 지위야. 재수가 좋으면 이번엔 장가를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자, 장가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낯선 단어에 효령의 가슴이 왠지 모르게 덜컹 내려앉았다.
“무림제 마지막 날엔 남녀 모두가 모여 춤을 추거든. 경기 우승자는 신분에 상관없이 춤 상대를 고를 수 있어. 마음을 고백할 좋은 기회지.”
“대장이…… 춤을 춰요?”
효령이 놀란 눈으로 시타를 바라보았다. 남녀가 함께 추는 춤이라니……. 안야국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와 함께 춤을 추는 발리안의 모습은 아무리 애를 써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기탄 사람치고 춤을 못 추는 사람은 없어. 대장도 마찬가지야. 춤추는 모습이 그림 같았대. 애석하게도 나는 직접 못 봤지만.”
시타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모개가 그러는데 열네 살 때 처음 우승하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춤을 췄다는데……. 그 상대가 누구였을 것 같아?”
“글쎄요. 누구였는데요?”
“어머니 발란주 님. 그때 벌써 대장은 지금만큼이나 키가 컸대. 기탄 최고의 미남 미녀가 춤을 추는데 어떻게 그림 같지 않을 수가 있겠어, 안 그래?”
효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리안의 춤 상대가 그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안도가 되었다.
“근데, 발란주 님께서 아프신 후로는 대장이 춤추는 걸 본 적이 없대. 덕분에 김샌 여자들이 많았지. 모든 경기를 휩쓴 우승자가 누구에게도 춤을 청하지 않으니…….”
“…….”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잖아. 이전에야 지위도 뭣도 없으니 혼인 말을 꺼내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대도위가 됐으니 여기저기서 대놓고 달려들걸? 대장 능력이야 이전부터 다들 인정하고 있으니까.”
“…….”
“만약 거기서 혼인까지 하게 되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아예 안 돌아올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다 풀어.”
말을 하다 말고 시타가 피식 힘없이 웃었다.
“정말 이상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다들 너한테 잘 보이려고 난리야. 네가 웃지 않으면 괜히 조마조마해. 이러다 우릴 버리고 도망가는 건 아닐까…….”
“…….”
“어쩜 대장도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시타의 말에 효령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자신도 동료로 인정받고 있는가, 해서.
효령이 촉촉해진 눈으로 시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시타. 난 절대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시타가 기쁜 얼굴로 덥썩 효령의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효령아. 그래, 우리 오래오래 같이 있자. 그래서 대장이 더 높은 사람이 되고 예쁜 여자랑 혼인도 하고, 주렁주렁 자식들도 많이 낳을 때까지, 우리가 대장 옆을 지키는 거다! 알았지?”
효령이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였다.
* * *
“……!”
자정이 지난 깊은 밤. 처소로 들어오던 발리안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이미 잠이 들었을 줄 알았는데……. 침상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효령 때문이었다.
“거짓말쟁이!”
어둠 속에서 효령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말에 발리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위주 도독이 보낸 놈. 그잘 죽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키지 않았지만 살려 보냈…….”
“누가 그것 때문이래요?”
효령이 뾰로통하니 입을 삐죽였다.
“날 더러는 도망가지 말랬으면서. 이렇게 대장 멋대로 날 피하는 게 어딨어요? 나 혼자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요.”
“……?”
“끌어안을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리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온단 말이에요.”
“……뭐?”
발리안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탁탁. 효령이 침상의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빨리 이리 와요. 그동안 못 잔 거, 다 책임지라고요.”
하.
잠시 말을 잃었던 발리안이 순순히 옷을 벗었다. 그것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발리안이 털썩, 효령의 곁에 드러누웠다.
“이제 됐나?”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효령이 그를 피해 침상 맨 끝에 몸을 눕혔다. 발리안이 어이가 없어 물었다.
“거긴 날 끌어안기엔 너무 멀지 않나?”
“흥! 우리 사이엔 이게 정상 거리예요. 난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아직 잠들지도 않았어요. 제정신에 안아주는 건 꿈도 꾸지 마요.”
“그럼 그러든지. 간만에 편히 자겠군.”
발리안이 어딘지 삐친 것 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
“…….”
두 사람 사이 자르르 냉기가 흘렀다.
소복소복, 그들 위로 어둠이 겹겹이 쌓였을 즈음. 효령이 가만히 발리안을 향해 돌아누웠다.
“…….”
발리안이 미안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어울리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는데……. 이전과 변함없는 모습의 그가 고맙고 또 반가웠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온통 상처로 뒤덮인 그의 등을 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
“대장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멋대로 군 거…….”
“…….”
“그런데도 날 나무라거나 미워하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요.”
“…….”
“근데 대장. 앞으로도 나…… 얌전히 있겠다 약속 못 해요. 안야국 사람이 다치거나 아픈 건 싫으니까.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킬 거예요. 하지만…….”
“…….”
“그렇다고 대장이 날 피하거나 거리를 두는 건 싫어. 화를 내도 좋으니까…… 같이 있어요, 우리.”
“…….”
대답 대신 발리안이 효령을 향해 몸을 돌렸다.
팔짱을 낀 그가 물끄러미 효령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지긋한 시선에 효령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려는 찰나.
발리안이 속삭였다.
“지금 그거 고백인가? 설마 날 좋아한다는 뜻……?”
“미, 미쳤어. 이게 어떻게 그런 얘기가 돼요?”
파르르, 효령이 발끈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남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분위기 깨기예요?”
그제야 씨익, 발리안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 얘기가 아니면…… 그럼 교기나 시타 놈에게도 그러나? ‘우리 늘 같이 있어요?’”
“지, 징그러워!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다고……?”
“징그럽다니. 네가 한 그대로 따라 한 건데…….”
효령이 발리안의 가슴을 때렸다.
“거짓말쟁이. 난 그렇게 안 했다니까……!”
말을 하던 효령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 그녀의 손목을 붙든 발리안이 효령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러고 자.”
“대, 대장.”
당황한 효령이 그 품을 벗어나려 바둥거렸다. 그러나 발리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게 내 답이다.”
“……답?”
“늘 같이 있겠다고.”
발리안이 효령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바위처럼 단단한 품에서 팔딱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괜스레 효령의 온몸이 뜨거워졌다.
“내 품에 안기다니…… 영광인 줄 알아. 시타놈이 봤으면 질투로 눈이 뒤집어졌을걸?”
“피…….”
효령이 붉어진 뺨을 감추며 입을 내밀었다.
“저, 저기요, 대장.”
그녀가 주저하며 물었다.
“시타가 그러는데…… 다들 쉬는 날이면 기, 기루에 간다면서요?”
“왜, 너도 생각 있나? 그럼 시타에게…….”
“아, 아뇨. 난 그냥…… 대장도 거기 가나 궁금해서…….”
훗. 발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면서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차, 착각이라니까요. 이건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에요. 빨리 말해 봐요. 대장도 가 봤어요?”
“당연하지. 난 사내 아닌가?”
너무도 태연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순간 효령은 맥이 빠졌다.
“왠지 실망한 것 같은데…….”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효령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너같이 비실비실한 놈도 드나드는데 나라고 못 갈 이유가 없잖아?”
“내가 언제……?”
“이봐.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벌써 잊었어?”
아! 그제야 효령이 한경의 부용각을 떠올렸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알아. 더 은밀하고 끈적한 일 말이지?”
발리안이 효령의 귓가에 대고 능글맞게 목소리를 깔았다.
이 남자가! 다 알면서 사람 놀리고 있어.
효령이 그의 가슴을 물어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발리안이 말했다.
“난 여잘 상대로…… 그 짓 안 한다.”
“……?”
“원치 않는 사내에게 안길 때 여자들이 어떤 눈빛을 하는지…… 너무도 잘 알거든. 난 그 눈빛이 싫어.”
비소를 흘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사낼 품는 취미도 없다. 여긴 온통 날 좋아하는 놈들투성이지만…… 땀내 나는 사내들끼리 뒹구는 건 훈련장으로 충분해.”
“…….”
“그러니까 안기라면 군말 말고 안겨. 세상에 나처럼 안전한 놈은 없을 테니까.”
큭. 발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헛갈리는 말.
그러나 그 어딘가에서 얼핏, 효령은 발리안의 상처를 엿본 것 같았다.
어쩜 좋을까…….
발리안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될 때마다 그가 싫어지기는커녕 자꾸만 방어벽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 드는 것을.
암담한 기분에 효령은 눈을 감았다.
‘어쩌지, 교기야? 네 말처럼 이 사람은 안야국을 도탄에 빠뜨린 사람인데. 위협이 되는 사람인데……. 그런데 난 이 사람을…….
나……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버렸어. 그래서 더는 미워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어.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의 핏줄 때문에 오래도록 고통받은 거라면…… 그럼 나까지 이 사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애써 변명을 늘어놓은 효령이 발리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른 건 나중에…….
오늘은 그냥 발리안이 제 곁에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더는 그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효령은 발리안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달빛에 비친 발리안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쌕쌕. 어느새 아이처럼 단잠에 빠져든 효령에게서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멀리서 동이 터올 때까지 발리안은 오래도록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